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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자혜, 〈로드킬 인 더 씨어터〉: 인간의 시점을 도륙하기
    REVIEW/Theater 2021. 10. 27. 00:54

     


    구자혜 작·연출,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공연 사진 [사진 제공=국립극단] (이하 상동)

    〈로드킬 인 더 씨어터〉의 시작은 이 작품의 극장과 작품의 구조를 지시하고 장면을 예고한다. 공연의 입구를 확장한 시간은 이 공연의 윤리적 차원이 공연의 형식 자체가 되는 과정의 일환이다. 문자 해설과 수어 통역, 음성 해설이 한 덩어리로 흘러갈 것을 예고하며, 표기법을 통일하고 몇몇 기술을 간략하게 줄이기 위한 절차이기도 하다. 이 공연은 이제 완전히 다른 감각을 가진 존재들과 기존의 일반적 차원으로 간주된 존재들의 동거로서 체험된다. 

    라이카 역의 성수연 배우.

    이제 펼쳐질 세계는 우리와 언어 체계가 다른 동물들의 언어 체계이다. 물론 재현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동물들의 말은 극단적으로 그 양을 늘리거나 더듬거리며 지연을 발생시키거나 되돌아오며 누군가의 말인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또는 어느 끝을 지정하지 않는 시간의 늪으로 인도하거나 그리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크게 발성―몇몇 배우는 이로 인해 목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함으로써 인간의 감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범위를 의도적으로 초과하려는 실험으로 생각된다. 곧 동물의 말을 의태한 언어는 인간에 대한 실험으로 귀결한다. 이러한 말들은 우주 비행에 동원돼 최초로 지구 궤도에 진입한 개 라이카(본래 이름은 ‘쿠드랴프카’로 그 품종명인 라이카로 흔히 불린다.)와 로드킬당한 고라니의 죽음, 나아가 창문에 부딪혀 죽는 새들의 죽음 직전의 시간을 어떻게든 인간의 언어가 아닌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 동물의 언어 체계(?)에서 우리를 극단적으로 고립시킨다. 

    떠돌이 개로 이름 없이 사라지는 대신 ‘인간의 세계’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되며 유의미한 존재가 되는 걸 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라이카의 시점으로 옮겨 오는 연극은, 라이카에 빙의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위선, 나아가 상징계를 지탱하는 사고 체계의 덧없음을 폭로하며, 인간의 발 디딜 조그만 영토마저 완전히 소거하는 일종의 사고 실험적 언어 유희로 지속된다. 어떤 동물도 인간을 위해 죽을 이유가 없음은 인간의 언어를 동원해 모든 찬란한 이유를 극단적으로 댄다 해도 명백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간의 언어를 변주해 주지시킨다. 라이카는 인간의 명목을 있는 그대로 체화하지만, 결국 그러한 믿음의 기반이 허공임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인간의 미학적 갈망이 전제되는 사진과 풍경에 동원(?)되는 고라니와 새의 죽음에 대한 장광설에서도 연장된다. 

    사진 왼쪽부터 최황순 수어통역사, 고라니 외 역 백우람 배우, 안마루 연주자, 새 외 역 이유진, 라이카 역 성수연, 비둘기 외 역 이리, 개 외 역 고애리, 북미맷새 외 역 박소연, 비둘기 외 역 문예주, 비둘기 외 역 박경구 배우, 김홍남 수어통역사.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고라니가 차에 부딪히는 순간 고라니의 눈과 마주친 인간 사이에서 극단적인 충격에 대한 체험이 누구에게 먼저 시작되었는가와 같은 난센스로서의 질문을 던진다. 물론 고라니는 죽음에 이르는 사고라면, 인간은 안전한 울타리에 머무른다. 그래서 문제는 그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의 순간이다. 인간에게는 누군가의 죽음이 하나의 이벤트 바깥으로 넘어서지 못한다. 만약 그렇다면 세계는 붕괴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한순간의 풍경을 누리기 위해 호텔을 고르고 그 순간을 맞이할 때 그리고 이를 잠시 침범하는 새의 부딪힘과 죽음 역시도 그 풍경에 대한 감상을 온전히 깨지 못함을 주지시킨다. 
    따라서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로드킬한 특정 인간을 비판하거나 사회적 보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죽음이 어떻게 걸러지고 그 죽음의 의미는 사유되지 못하는가에 대해 인간의 취약한 또는 맹목적인 사고 체계를 폭로하기 위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가. 처음부터 연극은 돌아올 수 있는 삶과 돌아올 수 없는 삶으로 인간과 동물의 삶을 대비시킨다. 애초 대기권 재돌입이 불가능한 상태로 설계된 스푸트니크 2호에 탑승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된 라이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창문에 부딪혀 죽음을 맞는 새, 그리고 자신의 길을 건너던 고라니 모두 그러한 무수한 생명체들의 지연된 죽음을 마주하게 하며 관객을 애도 불능의 주체로 몰아세우는 이 연극에서 그러한 생명체들은 돌아올 수 없는 사태의 가능성에 포획돼 있다―반대로 우리는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안전한 삶의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지도 회의하지도 않는 존재의 가능성에 포획돼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가. 아니 느낄 수 있는가. 

    사진 왼쪽부터 개 외 역의 이상홍, 고애리 배우.

    〈로드킬 인 더 씨어터〉의 말은 앞서 말했듯 의도적으로 분절되고 지연되고 넘친다. 주로 배우들의 발화를 비롯하여 문자 해설과 수어 통역 세 개의 번역 언어가 중첩되고 있으며, 음성 해설이 배우에 의해 간간이 따르지만 거의 없는 편에 가깝다. 배우들의 분절되는 언어는 무대 전면의 스크린에도 반영되고 있는데, 세 언어를 사실상 통합하는 장소가 바로 스크린이다. 배우들이 발화하는 단위를 거의 그대로 옮기며, 타자하듯 받침 하나가 붙는 것까지 시각화되거나 글자 하나가 요동치는 것으로 강조된 발성을 반영하기도 하는 이러한 문자 해설은, 도무지 일상적인(?) 말의 단위로 느껴지지 않는 발화를 겨우 다시 붙이고 머무르게 하는 장소로서 스크린이 기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또한 장애 예술가 백우람 배우의 발화가 실제 무대에 자리하는 가운데, 공연은 그 일상적인 자연스러움의 말의 단위 역시 이미 흔들리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편협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일종의 자막이 말을 보완하고 연장하고 있음은 분명하며, 말의 단위를 독특하게 지정하는 것은 동물의 언어 체계를 반영하려는 어떤 노력으로 비침은 앞서 언급한 바다. 

    말에 음절 단위로 따라붙는 자막은 실은 배우의 말이 그만큼 미세한 시간의 간격을 지키며 분절돼 발성되도록 연습했음을 거꾸로 의미한다고 보인다―자막이 녹화된 것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따라붙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글자에 들어가는 효과 같은 걸 순간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속도를 아날로그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배우들 역시 거의 말의 주체가 아니라 말에 사로잡힌 언어 기계가 되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어떻게 보면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단순히 그 상연 시간이 15분의 인터미션을 포함해 세 시간에 육박한다는 것을 차치하고, 그 호흡이 더디지만, 매우 긴박하게 숨 고를 시간 없이 진행되는 공연이다.). 자연스러운 말의 형태는 실은 그래서 희귀하면서 특정적으로 다가오는데, 최순진 배우가 발성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소리 낼 때나 후반에 이르러 세 명의 비둘기들이 말을 할 때 일부 드러나는 정도다. 

    사진 왼쪽부터 안마루 연주자, 최황순 수어통역사, 벨카와 스트렐카 외 역 최순진, 백우람, 이리 배우, 김홍남 수어통역사.

    비둘기 세 마리의 울음은 비둘기(새)의 언어를 인간의 의미로 번역한 결과, 울음이 동물의 언어 체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슬픈 감정의 소산이라는 의미 자체에 결박된 이후, 이를 비둘기들이 전유해서 표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끊임없이 비둘기들은 앞선 일들과 미래에 닥칠 일들을 사과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니까 울먹거리는 일관된 행위를 보여준다. 곧 이는 비둘기의 울음을 이해하거나 재현하는 대신, 비둘기의 울음을 인간 특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비하한 결과를 보여주며, 그들의 끝없는 언어 유희가 가하는 지연을 관객이 견뎌야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곧 이들이 어떤 말(울음)의 차이를 생산해도 그것은 다 똑같은 울음으로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은 “미안해.”로 수렴한다. 그리고 새들은 서로에게 계속 미안할 짓만 한다. “새대가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말은 고도의 언어 유희의 차이를 생산하지만, 그 바깥에서 하나의 관념만 생산하는 저능의 존재들로 계속 낙인찍히는 중이다.  

    사진 왼쪽부터 이유진, 이리, B 역의 전박찬, 성수연, 박소연 배우.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폭력에 대한 재현의 차원에 집중하기보다는 폭력의 순간을 세밀화로 그리며 옴짝달싹 못 하게 관객을 묶어 두는 폭력을 행사하는 연극이다. 무엇보다 말을 책으로 연장하는 동시적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공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배우들이 말을 더듬거리며 몸과 불화하는 무엇으로 말을 두는 것 같은 연극의 형식은 바로 그런 책의 기록을 통한 기억의 연장으로 보완되거나 보강되고 있다. 배우는 희곡을 자신의 언어로 순전히 연장하기보다 그 문자와 경쟁한다. 연극은 배우의 것인가, 아님 희곡 자체의 것인가. 희곡의 현전은 말이 이미 있는 문자의 반복임을 끊임없이 주지시키는 한편, 그 말의 무덤을 순간화하는 작업임을 지시한다. 동시에 말은 그 말의 무덤으로 수렴되어 사라진다. 이로써 연극은 메타-연극이 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연극이다. 그리고 인간의 문자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발화이다. 사실 그것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메타-인간으로서 동물의 세계와 손잡는 불가능성의 시도를 하고 있다.(220216)[각주:1]’ 이것이 동물의 언어 체계로써 인간의 언어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이 공연의 주제와 연결될 수 있을까.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p.s. 반면, 이와 같은 말의 방식이 사실 표현의 자율성, 발화의 자의성을 한층 강화하며, 글의 자율성의 지위를 마찬가지로 획득하는 것이라고 거꾸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곧 말은 반드시 자연스러운 무엇으로 들려야 하는가. 말은 친절해야 하는가. 글은 친절하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 친절하지 않은 글은 더욱 정교한 것인가. 따르는 질문들로부터 분기하며 빠져나오는 언어가 있다면. 그러한 가정을 실천하는 언어가 있다면. 그것을 좇는 것이다. 지금 이 연극은 희곡의 닫힌 언어를 닫힌 언어 자체로 극대화시키는 어떤 연극의 (새로운) 언어를 주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하나의 실험으로서 시도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반문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한 여지를 다시 남겨 본다.(220216)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1.10.22.~11.14. 평일 19시 / 토, 일 15시(화요일 쉼)

    작/연출: 구자혜 작·연출

    장 소: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관람등급: 8세 이상 관람가

    소요시간: 175분(인터미션 15분 포함)

    문의·예매: 1644-2003 | 국립극단

    외국어 자막서비스: 매주 목요일, 일요일 영문 자막

     

    ■ 출연진

    고애리, 문예주, 박경구, 박소연, 백우람, 성수연, 이리, 이상홍, 이유진, 전박찬, 최순진, 안마루(연주)

     

    ■ 스태프

     

    무대·조명: 여신동

    의상: 우영주

    음악: 이지구, 안마루

    사운드: 목소

    안무: 최기섭

    분장: 장경숙

    조연출: 류혜영, 이효진

    수어통역: 김홍남, 최황순

    한글자막: 이효진

    음성해설 작: 조연희, 구자혜

    1. 1. 마지막 질문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에 대한 재질문으로써 기울임체로 여기와 마지막에 문장을 덧붙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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