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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안티고네>: '실재는 무엇인가'
    REVIEW/Theater 2013. 4. 21. 05:31

    이 작품은 안티고네의 극인가. 크레온의 극인가. 


    어디에 극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 그것을 가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인다. 안티고네는 실재(Real)의 지점을 건드리는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테베는 죽음의 징후로 가득하다. 테베 시민들은 전형적인 코러스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되지 않는 의견의 분별을 보이는 군중의 모습에 가깝다. 공포를 마주하고 죽음의 징후를 온 몸으로 드러내는 이들은 신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들판에서 헤맨다. 


    한편으로 신의 뜻을 갈구하는 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과 거리가 멀어진 저주 받은 산주검이다. 이들은 현실과 신의 경계 영역에서 그 말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영매와도 같은 모습이지만 그것을 듣는 데 실패하는 오로지 그 실패로써 삶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따라서 존재하는) 가망 없는 삶의 모습을 지닌다.


     이미 죽음에서 시작한 극은 죽음보다 더 한 무언가를 그려내야 한다. 신의 뜻이 끝난 자리에서 그것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를 품는 누군가가 등장해야 한다.


     여기에 법을 고수하는 독단적인 왕 크레온과 신의 당연한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지의 안티고네가 있다.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혈육인 안티고네·이스메네 자매는 오빠 폴리니케스 시신을 들판에 버려 짐승의 먹이로 주라는 크레온의 명령에 따라 훼손된 오빠의 시신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이를 어기고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려던 안티고네는 크레온과 대립하게 된다.


    안티고네의 죽음이란


     오이디푸스는 신의 뜻을 진정 (그의 의지에 따라) 어긴 것인가, 테베에 내려진 저주는 눈을 멀게 하고 테베를 떠돈 오이디푸스가 선택한 영원한 죄의 형벌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됐던 것일까.


    마치 눈이 먼 것 같은 장님의 모습으로 저 죽음의 자리로 시선을 치켜뜨고 있는 것만 같은 군중들의 모습은 이 오이디푸스의 또 다른 연장인가, 내지는 이 극의 ‘진짜’ 죽음에 대한 하나의 징후인가. 이들은 어쨌거나 안티고네의 입장에 동조한다.


     곧 시신은 신의 뜻에 맡겨야 하는 곧 시신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신의 뜻을 거역한 크레온의 어리석음에 그들은 전율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비극을 지정하고 지켜보는 자들에 가깝다.


     무대가 경사진 것은 이 군중의 모습이 각각의 층위를 갖는 개체로 드러내는 장치라는 것을 증거로 하는 것만 같다. 동시에 죽음과 비극의 징후를 추락이라는 이름으로 축자적으로 구현해 낸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실제 하나의 군중이 떨어져 죽는 그래서 제일 낮은 곳에서 시신으로 도착하는 하나의 사건과 같은 장면으로 극대화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이 죽음(의 존재)들에서 뭔가 더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그녀가 어둠에서 자결한 시신으로 드러날 때 무대는 반으로 갈라진 구조물로 신의 분노를 지나간 어떤 것으로 또 다가올 어떤 것으로 드러내는 한편 마치 시신에서 나온 피처럼 그 자국을 시신과 함께 드러낸다. 그리고 이 분노가 현재의 어떤 것이 아님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신의 뜻을 듣고자 하는 것과 같이 현재의 순간은 당도하는 대신 유예되거나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지나가 있는 셈이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곧 크레온에게 가해질 저주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되며 오로지 그 점에서 중요하다. 신의 뜻은 오이디푸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예고되어 있고 또 실현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미 비극은 진정 비극일 뿐인 것이다.


    신의 뜻을 초과하는 것


     안티고네는 자신이 오빠를 올바르게 묻어줘야 한다는 의지를 왕의 뜻과 또 그것을 거역했을 때 오는 죽음이라는 것 모두를 초월해 앞세운다. 그럼으로써 이는 신의 뜻과 등가되는, 곧 또 다른 신의 뜻이 되는 셈인데 그녀는 신이 그것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대신 오로지 흔들리지 않게끔 도와달라는 기도를 할 뿐이다. 


    그녀의 의지는 신의 뜻 이전에 있는 것이다. 반면 왕은 신의 뜻 자체를 외부성의 영역에 두되 그것을 망각하고 부재하는 자리로 내버려 둔다. 합리는 오로지 왕의 뜻의 실행이라는 것에서 오고 이 합리적인 것을 실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그래서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이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선택은 곧 그를 죽음보다 더한 상황에 직면하게끔 한다.


    이는 신을 단순히 믿고 또한 믿지 않고의 문제와는 다르다. 이미 신의 뜻은 그 외 모든 사람들의 말을 타고 들려왔던 것이다. 곧 그는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눈을 멀게 해 현실과 스스로 멀어지게 하며 정박하지 않는 삶으로써 스스로를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면 그는 눈을 멀쩡히 뜨고 자신 외에 모든 것들이 죽어 나간 자리에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자신에게 복수할 아들도 크레온을 찌르는 대신 스스로를 찔러 사라졌고 아내 유리디케는 피를 토하며 산화되어 갔다. 좀비들 역시 녹아 땅 속의 지하 세계로 들어갔다. 이 끝없는 형벌의 운명은 모조리 이것들을 봐야 하는, 그리고 그 외상을 가지고 더 이상 볼 무엇들도 없는 상태에서 연명해야 하는 어떤 운명이다.


     그래서 오히려 안티고네라는 시체가 그리고 그에 앞서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던 존재자들이 내지는 다시 죽음을 상기시키는 그들이 아닌 이 죽음들 앞에서 전혀 새롭게 변형(metamorphosis)되는 크레온이 하나의 실재가 아닐까. 이 <안티고네>는 꽤 특이하게 변주된 셈이다.


     안티고네라는 상식선상을 벗어난 그것을 균열 내는 실재의 자리를 만드는 대신 크레온 아닌 모든 존재를 죽음으로 등가 시킨 채 죽음 이후에 죽음보다 못한 삶의 또 다른 자리를 만듦으로써.


    크레온이 낮과 밤도 없는 제 3의 자리로서 벌판에 안티고네를 보내려 했을 때 그것은 신의 뜻과 마찬가지로 그의 철저한 외부였다는 것, 그리고 어느새 그 벌판에 그는 죽음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채 손을 쓸 수 없는 채, 그리고 채 자신의 눈을 찌를 수도 없는 무력함을 가지게 된 채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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