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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톺아보기] <단지 세상의 끝>: ‘중첩된 현재’
    REVIEW/Theater 2013. 3. 26. 00:48

    부재하지만 존재하는 시간들


    ▲ 연극  <단지 세상의 끝>, 지난 22일 열린 프레스리허설에서(이하 상동), 루이 역 김은석 배우


    ‘단지 세상의 끝’이란 제목은 ‘세계의 끝’이라는 종말론적 사고의 만연함의 풍조에 더해 그것을 약간은 긍정의 자세로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인 것 같았다. 사실 이 연극은 매우 개인적인 동시에 한 가족에서 일어나는 좁은 테두리 안에 한정된다. 그리고 연극을 보고 나면 이 제목은 주인공의 내면의 탄식의 일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어쩌면 꽤나 긴 언어와의 싸움에 던져진 느낌인데 독특한 듯한 어투들도 그에 한몫한다. 


    극단 프랑코포니의 지난 작품 <난 집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은 돌아오지 않은 오빠의 삶을 끊임없이 회상하며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가족들의 갖가지 상이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어느 날 돌아온 ‘루이’와 그로 인해 쌓여 있던 감정들이 마구 분출되는 가족들의 상이한 모습과 입장차를 가져간다는 점에서 어떤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


    사실 두 작품의 원작자가 장 뤽 라갸르스(1957-1995)로, 같은데 극단 프랑코포니에게 있어 극단이 추구하는 소재와 초점이 유사성 있는 작품 둘을 찾아내게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작품은 마치 부재하던 가족의 일원이 돌아왔을 때 그 결과를 보여주는 지난 작품의 후기와 같은 이야기의 성격을 지닌다고나 할까.


    ‘고양된 감정들’


    ▲ 연극  <단지 세상의 끝>, 지난 22일 열린 프레스리허설에서(이하 상동), 어머니 역 배우 지영란(왼쪽)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실제 미치는 영향이라는 점에서 이는 단순히 사실의 차원에 속하거나 지난 일에 불과한 대신 감정이 작동하는 정동(affect)의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쉬잔느, 까트린느, 어머니 이 과흥분성 장애를 지닌 듯한 세 여자는 충만한 그들의 감정을 루이에게 표출해 낸다. 감정의 도취에서 문득 상대방의 존재를 깨닫고 가령 “루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식의 자신들이 어떤 말을 하고 있다고 자기 확인의 말을 덧대기도 한다. 또한 “그게 더 낫겠다고 생각해요”·“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라는 말들로 생각의 인식 차원을 덧댄다. 


    가족들의 다양하고 흥분된 반응에 불구하고 돌아온 루이는 담담하게 그 이야기들을 그저 주어 담고 있을 뿐인데 루이가 돌아왔을 때 그는 가족과 친연성을 형성하기보다 예전 한 때를 공유했던 외부자의 입장에 가깝고 거기서 그의 듣기는 지난날을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말이 없다. 그리고 가족과 그와는 경계선이 그어진다.


    가족들의 말하기 방식은 흥분 상태를 띤다. 감정의 풍부한 예측 불가한 분명한 자장에 휩싸인다. 어떤 말들의 홍수와 사실 여부의 확인 이전에 이러한 감정의 양태가 초래하는 묘한 기류를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시간을 뛰어넘은 생생함의 그녀, 쉬잔느


    ▲ 연극  <단지 세상의 끝>, 지난 22일 열린 프레스리허설에서(이하 상동), 쉬잔느 역 배우 박묘경(오른쪽)


    먼저 루이의 여동생 쉬잔느의 태도는 꽤 복합적인데 루이가 무책임하게 떠난 데 대한 그래서 뭔가 결여의 지속된 삶을 동시에 그 결여가 다시 채워지고 말 것이라는 기대의 지속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서운함이 있었고 그 순간 역시 스스로 해결하며 갖는 승화된 감정들 그럼에도 해소되지 않는 감정들이 중첩되어 쌓여 있다. 


    그 감정이 드러남은 과거의 감정이라기보다 현재에 살아나는 그 자체의 살아있는 감정이다. 감정의 고양은 일렉트릭 기타를 변형시킨 디스토션 기타의 무미건조한 리듬 속에 그 자체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듯한 사운드의 상승과 일치한다. 이러한 사운드의 활용은 극의 일부로 차용되기보다는 오히려 극 전체를 감싸고 있는 우위의 입장을 형성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사운드는 이후, 말이 없던 루이가 분노를 표출하고 유아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때 풀어헤쳐지며 완전히 이성의 금기를 놓아 버리는 상황을 적확하게 그려낸다.


    곧 이 연극을 음악 자체에 삽입되는 대사들의 오르내림을 확인하는 것 같은 음악에서부터 출발한 연극으로 전도된 감상이 가능할 듯도 하다. 그 정도로 사운드가 중독성 있게 관객을 흡입한다. 


    침묵에서 폭발로, 앙투완느


    ▲ 연극  <단지 세상의 끝>, 지난 22일 열린 프레스리허설에서(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루이 역 김은석 배우, 앙투완느 역 강일, 까트린느 역 김혜영 배우


    앙투완느는 자기 책임이라고 하며 루이가 스스로의 책임을 덜 질 것을 간곡히 청한다. 사실 종용도 호소도 아닌 이 말은 또한 어떤 감정의 일환이다. 


    루이는 이들의 말 앞에서 자신의 말을 정작 펼쳐놓지 못하게 되는데 그가 외부성을 얻기 위해 바깥으로 여행을 감행했을 때 그 여행의 끝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오히려 그 집이 됐다. 곧 그의 최대한의 외부성의 획득을 감행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집이었던 셈이다. 


    동시에 이 친밀함을 획득할 수 없던 집에서 그의 내면은 수세에 몰리고 오히려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자유(여행)와 부자유(얽매임)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은 사실 분리된다기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의 내면의 극단적 표출이 여전히 가족이 있는 집에서 독백으로만 드러나며 집과 분리된 감각으로 다가올 때 그는 집에 왔지만, 그는 이제 자유로운 영혼이 아닌 외톨이이고 그것을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새삼스레 동시에 더 크게 느껴야 하게 된다.


    이러한 루이의 내면의 독백과 그에 대한 초점은 세 여자와는 다르게 불편한 표정에 말을 감추던 앙투완느가 그의 자유는 오히려 자유라는 방식의 외형 아래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불행한 삶을 자처함으로써, 또 가정으로부터의 불행을 실제적으로 맞닥뜨리지 않게 만듦으로써 상처받지 않으려는 차원에서 불행을 끌어안는 것이라는 신랄한 타격을 가한다.


    불확실한 외부로



    곧 루이의 이야기로 소급될 것만 같던 이야기는 이렇게 반전의 상황을 맞아 새로운 출구를 맞는다. 곧 모두에게는 제각각의 타당한 이야기의 차원과 관점이 존재했던 것이다. 일방적인 이야기들의 향연 속에 소통은 성사되지 않는 대신 각자 뿜어대던 시간의 기억 그보다 앞서는 절대적인 감정이 끊임없이 현재를 형성하며 지난 과거와 현재의 정합적인 질서를 형성하는 대신, 그저 꿈틀거리는 잠재적인 자장들의 복합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사실 세상의 끝은 이 가족들의 저마다의 이야기와 나아가 앙투완느의 강한 비판을 대면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소멸의 시점을 또 다른 여행의 지점으로 돌리는 쓸쓸한 죽음으로의 발걸음, 죽음으로부터의 발걸음을 통해 단지 세상의 끝인 루이의 끝나지 않는, 동시에 여운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죽음을 보여준다.


    이 죽음은 불확실한 동시에 확고하다. 그리고 꽤 불투명하게 그려진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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