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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 : ‘꿈과 현실의 시차’
    REVIEW/Theater 2013. 4. 29. 09:59


    ‘뽑히지 않은 칼’


    ▲ 4월 26일 <칼집 속에 아버지>(작가: 고연옥, 연출: 강량원) 프레스리허설 (이하 11cut 상동)


    제목인 '칼집 속에 아버지'는 어떤 은유도 아니다. 이는 ‘아버지의 위치’를 가리킨다는 축자적 해석이 가능함으로 이어진다. 칼을 뽑으면 아버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을 뽑는 행위는 그 칼끝이 외부로 향하는 과정에서, 결코 그것만이 주가 아닌 가운데, 이 ‘칼집 속에 아버지’가 드러난다는 예언의 효과를 함축한다. 


    <칼집 속에 아버지>(작가: 고연옥, 연출: 강량원)에서 갈매(김영민)는 칼을 뽑기를 주저한다. 이는 유약해 보이고 아무런 의지도 없는 존재로 그를 보이게 할 정도다. 그리고 그는 늘 실제로 꿈꾸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곧 칼을 뽑는 행위는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가 아닌, 스스로를 향하는 공포로 이어진다. 이는 스스로로 하여금 그 행위를 망설이게 하는 그 무엇으로, 칼의 뽑힘은 스스로에게 금기로 작용한다. 


    반면 칼집과 칼의 결합은 그 두려움으로부터 유예하는 ‘힘없는 유약한 결단’이며 동시에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곧 칼을 뽑는 것을 유예함은 무사로서 존재가치를 망각하는 것이다.


    사실 칼집과 칼의 결합이 아버지를 잠재된 무엇으로 동시에 ‘무’자체로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환상의 잉여이며 실재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하지만 이 칼을 뽑지 않는다면, 더 정확히 완전히 칼집에서 칼을 꺼내 아버지를 드러내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그 두려움이 상정하는 실재를 마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칼을 뽑아야만 아버지가 탄생한다. 그로부터 아버지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시간적 관계로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곧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실재를 인정할 때, 동시에 진정한 무사가 될 때 자신(을 낳은 아버지)을 입증하는 셈이다.


    ‘무를 좇고, 환영을 베다’



    <칼집 속에 아버지>에는 두 아버지 타입이 나온다. 하나는 그 자취가 묘연하다. 갈매는 그래서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를 증명할 수 없는 그를 신기루처럼 좇는다. 곧 그는 칼집 속에 머물러 있는 갈매의 아버지 ‘찬솔아비’이며 또 다른 아버지는 ‘검은등’으로, 어둠을 지배하며 모든 여성들의 순결을 영원(죽음)으로 바꾸는 자이다. 두 존재 모두 배우 김정호가 맡았다.


    후자는 차라리 프로이트가 말한 모든 여자를 점하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 ‘최초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접근이 한층 용이하지만, 전자는 갈매가 그런 것 만큼이나 파악하기 힘든 꽤 독특한 인물 유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그 전자의 아버지는 외부로 자신을 향하는 것과 동시에 ‘실재’로 성립한다. 주인공의 수행적 결단을 통해 두려움과 그 극복의 과정의 매듭을 끊을 수 있는 칼집, 더 정확히는 칼과 칼집의 빈틈에 거주한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오히려 아들이 주체로 거듭나지 않는 한 상상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허상과 같다는 점은 아버지가 ‘꿈속의 꿈’으로, 꿈을 꾸면 유령으로, 또 목소리라는 것으로 등장하고 사라지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


    허상에서 실재로, 우유부단함에서 결단으로 나아가는 갈매의 결기가 영웅을 탄생시킴으로써 세상을 구원한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은 다시 꿈속의 또 다른 꿈이다. 사실  ‘원초적 아버지’격인 검은등 역시 꽤나 이해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이다. 


    검은등은 현혹함이라는 빛의 속성과 알 수 없는 어둠이라는 양면을 지니되, 그의 아내가 되는 소녀들과 관계 맺지 않고, 곧 소녀의 처녀성을 침범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그것을 영원화하는데(이것이 그의 “사랑한다”의 수행적 구문이다), 그 영혼들은 숲 속에서 그가 접근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남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죄에 대한 일련의 효과들은 그가 접근하지 않는 것의 결과로 이어지며 그의 윤리적 영역에 침범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괴로움이 있을 뿐이지만, 그의 행위는 계속된다.


    어쨌거나 갈매는 칼을 빼서 아버지를 출현시킬지를, 또는 아버지의 빈자리로부터 고통 받는 것에서 벗어날지를 결정해야 하며, 또 뽑은 칼로 이 악마 같은 존재인 ‘검은등’을 베어서 영웅이 될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꿈속의 꿈’



    아버지가 묘연한 것처럼, ‘칼집 속에 아버지’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선문답인 것처럼, 수미쌍관으로 시작과 끝이 실재의 과거이자 영원히 반복되는 어떤 떠도는 이야기인 것처럼, 사실 <칼집 속에 아버지>는 어떤 것도 주도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애초 주체, 주인공, 결말의 정해진 수순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는 배를 젓는(세월을 낚는 뱃사공을 떠오르게 하는), 정확히는 칼자루를 노처럼 저어 폭력을 비폭력으로 무화시키던, 그럼으로써 땅과 강을 연결하는 매개자적‧중간자적 입장에 한편으로 서 있는 것 같던 시작 지점에서 무사 흑룡강(윤상화)이 오히려 (주인공이 아니지만 주인공 이상으로) 이야기를 힘 있게 현실로 정초하는(배를 물에 띄우듯) 데 반해 그 주변의 이야기인 듯 무심하게 그의 말에 대꾸하며 등을 돌린 채 튀어나오는 갈매의 시작 그리고 끝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게세르 신화를 풀어 낸 무사의 이야기는 ‘잘려진 몸뚱아리’라는 파편화된, 분절된, 동시에 하늘과 멀어진(버림받은) 존재의 우화 같은 이야기로 뜬금없이 시작되고, 이 흩어져 짜 맞춰질 수 없는 신체는 꿈에서 꿈으로 드나들며 영원히 아버지를 붙잡아 둘 수 없는 곧 스스로를 정위할 수 없는 ‘무상한 자아’로서 갈매의 삶으로 이어진다.


    무사 갈매가 꿈에서 다시 세속으로 떨어지듯 왔을 때, 내지는 꿈의 이야기에서 풍문과 같은 떠돎의 이야기로 왔을 때, 사람들에게 무사라는 그의 존재는 화두 그 자체가 된다. 사실 사람들의 인식은 검은둥의 현혹됨과 공포의 지배에 사로잡혀 있음의 세계에서도, ‘최악은 아니’라는 입장인데, 이는 ‘더 나쁜 일이 벌어져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것으로, 현재 우리의 낙관적인 종말론적 인식에 맞닿아 있는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갈매는 기억의 부분들을 상기해서 스스로를 구성하는데, 꿈의 조각이 어딘가에 있다면 자신의 기억도 그곳에 있는 셈이다. 이는 완전함으로의 유예되고 있음이 아닌 오히려 영원히 꿈속의 아버지를 좇는 것과 같이 그러한 완전함 자체가 허구이며, 단지 일시적으로 나는 구성될 뿐이며, 이 꿈속의 꿈에서 계속해서 허덕여야 함을 의미하는 데 더 가깝다. 가령 꿈에서 또 다른 꿈으로 넘어가려면 내 자신은 ‘조각으로 나뉘어야 한다’는 식으로 언급되는 부분도 있다.


    아버지-되기와 아버지-벗기의 시차



    그에게 ‘지상의 마지막 무사’라는 의무를 부여하는 초희(박윤정)는 그가 영웅임을 이야기하지만, 그가 영웅의 의무를 방기함을 <칼집 속에 아버지>는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초자아적 명령, 승낙해야만 하는 결연한 주체로의 탄생의 지점을 비웃듯 그는(<칼집 속에 아버지>는) 마치 잠결에서 그 말을 수용할지를 고민한다. 이는 우유부단함이 아닌 그저 (잠에) 취해 있을 뿐이라는 데서 그리고 이 역시 하나의 꿈일 수 있다는 점에서 <칼집 속에 아버지>가 가진 전복성과 특이한 아이러니가 있다.


    애초에 <칼집 속에 아버지>를 칼과 같이 꺼내는 것이 사느냐 죽느냐의 결단으로부터의 유약한 유예라고만 볼 수 없는, ‘햄릿’과 닮은 듯 닮지 않은 특이함이 갈매에게 있는 것이다.


    일종의 현혹됨 그 자체인, 늙지 않음이라는 마술을 입은 검은둥은 처녀들의 순진함에 깊숙이 침투하는데, 이 자가 사라질 때 완전히 무로 된다는 것은 현혹됨이 가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면서 여전히 모든 것이 그저 꿈이라는 것을 한층 더 강조한다. 이는 사실 ‘칼집 속에 아버지‘가 곧 ‘칼집 속에 아버지’일 뿐이라는 동어반복의 설명만이 가능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칼집과도 또 칼과도 어떤 유비 관계를 맺지 않는다. 다만 이 결합된 지점이 풀려 나가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칼을 뽑는다는 결단 전에는 상상적으로만, 칼을 뽑을 때만 존재한다고 한다. 그 때 갈매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 곧 영웅의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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