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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래빗홀 씨어터, 〈당신을 초대합니다〉: 경계 넘기로서의 초대
    REVIEW/Theater 2021. 11. 3. 17:33

    래빗홀 씨어터, 〈당신을 초대합니다〉 ⓒ박성수 (이하 상동)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언어에 대한 분열로부터 출발해, 현상학적 타자의 호출로서 제목의 함의에 도달하기까지 매체의 변위에서 장소의 변위로 옮겨가며 체험의 층위를 달리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특히 헤드폰을 끼고 모니터를 보고 앉은 중반까지의 과정이 무대 전면의 위치를 반전시키는 순간, 타자에서부터 내재적 차원의 경험으로 옮겨온다. 곧 우리가 타자를 언어적으로 정의하고 인식하려는 불가능성의 조건이 타자를 마주하기 위해 뒤틀린 우리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반전되며 현상된다. 
    먼저 입방체로 구획된 무대에 종횡으로 빽빽하게 놓인 큐브들 위에 관객은 앉는다. 그 앞뒤 간격은 좁으며, 이후 몸을 틀어 뒤를 볼 때 옆의 관객이 곁으로 인식되는 조건으로 연장된다. 큐브에 앉고 그 옆에 걸린 헤드폰을 끼고 음성을 순전히 거기에 의존하게 된다. 이는 헤드폰 바깥으로 들리는 소리를 차단하며 소거하고 감축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이러한 조건이 전적으로 침범받게 되는 것은 헤드폰의 음향이 꺼지고, 뒤에서 관객을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이다. 

    (사진 왼쪽부터) 모니터상의 조의진, 김원정, 수어통역협동조합 고경희 이사장.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모니터에 불이 켜지면서 초대의 인사를 건네는데, 개별 단어의 사전적 검토와 개입을 통해 그 인사를 지연시킨다. 사실 어떤 근본적인 언어의 정의가 실패하는 하나의 방법이 바로 이렇게 사전의 단어들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며 찾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어떤 것도 불확실하다는 것을 말함은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함인가. 어떤 것도 함부로 정의 내리지 않으려는, 언어적 공백을, 정의의 비본질성 혹은 상대성을 보여주려는 이와 같은 방식은 그와 같은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를 전제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타자는 이 말을 건네는 퀴어로 재현되는 듯한 어떤 목소리(이것이 고도로 의도된 것에 의한 것인지, 편견에 의한 판단인지는 불확실하다.[각주:1]), 모니터의 수어로 번역되는 언어가 가리키는 수어를 쓰는 대상, 불특정한 관객의 존재 모두를 향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어느 존재로도 명확하게 치환되지는 않는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이야기로 옮길 때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법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는 앞선 언어의 분열증적 탐문과 궤를 같이하는 듯 보인다. 공연의 모티브가 됐을 수도 있을, 동시에 공연 전체를 감싸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다소 몽롱하게 들리기도 하는 앞선 초대와 초대에 대한 언어적 지연의 언어의 메시지를 그 분위기 자체로 확정하는 바 있다. 곧 신비주의적 언어의 세계 자체로. 이는 『법 앞에서』를 해독하기보다 차용하는 데 그치는 것 아닐까.

    전쟁을 두 남녀의 전쟁으로 정의하면서, 그러한 관계의 끝없는 논쟁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한 사람이 더 개입하는 것으로 놓는 일련의 언어 다툼은 언어유희에 가깝다. 부조리극을 상기시키는 이와 같은 언어는 작은 모니터 안에 갇힌 배우들의 인공성을 보여주는 데 더 가까워 보인다. 헤드폰은 처음에 장비 테스트를 넘어 일종의 청력 테스트를 거치는데, 곧 소리가 들리는지 여부에서 나아가, 왼편과 오른편의 소리를 각각 들려주며 우리를 테스트한다. 이러한 신체 테스트는 사실 관객 편의를 위한 차원보다는 통일된 세팅 값을 표준으로 놓고 우리가 그 표준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일화된 매체를 거친 듣기의 방식은 왜 채택되었을까.
    실제 배우는, 그리고 수어 통역을 하는 두 사람까지 이후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은 전시 형태로 배우를 대체하기 위한 의도를 주장할 수 없게 한다. 또한 이러한 헤드폰의 방식은 앞과 뒤의 소리 차이를 극복하는 평등한 듣기를 가장한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실제 배우의 육성과 존재를 감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좁은 무대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라면, 오퍼석을 줄인 무대의 다른 설계 역시 가능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래서 다시 뒤에서 등장하며 무대의 위치를 바꾸는 배우들을 구성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사진 왼쪽부터) 고경희 수어통역사, 김원정 배우.

    바깥을 차단하는 헤드폰을 기어코 벗겨내는 건 모니터에 등장하던 여자 배우의 목소리다. 모니터는 장이 다음으로 넘어갔음을 알려주는데, 모니터와 배우 사이에서 관객의 시선은 경계에 걸쳐진 상태가 된다. 따라서 모니터의 숫자는 미약한 지위를 획득한다. 화면의 규약과 화면에의 규율이 벗겨지는 형태, 곧 공연의 급격한 변화의 기점이 타자의 목소리를 형상화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됨은, 여자(김원정 배우)―부조리극이 흔히 그러하듯 모니터상의 부조리극에서 연장된 무대에서 성별 말고는 역할을 명명할 근거가 없다. 이는 오히려 퀴어적 성의 존재와 함께 남성, 여성, 제3의 성의 구별을 강화한다.―가 당신이 불편하지 않으며, 당신 역시 나를 불편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대사에서 분명해진다. 그 말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배우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말의 내용은 조금 더 모호해지는 바 있다. 연장되는 언어 실험의 형태에서 이 말을 하는 화자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혼란스러운 배우의 등장 이후 정위할 수 없는 객석의 혼란과도 연관된다.

    여기에 그와 화면 속에서 파트너를 이루었던 남자가 등장하고, 목소리로만 등장하던 존재가 화려한 착장과 분장으로 등장하면서부터 현실의 배경이 잡히기 시작하는데, 세 사람은 선생님이 남으라고 한 지시를 따를지 여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이곳을 박차고 나가면서 공연이 끝난다. 따라서 문지기라는 존재가 체현하는 법을 거부할 수 없었던 존재는 마치 갑작스럽게 나타나 관객을 돌아 세운 목소리의 존재처럼 어떤 사라짐이라는 도약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작품은 새로운 가능성을 이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가 타자의 호소였다면, 후자는 법(대타자)의 거부이다.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결국 『법 앞에서』를 가볍게 뒤집는 결론으로써 극단적으로 자신을 속박하는 언어 자체를 잘라내는 선택을 가시화한다. 마치 관객을 옥죈 모니터와 헤드폰을 다시 거절하게 만듦으로써 매체 환경의 전이를 경험하게 하는 것과 같이. 따라서 전반부의 언어 유희적 질문이 언어와 법에 대한 재정초를 위한 전략이었다면, 관객을 상정하고 있는 제목에서의 “당신”의 선택에서 연장되는 다른 선택의 가능성의 시범은 고르기아스의 매듭 끊기의 방식, 곧 벤야민의 법을 파괴하는 신적 폭력을 유비한다. 하지만 당신을 정립하는 타자의 호출과 신적 폭력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존재의 수용과 타자를 묶어두는 법과 언어의 폭력을 거부하는 두 층위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목적과 방법을 간격 없이 묶는 방식을 택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협소한 공간이 주는 존재 간의 간격과 몽롱한 언어적 나열을 뒤로 하고, 관객은 급격한 결말이 주는 과격한 언어적 전환을 수용할 수 있는가. 

    처음의 객석 위치의 뒤편에 위치한 무대에 선 조의진 배우.

    관객은 처음에 입구를 거쳐 두 문 중에서 한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 문은 관객 한 명 한 명을 센서로 감지해 “삑” 소리와 함께 통과시킨다. 반면 배우는 또 다른 문에서 보이지 않게 등장해 또 다른 문으로 나간다. 이러한 문은 뒤돌아봄을 통해 배우에서 연장된 풍경에서 인지되는 바다. 곧 문지기의 말이 트릭이었음을 드러내는 메타포로 이러한 무대 장치가 구축된 것일까. 문이 애초에 없다면, 또는 하나라면 당연히 문을 여는 데 질문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들어오며 간파된 문을 통해 나가는 것은 그 문의 의미를, 앞서 등 돌린 모니터의 숫자처럼 비루한 것으로 지시한다.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당연하게도 누구는 통과시키고 누구는 통과시키지 않는 차별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존재가 일차적으로 관객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수어 통역과 같이 다른 언어의 사용을 염두에 두면서. 하지만 자신이 그 경계에서 선택의 주체로 놓여 있음을, 법(모니터)과 타자(배우의 목소리)의 사이에 있음을 보여주며, 궁극에는 어떤 선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시에 마지막 선택의 부담은 관객으로서는 이미 없어진 상태라는 점에서, 우리는 극장 바깥에서의 또 다른 선택의 윤리를 인계받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타자의 목소리를 좇아, 그리고 그 타자를 좇는 또 다른 타자의 행위를 좇아 기울어진 극장의 연대를 구성한 바 있다. 그것은 의지나 선택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본성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따라서 상대적으로 법 앞에서의 거부라는 선택은 더욱더 환상적이고 한편으로 실재적인 결단의 결과물로 생각된다. 

    김민관 mikwa@naver.com

    [제작진]

    작 이연주
    연출 윤혜숙
    연출부 김태령
    출연 김원정, 조의진
    목소리녹음 김원정, 조의진, 강혜련
    특별출연 썸머, 오동, 이성수, 하지성
    수어통역 수어통역협동조합
    무대 유소양
    조명 성미림
    음향디자인 임서진
    음향기술 이현석

    음악 박소연
    영상 강수연
    영상기술 장주희
    의상 김미나
    기획 나희경
    그래픽 디자인 김유나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1. 1) 이 공연을 기획한 나희경 기획자의 설명에 따르면, 소수자의 존재가 가려지고, 모자이크나 음성 변조의 방식으로 등장하는 통상적인 재현의 방식을 재현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변조는 무대에서 실제 배우가 등장해서 발화하기 전까지 모든 음성에 가해진 부분으로, “무대에 실제 목소리가 등장하면서 가려왔던 존재가 실체화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의 연장선상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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