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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텐 스팽베르크 〈휨닝엔〉: 공동체의 이념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REVIEW/Dance 2021. 11. 15. 13:09

    〈휨닝엔〉 관련 이미지 ©courtesy of the artist. 출처=http://obscenefestival.com/ 

    〈휨닝엔〉은 마텐 스팽베르크의 춤에 관한 철학은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가에 대한 질문을 안고 있었다. 어떤 스타일이나 문법, 훈련된 신체, 나아가 안무로부터 벗어난 무엇은 어떤 춤일까. 〈휨닝엔〉은 매우 더디게 진행된다. 시간은 멈춰 있는 듯 진행된다. 단체(박상미, 박진영, 박한희, 서영란, 이경후, 이민진, 정다슬)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것이 관객을 향한 것도 어떤 사물을 향한 것도 아닌 그런 멍하면서도 흐릿하지는 않은 시선이 그 시작이다. 공연의 시간이 황혼을 상정한다면, 그 눈은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는 시선에 가깝다. 곧 관객과 퍼포머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있다. 그 경계는 이 시간으로 휩쓸려 가는 주술의 발현을 기원하는 거리이다. 시간이 무화되는 공간. 

    찰랑대는 투명 원환 오브제들이 달린 더 높고 더 낮은 두 개의 대가 시선의 오른쪽에 놓이고 뒤에는 추상적 도상들의 화려한 직사각형 형태의 네 개의 천이 드리워져 있는 무대에서, 오브제들은 찰랑대고 천은 미세하게 펄럭일 것이다. 그것들이 (오브제에 비해 천이) 명확하게 반향되는 것은 아니다. 멈춤으로부터 한 퍼포머(정다슬)가 도약한다. 팔과 다리를 같은 방향으로 올리는 어정쩡한 점프의 포즈가 그것이다―이본 라이너의 움직임 같기도 한. 이 손이 오브제를 칠 때 이는 우연성을 띤 것인지 아닌지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모든 움직임은 이미 짜인 것일 것인데, 그것은 의도치 않은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균열을 포함해, 〈휨닝엔〉은 그 움직임을 모두 잡힐 수 있는 것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철학을 다시 상기해 보면, 〈휨닝엔〉의 미덕이 드러난다. 어떤 움직임도 ‘뚜렷이’ 재단된 안무의 그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소위 “무용”이라 부르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이 부분은 조금 더 첨예화가 가능하다. 한편 퍼포머는 각자의 호흡과 자리, 시간을 갖는다―이를 춤의 공동체의 첫 번째 이념이라고 부르겠다. 쉬이 군무가 되지 않으며, 따라서 움직임은 마치 전염에 의한 전파 방식처럼 시차를 갖고 번져 나간다. 다른 한편 퍼포머의 움직임은 일상의 몸짓을 닮아 있으며, 따라서 따라 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준다. 나아가 이 느리고 더딘 움직임은 단순히 몸의 방향에 따라 자동화된 기술적 지침에 의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 역시도 준다. 

    하지만 이 느리고 더딘 움직임이 어색하거나 지치거나 춤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영역은 역시 훈련된 차원의 보충을 통해 가능하다. 이 균열의 지점을 볼 수 있는 부분은 유일하게 무용을 전공하지 않은 퍼포머―그는 마텐 스팽베르크의 대화에서 통역을 맡았던 통역사 이경후―이다. 곧 분절된 단위들로만 무용을 환원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그 기계적 분자들의 결합을 유려한 선으로 잇는 건 역시 어떤 테크닉이거나 훈련된 몸의 양식이 보증해야 함이 드러난다(하지만 다른 질문도 역으로 가능하다. 왜 그 반대의 움직임을 나는 왜 어색한 움직임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둘을 확연한 차이를 갖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그 기준은 결국 통상의 춤의 기준을 고스란히 적용한 결과 아닌가? 나아가 다른 이들의 움직임이 어색하지 않다면 이는 관성적이지 않은 그들 고유의 것인가? 반대로 그 고유의 것은 언제나 자연스러움으로 나타나는가?). 이는 그 자체로 실패라기보다 공동체의 춤에서의 소중한 단서를 제시한다. 곧 춤의 공동체의 두 번째 이념에서, 이 움직임의 실패는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공동체 또는 안무의 실패일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또 다른 오해일 수 있다. 곧 예외적인 비전문가의 춤과 그를 제외한 모두의 춤은 사실 공동체의 이상이 아닌 이상의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닌 우연한 조합일 수 있다. 곧 애초에 합치라는 것 자체가 추구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곧 공동체의 안무는 각자의 충분한 시간이 충만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지점을 추구하지 않을까.

    만약 더 많은 시간과 연습을 통해서라면 그의 테크닉적 어색함은 상쇄되었을까. 아니 그러한 시간을 요청하지 않는 대신, 움직임은 조금 더 낮고 평평한 수준을 향해 나아갈 수는 없었을까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움직임이 각자의 고유한 움직임의 결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그냥 일반적인 안무의 방식, 곧 전체주의적 방식에서 다만 그것을 시차적 안무를 통해 상쇄하는 듯한 착각을 주는 안무 아닐까라는 질문 역시 가능하다. 이 모든 시간을 그저 낭만적인 것으로 보았다면, 이는 모든 고유성에 가닿지 않은 보기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오히려 그의 철학의 토대를 시험해 보기 위해 유의미하다. 

    사실 움직임은 동질적인 부분이 크다. 더딜 뿐만 아니라 형태적 유사성을 가진다. 이는 의식(儀式)이거나 어떤 인사와 같은 교환, 앉아서 팔을 사슴뿔 같은 도상 기호로써 만들어 무언가를 향해 교신하고 발신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퍼포머의 몸짓까지 움직임 대부분은 현실의 재현 질서를 변형한 것이거나 그것과 닮은 무엇이며 또는 상징의 기호 질서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처음부터 모두는 같은 시선의 처리에서부터 시작했고, 같은 시간의 질서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재현하는 것이 명백하다. 중후반의 경계쯤에서 종을 울리자 모두가 자리를 펴고 책을 읽는 시간에 돌입하는 구간처럼 어떤 공동체의 의식을 갖고 철저히 동기화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이 드러난다. 

    거대한 음악의 파고에 따라 움직임은 변화한다. 큰 틀에서의 움직임의 큰 변화는 없다. 그것은 차이의 반복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움직임은 더디고 많지 않다. 또한 단속적인 분포를 따르기 때문이다(A의 ㄱ의 위치, B의 ㄴ의 위치, 이런 식으로 움직임이 시간과 존재 차원에서 분산돼서 공간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게 〈휨닝엔〉의 방식이다.). 일상을 사는 어떤 특이한 종족의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런 시원적 삶의 원형이 무엇을 재현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근대적인 것도 아니지만 딱히 서구적인 것도 아닌, 동양 여성들만의 공동체(이를 페미니즘적 수사로 옮길 수는 없다. 안무가가 이 안에서 유일한 남자이므로)는 서구 근대인이 가진 어떤 환상이 투사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 역시 가져볼 수 있다.

    춤의 공동체의 세 번째 이념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는 평평한가. 미학의 담론은 유럽 아닌 것에서 올 수 있는가. 중요해지는 건 이 어떤 이상 현실에 대한 재현이 공동체의 합치에 따른 것이었는가라는 공연에서 드러나지 않을 질문이다. 왜 이들은 모두 한곳을 보고 다시 한곳을 보는 결말을 맞는가. 마치 숙제를 하듯 정해진 시간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적으로 책을 읽는가. 왜 관객은 거기에 동참할 수 없는가. 그들이 책을 읽는 걸 왜 지켜봐야 하는가. 아니 이들이 책을 읽는 연기를 왜 해야 하는가. 

    〈휨닝엔〉은 앞선 질문처럼 많은 미덕을 가진 작품이다. 폭력적이지 않은 움직임의 적용(적어도 누군가 도태되지 않는 차원에서 움직임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현실 역시 보여준다.), 그리고 일상을 닮은 각자의 존재 방식, 누군가는 정동으로 부를 수 있을 만한 공동체의 낭만적인 삶의 방식, 고요하고 거대한 사운드 스케이프와 그것을 응시하게 만드는 ‘더디고 적은’ 움직임, 인상적인 퍼포머 각자의 고유성까지―정다슬의 이후 후반부의 응시는 조금 특별하거나 예외적인데, 끔뻑끔뻑하는 눈동자는 상대적으로 정지된 다른 퍼포머들과 달리 그 정동을 신체적으로 함축하는 인상을 준다. 반면 공동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질문, 세계의 재현에서 간과되는 이념들의 차원, 재현의 질적 차이까지 많은 부분 질문한 거리를 남겨둔다.

    적어도 〈휨닝엔〉은 또 다른 옵신 페스티벌에서의 안무 작업인 잉그리 픽스달의 〈내일의 그림자〉에서 퍼포머들을 기존 아이디어 차원에서 그대로 전유한 방식과는 달리, 공동 워크숍과 이를 통한 창작으로의 발전을 꾀한 국제 교류적 작업이라는 점에서 또한 긍정과 질문을 가져가게 한다. 이 세계는 모두가 바라보는 세계인가(그래서 관객 역시 그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세계인가), 아님 어떤 환상에 의한 현실과 상관없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가. 

     

    p.s. 〈휨닝엔〉에서 보던 책은 다름 아닌 『해저 2만리』의 국제적 판본들이다. 쌓여 있는 책의 더미는 허물어진 바벨탑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모든 언어는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내용이라는 이념을 갖는다. 하지만 그 표면은 모두 다르다. 이는 국적이 다른 국제 교류 프로젝트의 이상을 반영한다. 바다 세계를 탐험하는 『해저 2만리』는 왜 모두의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을까. 황혼과 이국적 풍경과 신비한 공동체는 이 텍스트로부터 어떻게 연장되는 것일까. 이것은 이 세계를 푸는 하나의 중요한 힌트가 될 것인가.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1.11.11.목 19:00, 11.12.금 19:00, 11.13.토 19:00
    공연 장소: 문화비축기지 T4
    러닝타임: 130분

    제안: 마텐 스팽베르크
    함께: 마텐 스팽베르크, 박상미, 박진영, 박한희, 서영란, 이경후, 이민진, 정다슬
    후원: 스웨덴 예술 위원회(Swedish Art Council), 독일 공연예술 기금(Fond Darstellende Künste),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제 교류 지원 사업
    위촉/제작: 옵/신 페스티벌

    공연 소개: 마텐 스팽베르크는 옵/신 페스티벌 2020에서 공연 그들은, 배경에 있는, 야생의 자연을 생각했다와 수행적 글쓰기 그들은 야생에 있었다를 통해 춤의 잠재성을 모색했다. 올해는 공연 휨닝엔, 렉처 시리즈 강둑 대화, 공공의 춤추기 춤추는 공동체 세 편의 작품을 선보인다.

    휨닝엔에서 춤은 망각과 기억, 부재의 존재, 흐르는 시간의 정적이 공존하는 풍경을 열어낸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 울타리의 틈새로 새어 들어간다. 여기는 사물이 본래의 이름대로, 본래의 존재대로 불리지 않는 곳, 인간이 늑대인간이 되는 곳, 낮의 옷은 벗었지만 아직 베개 밑 잠옷은 꺼내지 않은 곳이다. 휨닝엔은 황혼이라는 중간 지대에서 춤이 어떻게 다른 존재들의 형태를 드러낼 수 있는지 살펴보는 장기 프로젝트다. 스팽베르크는 서울의 무용수들과 함께 황혼을 둘러싼 작품을 만든다. 이 춤은 분명 존재하지만, 오직 이전에 존재했던 춤과 앞으로 오게 될 춤과의 관계 속에서만 식별되며, 관객은 표현이나 재현, 혹은 손으로 만져지는 실체는 잠시 놓아두고 춤 그 자체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렸을 적, 나는 종종 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갔다. 해가 질 때쯤 도착해서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우리는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파도가 어둠과 점점 하나가 되다가 어느새 소리로만 남게 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곤 했다. 가끔은 파도의 존재를 더 크게 느끼기 위해 눈을 감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우리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출처: http://obscenefestiv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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