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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현대무용단 <개와 그림자>: '하나의 사건', 뒤따르는 '잉여적인 것들'
    REVIEW/Dance 2013. 8. 16. 02:00

    모나드, 사건, 푼크툼



    ▲ 국립현대무용단 <개와 그림자> 공연 사진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칸막이 쳐진 큐브들, 이 모나드들이 이룬 하나의 거대한 프레임이 정면으로 들어온다. 그 속에는 솜이 담긴 것과 담기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상이한 양과 그 형태의 차이를 보인다. 


    전체의 프레임은 단 2-3초 만에 분해되며 인간의 네거티브 형태를 남긴다. 그리고 이 해체된 인간의 형상을 무대 전체 공간 구획을 만드는 것으로 이전된다. 곧 한 거대한 인간은 다시 수많은 개체의 유폐된 자아의 내면으로 치환된다.


     이 칸막이 속 솜이나 간간이 띠는 붉은 실의, 일정하지 않은 양이 규정하는 큐브는 개별적인 것인 동시에 소통되지 않고 자족적이며 따라서 해석되지 않는 무엇을 의미한다. 미니멀리즘적인 이 단순함과 상이함의 매체는 곧 이 안에서 ‘주인공’ 없이 부유하며, 바깥으로의 의미 생산, 횡단이 일어나지 않는 개별자들을 상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움직임에 따르는 반복은 허무함의 심상에 닿는다.


    누워서 조금씩 이동하는 이들은 부유하는 상태의 특정 ‘흐름’을 갖는데, 이는 무의식적이면서 무의지적이다. 곧 수동적인 이 인간은 자신의 의지란 찾을 수 없다. 



    빛을 반사하는 빳빳한 패널의 신체화·표피화된 가죽을 걸친 ‘(비-)인간’은 적어도 내면과 심장(가슴), 피부(온도)를 모두 소거한 그런 신체 상태를 갖고 있다. 


    유아기적인 말, 언어화되기 이전의 말들은 상상계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초자아란 없다. ‘뒤에서 지켜보는 거대한 자’의 시선은 텅 비어 있다. 대신 이 거대한 자아는 분해되어 파편적인 무엇(아마도 기억이라는 심상 내지는 오브제라는 물질 그 자체)로 흩어져 있다. 


     “쉿”이라는 구문은 그런 관계의 양상이 벌어지며 집단을 형성하는 유일한 기제가 된다. ‘걸어서 하늘까지’를 부르며 등장하는 거대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추억에 가까운 오랜 유행가라는 상징적인 측면과 ‘거대함’이라는 앞선 ‘텅 빈 자아’와 인접하며 모호한 의미를 형성한다.


     은근하게 들려오는 색소폰 소리와 절합되는 영어 내레이션의 사운드는 단속적으로 반복된다. 곧 이는 어떤 끝없는 그리고 다시 회귀하는 어떤 울림이자 메아리다. 이는 시작과 끝을 상정하지 않는다.


     곧 (거대한 자아의) 이 내면에는 암흑만이 있는 것처럼, 오락가락하는 음들이 더해져 한 음계씩 올라가는 색소폰은 세 차례씩 반복되며 단계적으로 올라간 듯한 순간에 미묘한 간극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이 ‘균열’은 거의 푼크툼이라 할 만한 순간을 낳는데, 이는 막연하게 그 흐름을 따라 올라갈 것이라 생각했던 것에서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이며 동시에 일거에 그 구조를 허물며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는 비인간 내지는 바닥을 접하며 떠다니는 비관계적 자아들에 대한 정서를 도출한다. 이는 그 존재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기능하며 우리의 정서를 향하는데, 곧 제 3의 시선, 동시에 미끄러지는 시선을 상정한다. 곧 의미를 낳으며 의미를 유예하는 것이다.


     사진 그 표피적인 이미지들, 그리고 과잉의 소통



    이들은 사진적인 포즈 곧 욕망의 시선이 가닿는 대상으로 변모가 일어난다. 이 시간의 분절·단절은 전체적인 무대가 칸막이처럼 어떤 정형적인 것에 관계성 없는 접합처럼 몽타주의 파편적 배치로 그려짐을 의미한다.


     네 행으로 이뤄진 행렬의 구도는 밀물처럼 선후의 층차적 반복으로 파동을 만든다. 남자가 여자를 리프트할 때 사진에 찍힘 동시에 내는 “야 후”는 교미의 신음소리를 상상케 한다. “쉿”하며 같은 동작들의 전이를 이룰 때, 그러면서 상대방을 보며 거기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행위는 이제 욕망이 전면에 나온, 오로지 그 욕망의 대상이 기꺼이 됨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순간으로 바뀐다.


     모나드들의 경계가 소통의 형식을 띤, 곧 과잉의 표현과 그것의 소외라는 일반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소통의 구조와 그 형식적 관계의 양상을 그리는 것으로 넘어간다. 


    검은 옷의 마치 리듬 체조를 하듯 강한 육체성이 단단하고 역동적으로 신체를 분절화하여 탄력 있게 조절하며 나간다. 


    그 전에 칸막이들은 무대에서 다 치워진다. 그리고 어두워진다. 검은 패널들은 이 더 이상 경계가 사라진, 그리고 감옥으로 대체된 마지막 그 실제의 출구 없는 입구를 향해 나아간다. 그 움직임들은 용수철 튕기는 듯한 사운드의 단속적 반복에 따라 기괴해지고, 그 와중에 그림자가 따른다. 


    신체가 에너지를 멈춤으로 이전한 비-주체적이고 신체적이며 흐름보다는 뚜렷한 분절 구문의 형태를 조직하고 중심의 이전과 또 다른 중심 잡기인 멈춤의 이 단계로 간단한 프로세싱 절차를 밟아 나간다.



     이는 메마른 감성과 숨 막히는 스텝, 변전의 여러 양상을 모두 가져가는 측면이 있다. 칸막이를 일렬로 하고, 관객과 한층 가까워진 뒤 이들은 과시적 몸짓을 간간이 섞고, 현실의 일상적 제스처 등을 넣은 구문을 반복한다. 더 가까이 이들은 지휘자와 수다를 떠는 현실-주체로 거듭나는데 이는 일상이란 잉여, 전체적인 숨 고르기의 안무에서 따른 잉여이기도 하다.


     패널들을 둘러 친 칸막이들의 성에서 한 명씩 갑작스레 솟구치며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데 이는 도약이 아닌 사라짐에 가까우며 사진 찍기의 메커니즘과 유사한 한 축을 낳는다. 


    하지만 이와 다른 아예 이 성에서 튀어나옴은 또 다른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다만 어떤 사라짐과는 다른 무엇이다. 이는 (기억을 담고 있던) 공간 자체를 바라보는 부재로, 동시에 바깥의 실재다. 안과 밖이 전도된 지점이 형성되는 것이다.


     패널로 일렬의 벽-신체-벽-신체 등으로 이뤄진 계열체를 만든 뒤 이 패널이 상정하는 직사각형의 직선, 패널의 메마른 표면의 감성이 춤에 이전된다. 이후 민속 음악과 함께 밝은 포즈들과 그 음악 자체에 동화된 듯한 어쨌거나 그 음악을 다시 그 웃음을 재표현하는 매체가 되고, 이런 활기찬 도약과 이동은 축제적 질서를 만들며 음악적으로는 잉여에 가깝다.



     피아노를 스타카토식으로 마구 두드리는 가운데 온갖 오브제들을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사운드의 증식이 과잉으로 쌓여 가며 혼란을 준다. 이후 신체의 조합, 기괴한 형태, 파트너를 직각으로 절합되는 뛰어넘기와 같이 남녀는 섞이는 대신 어떤 하나의 변형된 신체 움직임을 생성한다.


     하나의 커다란 사건 이후 필연적으로, 그 뒤의 움직임들은 공허함의 기호 계열체를 이룬다. 또는 그것을 은폐하는 표피적인 웃음에의 전유로 드러난다. 기억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는 수많은 존재들의 사건들로 분화되며 다시 특정 지을 수 없는 현대인의 분포로 변해 간다. 


    곧 기억이 존재로 치환되는 비약의 정의는 지나감 곧 타자화되는 지난 존재의 사건들로 이뤄진, 더 정확히는 지나간 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원리와 같고, 이는 이 비관계의 관계들이 곧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존재자를 구성함으로, 곧 앞선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또 그 사건으로 의미가 재소환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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