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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인철 연출, 〈순교〉: 폐허의 역사로부터 나아가기
    REVIEW/Theater 2021. 10. 19. 16:49

    SF 서사를 유기적 공간의 아이디어로 실현하다 

    전인철 연출, 연극 〈순교〉 [사진=극단 돌파구 제공](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박희정, 오해영, 김영노, 정다함 배우.

    극장은 중앙과 중앙을 둘러싼 두 원형의 무대와 객석으로 양분된다. 관객이 바깥쪽 원형의 객석을 차지하면, 중앙의 무대는 배우들의 안정된 자리가 아닌 비어 있는 구간으로 주로 놓인다. 호시 신이치의 SF 원작 서사를 바탕으로 한 〈순교〉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한 음습한 느낌의 발명가에 의해 저세상의 영혼과 교류할 수 있는 통신 장치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순식간에 온 세상의 사람들이 저승을 향해 목숨을 던지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간결한 공간 디자인의 영역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처음 발명가가 저승의 아내에게 말을 건네는 때에는 무대 중앙 아래로 떨어지는 조명과 의자 사이의 간격이라는, 아주 좁은 물리적 영역으로 한정되며, 의구심과 미지의 영역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는 다시 그 보이지 않는 기계 장치에 대한 신비로 연장된다.―을 가리키고 있었다면, 수많은 죽음에 대한 서술, 곧 내레이션 또는 지문에 따른, 폭발적인 죽음의 증가 이후에는 자연히 관객 스스로를 이승이냐 저승이냐 하는 판단에 처하게 하는데, 배우들은 관객의 앞뒤로 이동하며 저승과 이승의 유동적 구간을, 온 세상이 이미 저승의 분위기에 도취한 이승에서 무대를 비우거나 객석을 벗어나며, 곧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며, 죽음의 무게를 물리적인 공간의 확장이나 흐트러짐으로 감각하게 한다.

    사진 왼쪽부터 박희정, 김영노, 오해영 배우.

    객석의 중간중간 빈 구간에 배우들이 앉아 이승과 저승을 저울질하며 이성적인 판단의 여지를 두었던 때를 잠깐 지나면, 배우들은 중앙의 무대에서 머리를 꺾으며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모습을 연출하는데, 이는 수면 상태로 급격하게 돌입하는 인상을 주지만, 그러한 수면 이전에 의식과 몸 자체를 극렬하게 포기하는 의지, 곧 그러한 의지 자체를 현상할 수조차 없는 시체 되기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언캐니하다. 돈을 벌기 위한 의사의 안락사가 중간에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죽음의 삼십여 초 정도로 인식되는 물리적으로는 빠른 처리, 그렇지만 흐느적거리며 그 빠름을 탄성을 실어 시간을 지연시키는 감각을 선사하는 황수현 안무가의 안무에 의해, 죽음은 몸을 밟고 정상에 선다. 
    보이지 않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계와 같이 저승은 중력을 벗어난 세계를 상정한다. ‘우리는 행복과 쾌락이 무한정하게 주어진 저승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러한 변환의 움직임으로, 저승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 등가되는 한 방의 주사로 영면을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주어짐으로써 어느덧 기계 장치의 경계에서 얇게 저미는 빛은, 곧 저승에서 새어 나오는 숨은 눈앞에서 현상되기에 이른다. 

    어쩌면 이러한 순간, 곧 그 경계에 순식간에 도달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죽음, 그리고 삶에 대한 찰나적 진실을 보여주는데, 저승에서 삶이 영속한다면, 이승뿐만이 아니라 저승에서도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믿음은 자신이 아는 사람의 몸을 목소리만으로, 곧 그 목소리를 통해 언어와 기억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몸을 가정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하나같이 온전하게 현상해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축음기 앞에서 흘러나오는 죽은 주인의 목소리를 주인이 재생하는 것으로 믿는 개의 모습을 형상화한 어떤 이미지가 주는, ‘축음기의 목소리는 그 사람의 현존’이라는 메시지는, 이 작품의 도입부에서도 전제된다(〈순교〉는 물론 SF 서사이지만, 연극에서 실제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쓰인 부분은 없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장치를 통해 나오는 저승에서의 배우들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로 녹음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개가 그렇게 믿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온전한 현존이 믿음을 가져오는 것인지, 믿음이 온전한 현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반에 이르면, 무대가 비워진 가운데, 어느새 이승의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과 같이, 곧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구분 짓기 어려워진 세계상과 같이, 관객의 뒤에서 누워 소곤거리는 배우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배우와 관객의 관계 역시 어떤 경계를 침범하는 걸 넘어 역전된 상태에 가까워진다. 무대 중앙에서 저승의 목소리를 전하던 기계 장치는 배우들의 중계에 따르면, 이미 수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한 지 오래며, 그 현재 위치조차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트랙터를 끌며 시체를 밀고 전진하는 일군의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의 대화가 무대 바깥, 그리고 관객석 바깥, 또는 관객석 사이의 틈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소리는 기계 장치의 소리와는 달리, 보이지 않지만, 현존에 가까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는 것이 연극의 의도이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있는 자의 목소리를 곁으로 두는 걸 믿겠다는 것, 곧 세계 바깥을 여전히 구분 지으며, 그 세계와 아주 가깝게 다가오는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 맹목적 쾌락의 파시즘에 동요하지 않겠다는 것, 이러한 냉소주의적으로도 보이는 의지의 선언을 따라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가 조용히 새어 나온다. 

    그중 한 구절은 이런 삶의 선택처럼 들린다. “I’ll take a quiet life.(저는 조용하게 살아가기를 택할게요.)”

    〈순교〉는 프로시니엄 아치 대신에 공간 전체를 비우고 의자만 둔 간결한 공간 구성 이후, 배우들의 동선을 통해 공간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가는 방식으로 전개되며, 두 개의 대립되는 세계, 그리고 세계의 변화와 마지막의 또 다른 세계의 출현을 각각 관객이 보고 듣고 감각할 수 있게 한다. ‘순교’라는 단어가 가리키듯 이들의 죽음은 종교적인 죽음에 가깝다. 그 바깥의 예외적인 인물들을 통해 극은 반전된다. 그 끝은 비록 짧지만, 우리가 살아가야 할 어떤 믿음 없음의 세계를 마주하는, 희미하면서도 흐릿한 이 연대는 세계를 낭만화하는 대신 다만 나아가야 한다는 어두운 희망의 메시지로 연결되는 듯하다. 

    오해영 배우.

    〈순교〉가 가리키는 저승에 동참한 수많은 이들과 이곳에 남은 소수의 사람은 오늘날 어떤 메타포로 갈음할 수 있을까. 〈순교〉에서의 죽은 자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역사가 증발한 시대, 그리고 터전 없음의 세계, 그리하여 새롭게 폐허의 역사에서부터 터전을 만들어야 하는 이 세계는 예컨대 눈앞의 발전만을 좇은 이전의 인류, 그리하여 기후 위기와 같은 재난의 상황을 떠안은 후대의 인류와의 관계로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극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대에 다시 극장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은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순교〉는 삶과 죽음을 뒤바꾸는 작은 제스처로써 우리의 삶을 모색할 연약한 의지를 요청하며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곧 상상적 세계로부터 급격하게 각 개인의 실천적인 삶으로 방향을 튼다는 점에서, 〈순교〉는 각 개인의 실존적 판단과 관련한 정치성에 대해 질문한다. ‘우리는 허물어진 역사와 세계 속에서 누구의 참조도 없이 어떻게 독단자로, 그리고 연약한 연대로써 살아갈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그것이다.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 정보]

     

    공연명: 순교
    제작: 극단 돌파구
    기간: 21-10-09 ~ 21-10-17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관람등급: 중등(만 13세 이상)
    관람시간: 50분

    <출연 및 스태프>
    원작: 호시 신이치
    번역: 이홍이
    연출: 전인철
    출연: 김영노, 박희정, 오해영, 정다함

    무대: 박상봉
    조명: 최보윤
    음악: 박민수
    분장: 장경숙
    의상: 김우성
    영상: 정병목
    영상기술: 장주희
    안무: 황수현
    홍보: 유현진
    조연출: 황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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