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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에이티브 바키, 〈보더라인〉: ‘무엇을’ 말할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발화할 것인가의 문제
    REVIEW/Theater 2021. 11. 7. 23:36

    크리에이티브 바키, 〈보더라인〉 공연 사진. ⓒ이강물(이하 상동), 배소현 배우.

    〈보더라인〉은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는 평화로운 국제 질서의 세계를 염원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을 쌓아나가는 과정은 뉴다큐멘터리 연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극장에 처음부터 자리한 한 명의 배우와 극장 바깥의 한국과 독일의 배우 네 명의 화상 연결이 비로소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마지막 장면―사실 그 전에는 기록된 영상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할 수 없어서 비로소 배우의 존재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까지 과거의 기록을 교차시켜 쌓아나가던 공연의 존재 방식은, 리얼타임의 성격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무대 위의 현존이 아닌 화면에 기록되는 배우들 대부분의 존재 방식, 현재의 이야기가 아닌 과정의 시간을 보고해 나가며 누적된 시간을 해명하는 한편 그 시간들에서 거주하는 존재의 모습들을 보여주거나 그 안에서 나온 발화의 층위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시도와 같은 개별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었을까. 무엇보다 이 모든 이미지와 말 들이 하나의 언어나 이념을 형성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리듬감 자체로 연장되지 않는다는 점은 지루함[각주:1]의 동기를 의문에 붙인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처음에 자막으로 설명되었듯 백신 관련해(?) 한국에 입국하지 못한 독일 배우의 사태로부터 각자의 자리에 있는 방식을 택한, 곧 물리적인 조건으로부터의 새로운 작업 방식에 대한 모색이 있다. 다섯 개의 장소를 아우르는 공연의 방식은 사실 한계 자체보다는 미학적 형식 자체로 당위성을 띤다. 곧 국경과 경계 없는 장소에서의 만남이 가능하며, 그 과정이 보여주듯 장소에 대한 제한 없음, 그 거리로부터 대화의 조건이 가능함을 수용하며 시작하는 대화의 방식과 같이 이는 공연 과정에 대한 합목적성을 보여주는 한편,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메시지로 연장되기 때문이다. 

     

    사진 오른쪽은 우범진 배우. 공연 바깥 현장은 공연으로 중계되고, 사실상 카메라 바깥 영역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를 또 다른 카메라가 찍은 사진이다.

    뮌헨으로 이사해 거주 중인 동독 출신의 배우 프롤리안 야르, 공연 후반부 극장에 진입하기까지 길에 분필로 선을 그으며 오는 장성익 배우, 무대에 계속 있는 배소현 배우, 종각역 근처의 종로타워가 바라다보이는 어느 건물 옥상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시종일관 탈북민을 연기하는 우범진 배우, 그리고 자기 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있는 나경민 배우까지 배우들은 단지 남과 북의 경계를 다루는 것을 넘어, 통일 이후 동독과 서독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배우들은 다양체의 군집을 이루며, 간헐적으로 송수신한 기록들을 연극은 나열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이 말과 이미지는 그 화면 바깥으로 잘 도착하지 않는 듯 보인다―이는 그 화면이 내재적인 완성을 가질 수 없다거나 그 수용에 있어 결여적 감각을 갖고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 과정이 도식적이거나 기대할 수 있는 차원의 논리를 예고하는 부분이 많아서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말과 이미지는 이미 지났거나 지나간 것들이다. 그 과정에서 〈보더라인〉이 내세우는 이념은 다분히 환원주의적인데, 이러한 오류는 무엇보다 각 이야기의 결을 세세하게 맥락화해 종합하지 못한 결과이거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일 것이다. 근미래의 시점이 아닌 과거의 시점을 답습하는 양태, 또는 개별적인 목소리들 사이에 빠진 사유의 공백과 목소리는 〈보더라인〉의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보여준다. 

    사진 왼쪽은 배소현 배우, 스크린의 좌측 상단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범진, 탈북민(우범진 배우), 플로리안 야르.

    〈보더라인〉에서 프롤리안 야르와 탈북민으로 분한 우범진의 대화를 기록한 영상의 자막은 탈북민을 “refugee”로 갈음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탈북민을 가리키는 특별한 영어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 정확히는 그러한 언어 체계 자체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보더라인〉의 이념은 곧 난민이라는 세계의 동시대적 화두인 경계의 개념에 남북문제 역시 수렴시키는 방식에서 가능해진다. “보더라인”은 휴전선을 상기시키는 국경선이나 경계선의 번역어인가. 아님 그 반대인가. 〈보더라인〉의 방식에서 남북 분단의 상황은 난민과 이주의 광의의 범주로 쉬이 묶인다. 탈북민의 이야기는 탈북 자체보다 난민이 된 이후 구별 짓기의 시선에 대한 측면에서 비롯되며 난민이 겪는 편견과 선입견의 문제로 환원된다. 

    캠프파이어를 하며 장성익 배우의 어린 시절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잔디 부지에 살았던 기억과 현재 그곳에서 그러한 기억이 연장된다는 말은 인상적이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곳이 자신을 조각한다, 또는 그곳에서 자신이 거처한다 같은 (명확하게 기억되지 않는) 자막의 어떤 문장은, 우리를 이루는 역사, 그리고 망각된 기억과 결부되는 삶의 방정식을 의미한다. 〈보더라인〉은 나경민 배우와 같이 외부와의 어떤 직접적인 관계성을 맺지 않는 존재도 1/n로 상정한다. 곧 어떤 경계의 영향이 아닌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삶의 필요성 같은 것을 수용한다. 그리고 이는 장소와 상관없이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전 세계의 더 많은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사진 오른쪽이 장성익 배우.

    아마도 장성익 배우의 말은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말이라는 점에서 곧 과정을 결과화하는 〈보더라인〉의 작업 방식에서 긍정적이며, 또한 어떤 이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작업의 솔직한 반향으로 보인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동시에 이 말은 경계의 의미를 확장하며 동시에 특정화한다. 반면 그 바깥의 말들은 어떤 범주로 수렴 가능하다. 그렇다면 동독과 서독의 통일 이후 동독 주민이 서독에 왔을 때 직접적으로 겪게 되는 편견의 인식은, 남북통일 이후 우리의 근미래일까. 
    그것을 상상하기에는 〈보더라인〉은 한국적 현실에 대한 발화가 없다. 〈보더라인〉의 이주와 난민의 당사자성은 프롤리안 야르에 맞춰져 있으며, 탈북민을 연기했던 우범진 배우의 경우, 이전 그 연기 경험 자체에 머물러 있다. 그레이스 한이라는 탈북민 여성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가 겪는 편견과 경험을 들려주지만, 사실상 그가 탈북민이라는 것 때문에 겪는 고민은 그러한 자의식 자체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오히려 그 반대이다.) 유학을 온 자로서 그러한 편견이 의도치 않게 따라붙는 것에 대한 인식적 낯섦과 불편함에 가깝다. 
    그 연장에서 〈보더라인〉의 결말을 갈음하는 어떤 막바지의 말들, 편견이 없이 하나의 공간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난민의 언어를 〈보더라인〉은 즉자적으로, 곧 그 이념 자체가 매우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게 한다―그러한 언어 자체가 틀렸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배소현 배우는 타자를 배우고 수용하는 자세를 무대로 연장한다. 난민의 언어를 베껴 쓰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난민의 언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기제나 정치적 심급은 사유화되지 않는다. 

    화면 중앙은 배소현 배우, 스크린에서 좌측 상단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플로리안 야르, 우범진, 장성익, 나경민 배우.

    오로지 무대에 혼자 존재하는 배소현은 기록된 영상의 재생에 일일이 리액션을 한다. 이는 동시간의 현장을 무대로 접속하는 것으로 연결되며, 모두 함께 하는 커튼콜을 숫자를 세며 일종의 지휘로써 가져가는 역할로도 이어지지만, 그의 역할은 전반적으로 관객의 입장을 대신하거나 선취하는 데 있다(따라서 그 피드백은 다분히 계도적인 것으로 다가온다―관객의 그것보다 더 과장되거나 과잉되어 있다.). 또는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졌으며 단독 카메라로 독일어 알파벳 발음을 a부터 z까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영어로 통역의 역할을 중간에서 했고 이것이 현장으로도 이어지며 확인되는 가운데, 그가 무엇보다 난민의 언어를 재현하고 체화하려는 노력에 이르면, 예술가의 욕망은 개인적이기보다 너무 투명하게 사회적인 것으로 변환되기에 이른다, 단순히 어떤 언어 성애자 또는 언어 능력자로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장성익 배우의 말은 〈보더라인〉이 갖는 이념, 또는 주제의 범주에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 탈주의 말이 그 자신을 독특한 개인의 지점으로 현상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곧 평화로운 네트워크에 부속되는 기계적인 평등과 열린 자세, 타자를 위한 어떤 것들과의 경계에서 배우 자신은 어떻게 자유롭게 발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과정 중 그것이 작품으로 들어올지 예상하지 않았던, 모든 것이 다 작품으로 흘러들어올지 알 수 없었던 시간의 어떤 흔적에서 찾아왔다. 곧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자기 발화의 공연―뉴다큐멘터리 연극의 장르적 특성으로 이를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은 그런 이념에 대한 리서치와 현장 연구 이후 결국 나와 연결되는 지점을 구성해 가는 과정 자체에서 ‘공연’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사실 독일과 한국의 교류지만, 〈보더라인〉에서 독일의 이야기는 프롤리안 야르 한 명의 입장으로 대부분 수렴되고(굳이 한국에서 격리돼 이 환경을 묘사하는 장면까지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은 앞선 공연이 갖는 리듬감과도 연관이 된다.), 한국의 이야기는 국제 정세의 이념에 흡수되면서 밋밋해진다. 그렇다면 〈보더라인〉이 갖는 미덕은 무엇인가. 공연을 떠나 대체 진정한 교류란 무엇인가. 아니 ‘보더라인’을 말하기 위한 조건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독일과 한국의 평등한 대화는 〈보더라인〉이라는 과정에서 과연 가능한가. 그러니까 영어를 중간 언어로 사용하는 것에서 나경민 배우가 보여주듯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영어를 더 잘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일반적인(?) 한국인의 입장을 배제할 수 있는가(그러니까 그것이 불평등한 조건을 상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조건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이 공연은 살피고 있는가.). 거꾸로 물어야 할 것 같다. 조금 더 불화로써 대화하며 그것으로 교류하고, 나쁜 이념을 손에 쥐는 법과 채에 걸러지지 않는 말들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설사 착한 연극[각주:2]의 이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공연에서도.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출연/공동창작: 나경민, 배소현, 우범진, 장성익, 플로리안 야르
    콘셉트/연출: 이경성
    조사/작가: 위르겐 베르거
    무대: 신승렬
    영상: 헤즈킴
    조명: 황규연
    음향: 정혜수
    무대감독: 이은규
    현장중계 총괄: 최용석
    현장중계 활영: 황호규
    조연출/아카이빙: 현예솔
    프로듀서: 이희진
    제작감독: 칼라 뭴러
    프로덕션 매니저: 한민주
    제작: 크리에이티브 VaQi, 레지덴츠테아터, 프로듀서그룹 도트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한독일문화원
    장소: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
    2021년 11월 3일 ~ 9일 (평일 19.30시, 주말 16시, 19시 30분), 월 공연 없음

    1. 1. 지루함은 사실 대부분의 공연과 퍼포먼스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는 부정적인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지루하되 반짝이는 순간을 위해 지루함을 버티는 게 곧 공연예술인 것이다. [본문으로]
    2. 2. 착한 연극이란 거대한 정치적 이념을 상대하는 연극에서 발생한다. 그 결과 밋밋해지기 쉬우며, 착함을 쌓아나가기보다는 거꾸로 불온함을 불러와야 한다. 불온함과 대적해야만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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