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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F2013] <스푸마토>: 현존을 만드는 방식의 안무
    REVIEW/Dance 2013. 10. 16. 13:15


     <스푸마토>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배로부터 피어나며 위쪽으로 느리게 도달하며 무대를 장악하며 겹에서 또 다른 겹으로 펼쳐지는 안개, 이것을 자연 그 자체에 대한 환유이자, 비자의적인 안무 그 자체로 보지 않는다면 이 작품의 특질과 메시지 이전의 표현의 강력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 안에서 안개에 뒤섞여 끊임없이 돎의 현존을 추구하며 이동하는 축을 가진 자동 회전 기계의 비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여자 무용수의 몸짓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그 은근하고 거대한 현존에 조응하는/맞서는 또 다른 생명의 현전이라는 서사 차원에서의 전개와 몸짓이든 수용의 측면에서건 인간으로서 어떤 가용 범위를 넘어서는 듯한 바로 그 부분에서의 현존이 맞물리고 있다.


     후자는 그야말로 처음에는 느리게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치 빠르게 그 모든 속도를 포함해 지속적으로 도는 것 자체에 대한 놀라움에서 기인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은 사실 그의 최대치이자 누군가에게 있어 불가능의 춤이라는 점에서 젊음(의 현존)을 절취하는 것에 가깝다.  


    곧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안개의 일부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어느새 그 안개를 초과하는 움직임으로 분해 가며 거대한 현존을 몸의 현존으로 치환해 낸다.


     피아노는 안개의 구름 형상으로의 변모라는 확장/부풀어 오름과 같이 진정한 확장을 표하는 동기화 작용을 한다. 피아노는 두루뭉술한 시각적이고 동시에 촉각적인 구름(이라는 매체)의 거대함과 공명하는 불규칙하게 보이는, 건반 하나하나의 두드림/현존에 기대며 스텝과 멈춤, 몸짓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화 장치의 매체로 기능한다.


     안개가 극장을 감싸고 다시 말해 그것을 사유하게 하는 내지는 극장 전체를 안개에 대한 감각으로 바꾸는 작용을 하는 것과 같이 피아노가 거대 공간에 공명함을 따라 안무 역시 그 분절화‧공명되는 사운드에 따른 ‘형태로서의 구조’를 만드는 것에 맞춰 있다. 이러한 미세 분절은 실은 공감각적 작용, 그 자체의 자연스런 안무로서의 안개‧물과 같은 매체에 절합되며 한편으로 현존의 균열을 일으킨다. 이는 자연스러움 속의 자연스럽지 않음, 짜인 안무로 그것들이 여겨질 때의 그것이다.


     가령 이 거대함의 매체, 안개와 비를 안무로 포섭함(의 의도)을 보여주는 바는 구름과 빗속의 몸의 현존이 지나간 후 머물러 있음이다. 가령 비 이후에 눈에 띄는 바닥의 빛에 반사된 비, 빗속에 왜곡되며 그것과 공명하는 피아노 이후의 소리.


    애초에 프랑스어에 대한 자막을 없애고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지를 받았지만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는 자연스레 그리고 당연히 공연의 전개, 그리고 그 이후여야 한다. 다만 영상에 따르는 우리말 내레이션은 뭔가 의심쩍었다. 프랑스어 내레이션은 저만치 투박하고 울림과 리듬 없이 외는 것이었을까 저런 목소리를 원래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며 만족하고 연출은 수용했던 것이었을까.


    자신의 환경을 떠나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은 철거 직전에 몰린 사람들의 현재적이고 정치적이며 구체적인 상황과 마주하는 감각을 준다. 이는 앞선 거대함에 대한 그 자체의 표현과 숭고미에 대한 이해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우리말 내레이션과 인디언과 흡사한, 그래서 프랑스 사람보다는 우리네 시골 어르신의 얼굴과 더 닮은 이 표현형은 한국의 상황으로 뜻하지 않게 바꾸는 측면이 크다.


     한편 “덥다”와 “춥다”의 반복은 전자의 온난화라는 인류적인 비극적 상황과 후자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외면된 타자의 소외의 정서적 측면으로 연결된다.


    호수 표면의 은근한 파장이 무대 가 전면 스크린에서 빚어지며 거대한 비와 따로 몸의 현존을 성립하는 멈춤에서부터 그것에 젖어 감을 움직임 자체로부터 알리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안무는 공간에 공명하는 피아노의 소리에 절합되며 구조를 이룬다.


     그 안에서 홀로 피아노와 독대한 여자는 아름답게 노래하다. 중간 중간 반주의 부분에서 입을 벌리며 신음으로 그것을 바꾼다. 미적 규약을 깨뜨리는 비인간의 신체-목소리는 언어의 바깥으로의 변전에 가깝다. 


    물속에서 뒹굴며 물로부터, 물과 함께 지속되는 무용수들의 현존은 대규모의 비 이후의 물이라는 매체 환경으로부터 물론 가능한 것이다. 또한 유연한 흐름을 안은 안무의 전개 대신에 무게를 안은 (허리를 꺾는 것과 같은) 멈춤과 반쯤 하다. 멈추는 토마스의 기술 같은 몸짓과 물구나무서기와 같은 몸짓의 철저한 반복으로부터 이 현존이 출현한다.


     이 물 속 안무가 비껴나며 물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무대 전면의 긴 제단에 선 남자의 탭댄스와 Singing in the rain의 중간 중간 노래가 시작된다. 이곳은 저 너머 바다/강의 대척 지점으로서 육지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무대 좌우를 오가는 홀로 남겨진 남자는 거대한 매체 환경 속에 도무지 홀로 설 수 없는 미약한 존재들과 달리 유일하게 그리고 처음으로 어떤 주체의 시험에 들며, 그 치열한 환경에서 관객을 마주한 쇼의 무대와 무대의 어떤 간격을 만든다. 곧 단독자로서 수많은 시선들로부터 그는 이 무대에서 춤과 노래를 지속해야(만) 한다.


     마지막 무대는 앞선 움직임들이 하나의 장에 겹쳐 놓는다. 처음의 끝없는 돎 역시 구현되는데 가령 여자에게서 숨소리와 어깨를 가쁜 숨으로 들썩임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절취된 현존은 이미지 배치의 거대한 측면 아래 사물화‧비인간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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