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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F2013]<로튼애플(Rotten Apple)>(차진엽 안무): '시공간의 안무술'
    REVIEW/Dance 2013. 10. 25. 13:49


     <로튼애플(Rotten Apple)>(차진엽 안무)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극장 공간을 일종의 전시 공간이자 체험 공간으로 바꾼 것은 극장에서의 고정된(?) 관람을 당연히 탈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아니 이는 탈피보다는 탈출구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극장에서 최대의 것을 향한 최선의 몸짓이 정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 이를테면 최대의 것이 일회성을 띤 공연의 특성을, 최선의 몸짓이 단 한 번의 무대에 몸을 불사르는 노력이라면 정답은 그것이 관객에게 온전히 수용되어 감동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하나의 유토피아적 진단임이 확실해졌을 때 <로튼애플>은 ‘공감각적 체험형 퍼포먼스 중심의 춤’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모색과 대안의 측면에서의 또 다른 절박한 시도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일종의 전시 공간에서의 움직임이 빚어지는 것은 무용수들이 각자의 방에서 짜인 몇 개의 동작들을 반복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반복 패턴은 이 방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의 한정된 움직임으로 반복 패턴이 끝나면 다른 방으로 이동 가능함을 통해 전체를 조감하는 데 이동과 머무름의 시간이 투여되어야 한다. 곧 움직임뿐만 아니라 움직임의 시간 단위를 통제하여 방 자체를 오브제화한다. 


    일종의 여러 개의 루프가 무용수들이 전체 공간을 아우르는 한 번의 지시, 가령 불이 꺼지거나 음악이 낮아지거나 하는 방을 벗어나는 것을 통해 이 전체가 하나의 통제(안무적 배치)에 의해 이뤄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전시가 끝이 나는 지점 역시 이 전체가 하나의 시간 안에 작동하는 변화의 물결이 포착되는 데 있는데, 전시 영역의 경계를 설정하던 접힌 커다랗고 두꺼운 종이들을 순식간에 접어 부채꼴로 마는 순간이 바로 그렇다. 관객은 전체적으로 외부를 경험하기보다 외부가 없음에서 당황하게 된다. 이는 전시로서 방을 볼 때 역시 마찬가지인데, 전시와 전시가 이어지는 통로가 매우 좁으며 바깥이 거의 없으며 끊임없이 달라지는 방 앞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순환 구조의 길은 다시 순환의 몸들로 인해 관객은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관객을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 하나의 공통 집단으로 묶이며 서로 간의 차이를 상쇄하게 된다. 방이 외부와 대별되는 의미에서 내부라면 이는 낯선 광경들이라는 지점에서 여전히 우리의 외부인데 이 바깥을 상정하기 어려우므로 공연에 대한 거리 두기는 낯선 광경에서 벗어날 수 없음의 낯섦을 친숙함으로 체현하는 가운데 실패한다. 낯섦은 낯섦 그 자체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각각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가 창출될 수 있는 가능성은 방 자체가 캐릭터에 대한 고유성을 반영하는 역능의 공간인 탓에 교대로 반복되며 단지 한 사람의 다른 일상의 순간 내지는 캐릭터의 일면들을 구성하는 정도가 되는 가운데 사라지는데, 결국에는 각 무용수의 고유의 춤의 무늬로 소급될 수밖에 없게 되지만, 이는 옷의 차이보다는 흰색으로 묶여 그 차이를 감별하기 어렵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각 무용수들이 하나의 개성을 체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또한 인격적 주체 역시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의 대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마치 하나의 다른 양상들인 것처럼 보이는데,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사과를 먹은 탓에 끝없는 남녀의 쳇바퀴 같은 불운한 숙명이 당도했고, 그럼에도 그 사과를 계속 탐할 수밖에 없는 비이성의 존재자들은 그 욕망을 가늠하거나 그로부터 고민하는 대신, 그 욕망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 양심이란 하나의 처방을 공연 자체에서 내놓게 되는데, 양심에 관한 각종 철학자‧소설가들의 명제들을 뽑아낸다. 전체적으로 낯섦의 감각들이 체현되고 또 그것을 마주하는 가운데 일종의 중세적 코스프레(어쩌면 공연 전체를 개인화가 불가능한 중세의 의식적 제스처들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가까움에 따른 생생한 감각과 춤의 발현이라는 현장은 서사의 결여, 불가능한 주제에 대한 불완전한 드러냄을 통해 빛이 다한다(사실 이러한 문제는 신과 인간의 관계와 함께 초자아란 3자적 매개로 한 철학적 언설들을 사유함을 통해 분명해질 듯한 문제들인데 단지 하나의 욕망과 양심의 분별을 통해 단순화하기에는 공명이 불가능하다).


    전시 막들을 치우고 한데 모여 배우들은 테이블을 활용해 그것과의 마찰을 가지고 춤을 추며 나중에는 그 테이블을 두드려 사운드-퍼포머로 기능한다. 이 마찰음과 더불어 공간을 감싸는 사운드들은 금속음에 가까운데, 이 사운드가 생성되고 또 몸과 만나는 직접적인 현장의 감각들은 가령 전시 이후의 독자적인 무대를 시공간을 안무하는 감각으로서 바라봐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주제에 대한 단순한 판단과 제시보다는 오히려 사물들과 그것을 사운드-신체로 빚어내는 식의 안무를 더욱 구체화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또한 방들의 각 시간들이 하나로 모이며 이질적으로 뒤섞이는 하나의 시공간의 불안정함과 혼란이 구체화되어 각 방들에 대한 설명 역시 있었어야 할 것이다. 곧 전시가 하나의 새로운 시도이자 사전의 이벤트 내지 도약을 위한 발판 정도쯤에 그치게 하는 것보다는 무대와 연계되는 시공간의 파편으로서 그 의미가 다시 사유할 수 있게 되는.


    어쩌면 전시와 무대의 두 다른 장르적 영역의 통합 불가능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것의 한계 역시 진단하는 결과를 보여 주게 된 것 아닐까. 그렇지만 전시 공간들을 돌아다니며 겪었던 공간 자체에 대한 체험은 (보이는) 몸이 없는 공간, 단지 우리 자신의 몸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반면 방이 다 사라진 이후 남는 텅 빈 공간에서의 춤은 무매개되는 공간, 실은 사운드가 증폭되는 가운데 사운드 자체를 발생시키며 생겨나는 몸에 의한 사운드의 절합으로 시공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신비로 감싸여 있던 시공간의 주술을 풀어헤쳐 버린 무대의 장에서의 통합은 앞선 시공간의 통합이기보다는 해체였고 그로 인해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시간에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이 전시와 무대의 하나의 흐름 안에서의 유기적인 결합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일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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