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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포먼스는 무엇의 이름인가
    Column 2021. 11. 21. 15:23

    김민관

     

    *이 글은 주로 최근 들어 미술에서 퍼포먼스라 불리는 것들 중 어떤 특정한 형상을 추상화하며 분석하고, 이를 통해 왜 퍼포먼스가 행해지는지를 추측해보고자 하는 의도를 띠고 있다.

    전시와 퍼포먼스

    퍼포먼스는 무엇의 이름인가. 퍼포먼스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제스처이지만 한편으로 너무 흔한 이름이 되었다. 퍼포먼스는 과잉 기표인 셈이다. 주로 전시의 이벤트적 성격으로 전시에 부착되는 그리하여 흔히 전시의 스펙터클로 확장되는 퍼포먼스의 중심에는 흔히 퍼포머라는 현존에 기댄 시간이 놓인다. 이는 한시적인 물량과 인원의 투입이 그 시간에의 몰입을 위해서만 예외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전시장이 평소 비어 있는 곳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현실적으로는 퍼포먼스는 전시를 보는 데 방해가 된다.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퍼포먼스를 보는 일시적인 대열은 전시와 대립한다. 전시를 가로막고 대상화 가능한 전시의 안에 그럴 수 없는 눈과 얼굴과 신체의 형상들이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퍼포먼스는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퍼포먼스의 매체적 성찰보다는 퍼포먼스가 어떤 효용이 되는가의 차원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대부분 퍼포먼스는 전시장을 벗어날 수 없다. 또는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시 기간 대부분은 절대적인 시간으로 주장될 수 없다. 전시에 (시간적으로) 포함되고 동시에 (물리적으로) 불포화되는 퍼포먼스만이 전시의 그 예외적인 자리를 갖는다. 곧 전시는 퍼포먼스의 이전에도 볼 수 있고 퍼포먼스의 이후에도 볼 수 있다면, 퍼포먼스는 퍼포먼스의 시간에만 볼 수 있다―퍼포먼스를 기록해 다시 영상으로 만들어 전시로 연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그 시간의 차원에서 열화된 버전의 충실한 기록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다(물론 이러한 기록적 차원으로 수렴하는 방식이 시각 이미지의 유려함으로 재편집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역으로 말하면 전시는 퍼포먼스를 보기 전이나 보고 나서도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퍼포먼스에 비해 전시는 상대적인 시간성을 갖는다. 이는 그 텅 빈 공간의 성질에 상응한다. 그런데 전시를 보는 중에도 퍼포먼스를 볼 수 있을까. 열기, 침묵, 부재가 어린 전시장은 그 흔적의 불순물들이 남으며 이는 전시로 연장되는 대신 일상의 차원을 회복하기까지의 간극을 요청한다.

    전시라는 형식의 자유로움은 작품들이 관객의 동선이나 시각을 엄밀하게 분배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관객의 소외를 가져온다. 무한한 광경과 텅 빔의 시간에서 관객은 산책자가 된다. 반면 퍼포먼스는 그 전시와 적대하며 전시 안에 또 다른 테두리를 만들고 전시를 보는 시선과 유영하는 자유를 구속하면서 관객을 붙들어 매고자 한다. 이 퍼포먼스의 매체가 되는 게 주로 신체, 그리고 그 신체의 파생물들이다. 움직임이라든지 낭독, 연기 등이 그것이다. 보통은 내용적 차원의 서사가 그 자체로 확보―자족적이거나 완결적이지―되지 않으며 표층에 대한 강조가 전제된다(벌어지고 있음 자체가 지시된다!). 행위의 차원이 텍스트의 차원을 갈음하기도 한다. 
    이 행위는 보통 전시의 작가가 직접 전시를 이루는 오브제를 연장해 행위와 결합해 재인지하게 만들거나 전시의 새로운 작업을 생산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전시의 작업 과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전자가 전시를 감각하는 법에 대한 일종의 사례 제시이거나 나아가 렉처의 성질을 띤다면, 전시에서 보여주지 못한 과정성을 보여주는 후자는 전시가 생생한 시간을 소거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자체는 생생하다기보다 모사적이며 재현적이기보다 자기-지시적이다. 그는 완전히 관객을 향하지도 자신의 일상 자체를 고스란히 연장할 수도 없으므로 이러한 행위는 관객이 그를 대상화하기도 어려우며 온전히 심미적인 움직임으로 넋 놓고 바라보기도 어렵다. 결과적으로 이는 예술가의 정체성을 재현한다. 

    반면 전시를 연장하는 방식에서의 퍼포먼스는 무한한 자유의 소외된 관객이 전시를 촉각적으로 인계받거나 유기적인 시간으로 전시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에 싸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약 전시가 한정된 시간―흔히 말하는 그 기간의 차원이 아니라―으로 수렴할 수 있다면, 퍼포먼스는 역설적으로 전시의 유기적이지 않은 이미지들의 결락되는 부분이나 빈 중심의 서사를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또는 그것들을 보완하거나 충족시키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전시의 시간을 집약하는 방식으로서 퍼포먼스는 전시에 대한 대안(적 연장)일 수 있을까. 퍼포먼스는 전시의 부차적인 부분일까. 또는 전시는 퍼포먼스를 온전히 포함하는가. 애초에 퍼포먼스를 위해 설계된 전시는 불충분한 전시를 함의하는가. 퍼포먼스가 전시의 바깥을 시도하는 것이라면, 왜 퍼포먼스는 전시와의 연계성을 제대로 현상하지 못하면서 또한 전시장에서 이뤄지는 것일까. 반대로 퍼포먼스는 전시의 분절된 감각을 온전히 통합하는 매체인 것인가. 그렇다면 전시는 불완전한 감각의 느슨한 계열체로 환원되는가.

    교역소에서 열린 《상태참조》(2014) 포스터. 출처=https://neolook.com/archives/20141213b

    극단적으로 퍼포먼스만으로 이뤄진 전시를 생각해보자. 화이트큐브를 진공으로 두거나 시작부터 극장의 블랙박스를 전유할 수도 있다. 예전 교역소의 《상태참조》나 《퍼폼》은 애초에 퍼포먼스를 위해 한시적으로 전시 형태의 공간을 구성하고, 퍼포먼스 자체만을 위해 공간(=시간)을 여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퍼포먼스는 단판 승부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조건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한정된 자원의 집중을 추구하는 것은 스펙터클을 위한 물량 공세와도 연결되지만 동시에 물질적 조건에서의 자유로움과 연동된다는 점 역시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한정된 관객의 무한한 시간을 담보하는 전시장의 비효율성(?)에 비해 퍼포먼스(만으로 이뤄진 전시)는 단시간에 비교적 많은 사람에게 한 번 보여주면 된다는 차원에서 극단적인 효율성의 추구 방식일 수도 있다. 또한 전문적인 퍼포머가 아닌 작가 스스로가 한 명의 퍼포머가 된다면 그리고 신체에서 연장된 최소한의 형식들만으로써 발화하고자 한다면 비물질적인 차원에서 많은 것을 경감할 수 있다. 특히 교역소처럼 작고 은밀하며 고립된 공간에서의 전유가 제도권 바깥의 시간을 수여하며 관객과 퍼포머 사이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특수한 정동이 감싸고 있던 곳에서는 퍼포머의 숙련도나 신체 움직임의 공간에의 투여 정도가 현격하게 줄어들어도 아니 줄어야 된다고 보인다. 

    퍼포먼스의 매체: 퍼포먼스라는 매체 또는 퍼포밍 아츠

    퍼포먼스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존재이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가능한다. 그러나 동시에 직접적인 전달 방식에서 최대한의 수용 가능성을 충족할 수 있는 매체인 것인가. 흔히 퍼포밍 아츠(performing arts)라고 번역되는 공연예술에서는 배우의 신체적 숙련도, 테크닉을 비롯해 서사의 촘촘함과 탄탄한 구성, 나아가 공간학적 서사라고 할 수 있을 시노그라피의 영역까지 하나의 시간에 이륙하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협응과 노력, 의지와 실천이 요구된다. 반면 이러한 시간 대신에 이미지와 다른 어떤 움직임, 또는 또 다른 이미지로서 제시되는 움직임은, 적어도 그것이 ‘심미적’인 무엇으로 여겨질 것이라 생각되는 움직임은 찰나적으로 펼쳐지고, 그 펼쳐짐의 시간만큼이나 비교적 속성(速成)으로 완성되며, 따라서 배우나 무용수로 갈음되는 퍼포머의 외부 기용은 뭔가 퍼포머 자체를 ‘표피적’ 이미지로 소모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가령 공연예술계, 특히 무용계에서 입을 모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퍼포머는 여기서 안무의 권한을 온전히 수여받지 못한 채 의사-안무가의 말을 듣고 그럴싸한 콘셉트를 구현한다는 것. 그럴 때 퍼포머는 소외감과 소진됨을 그 부산물로 획득한다는 것. 그러니까 이는 ‘안무는 동작이나 대강 짜주는 그런 기계적인 테크닉인가?’라는 회의가 뒤따르는 그런 정서를 작가와의 협업―실제로는 고용―에서 경험하던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말이다(‘따라서 여기서 퍼포먼스는 퍼포밍 아츠를 매체로 삼는 그런 방식이다’). 
    그렇다면 “작가×안무가(/연출/배우/무용수)”를 붙이고 이러한 퍼포먼스가 전시의 일부가 되는 방식을 탈피할 수는 없을까. 저자는 여전히 전시의 작가로 수렴되어야 하는 것일까. 퍼포머의 주체적 번역은 시도될 수 없는 것일까. 애초에 이들이 1/N 일부로 전시의 부분을 충당하는 것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안무와 연출의 인식적 언어를, 배우와 무용수의 신체적 언어를 이분하며 규정하지 않고, 그 둘의 언어를 모두 배우며 그 둘의 입장에 작가가 함축되는 게 가능할까. 이를 심미화로서의 타자화, 개념의 폭력적 적용이나 개념 바깥의 언어라는 또 다른 타자화 모두를 감행하지 않고 그 자체를 존중하며 오히려 자신은 부차적 지위로 내려올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려는 지점에서 작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것을 온전히 들음으로써 이를 다시 관객에게 들려주는/돌려주는 수용자의 입장이 가능할까(아마도 이 수용자 다음에 마스터의 지위라는 게 주어질 것이다.). 그럼으로써 또 다른 저자성을 전시 바깥에서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몸이라는 매체는 사실상 어떤 주권도 없는 순수한 것으로 전제된다. 이는 개념이나 텍스트, 이미지가 연장되는 용기로서 기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반면 공연예술은 몸을 매체로서는 다루지만 이를 실제 작업으로 연장하는 경우는 없다. 그건 거의 공백처럼 남아 있다. 배우의 말, 연기, 무용수의 움직임, 몸짓 모두는 사전 지시문처럼 완벽하게 수행되는, 매끄러운 서사를 봉합하는 수단으로서만 올곧이 존재한다. 따라서 배우가 전연 기억되지 않기도 않고 또는 무용수만 기억되기도 한다. 또한 언어만 기억되거나 퍼포머는 흐릿한 형상으로 언어에서 떨어져 나온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대부분 실패하는 전시―그것이 단지 퍼포머만으로 기억되거나 언어의 파편적 형상으로만 기억되는―에서의 퍼포먼스와 공연예술이 상반된 형상이면서 짝패임을 가리킨다. 
    이념과 몸짓, 텍스트와 재현 사이에서 확인되는 건 그 둘의 분리이다. 전시가 전자를 거칠게 몸에서 훑(으며 털)어낸다면, 공연은 후자를 완전히 지우면서 전자를 완성하려 든다. 따라서 퍼포먼스가 강박적으로 고집하는, 그것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몸과 현존의 키워드는 공연에서는 이 몸의 숙련도 또는 이 몸의 수단적 활용을 벗어난 다른 차원에서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퍼포머 자체의 컨텍스트와 주체적인 정의, 발화 방식 자체에 대한 엄격한 고수 등을 통해서만 겨우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의 외재화: 퍼포먼스와 도록

    그동안 전시보다는 퍼포먼스에, 퍼포먼스만을 위해 구성하는 전시에 주목해 왔었다. 공연 양식과의 장르적 차이에서의 표현과 그 특질에 주목했고, 서로를 거울삼아 교차하며 두 영역만의 미학적 특질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 결과 전시에서의 퍼포먼스가 갖는 나이브함, 낭만성, 타자화의 방식 등의 한계, 그리고 공연이 갖는 너무 많고 유기적이며 매끈한 서사와 전개 방식, 투명한 일상성의 재현에 대한 한계가 인식되었다. 퍼포먼스가 전시를 갱신하는 새로운 대안의 시간적 언어라면, 전시는 부족분의 공간으로 환원하는가. 시각예술의 매체적 고유성이라는 것은 한정되어 있는 감각―곧 시각―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형태의 하나가 곧 퍼포먼스이기도 할 것이다. 전시는 그 매개 방식에 대한 고민―결과적으로 관객의 생산과 그 몰입의 정도를 파악하기 수단으로서―, 그리고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언어―레퍼런스와 인식론적 해석의 단초를 만드는 차원에서―를 지시하기 위한 고민을 해왔다. 
    곧 주체가 온전히 상주할 수 없는 방식, 나아가 대면할 수 없는 방식, 아니 그것이 필요 없는 사물로써 발화 방식 또는 작가와 작품의 괴리를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의 차원에서 매개물을 도입한 부분이, 물질적인 차원의 현현으로서 퍼포먼스 또는 보통 종이라는 지지체로 구성되는 서문, 나아가 그것의 확장된 형태로서 도록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도록은 서문, 나아가 최소한의 글이 없더라도 서문을 여전히 흉내 내고자 하는 A4 용지로서의 텍스트라는 입구―실제 입구에 보통 있고 전시의 최소한의 정보와 전시를 보거나 읽는 법, 곧 입구의 기능을 제시하고자 한다.―를 잣는 전시의 관습과는 별개로 전시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따로 또 같이 욱여넣어야 하는 결정체의 매체라는 점에서 이상(理想)으로서의 퍼포먼스에 비견할 수 있다.)

    ‘과잉으로서의 퍼포먼스의 과잉’이라는 가설(假設)은 전시의 외재적인 형태로 갈음되는 퍼포먼스와 텍스트의 수요에 대한 현저한 현상에서 그 전자의 의제를 기존 퍼포먼스에 대한 어떤 형상들의 한계와 연결하고자 가설(架設)한 것이다. 따라서 퍼포먼스의 매체적 특질에 대한 이상(적인 분석)보다는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또 그 무리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퍼포먼스의 이유를 설명해보고자 퍼포먼스의 형상들을 재현해 보고자 했다. (동시에 똑같이 전시의 도록이 갖는 관습성과 한계 역시 거꾸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퍼포먼스가 여러모로 전시의 타자―시공간적으로 그리고 매체적으로―라면, 그 타자의 성질을 전용하기보다 조금은 엄밀하고 다른 방식의 접근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글은 퍼포먼스를 하나의 주요한 매체로 가져가야 한다거나 부족분으로서의 전시 따라서 전시의 완성으로서 퍼포먼스라는 것이 필요할 수 있음을 물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퍼포먼스가 공연예술의 숙련됨의 기술과 매끈한 서사의 재현 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손쉽게 취해질 수 있는 방식으로서 선택되거나 매체의 특질에 대한 이해 없이, 또는 예술들의 우열을 성립시키거나 그 차이들을 영원히 분리시키며 구성하거나 또는 전시와의 엄밀한 연계성―곧 전시의 기각이나 감축의 결과를 가져오는―에서 비약하며 퍼포먼스를 선택하는 것의 한계를 이야기할 뿐이다. 

    퍼포먼스라 명명되는 것들

     

    박승순&신승렬, 〈시적극장〉 [사진 제공=우란문화재단]. 출처=http://wooranfdn.org/program/end_view.jsp?idx=128

    이 글은 발화의 방식이 첨예화되고 유통이 원활해진 여러 차원의 가능성을 누르고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어떤 유행으로서의 퍼포먼스를 하나의 증상으로 보고자 했다. 또한 그 증상이 한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 역시 아닐까라고 전제했다. 최근 《밤의 플랫폼》의 전강희×베일리홍의 〈극장을 경유하는 목소리들〉은 일종의 사운드 체험이라는 전시 형태를 한 명의 관객의 특정 시간으로 분배하면서 퍼포먼스로 명명되었다. 관객의 작품의 조작 가능성과 이를 통한 서사의 재구성이 자의적이면서 우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는 퍼포먼스라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그 형식적 부분이라기보다 명명의 차원에서 퍼포머의 지위를 관객으로 이양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퍼포머가 사라진 또는 부재한 공간은 전시로 명명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이 퍼포먼스는 역설적으로 전시, 수행성을 가진 전시의 방식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드라마투르그 전강희와 사운드 디자이너 베일리 홍이 참여한 지난 작업 중 가령 ‘시적극장’ 시리즈는 퍼포밍 아츠에서 퍼포머를 뺀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을 공연의 감각, 동시에 공연과는 다른 감각, 또는 시각이 주는 공연의 감각을 주는 작업이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극장을 경유하는 목소리들〉 역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여기서는 시공간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축소된 버전, 동시에 목소리로써 배우를 현상하는 연극성과 배우를 대리하는 각 연극 관계자의 발화의 행위 주체성을 강조하는 읽기의 방식이 강조된다. 

    이 ‘퍼포먼스’는 다시 보이지 않는 퍼포머의 현존들, 그 현존의 절대성과 그에 따른 퍼포머들의 선형적인 전개를 나타낸다. 결국 퍼포머는 없지만,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는 다만 관객의 손에 의해서만 차단될 수 있다. 곧 그 존재성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파편적으로 끊긴다. 퍼포머의 현존은 관객에 의해 찰나적인 것으로 분쇄된다. 두 개의 헤드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이 설치는 2010년 이후 연극에서의 정치적 의제들, 그리고 그에 비해서는 추상적 이념에 가까울 글들을 아카이브한다. 여기서 관객은 컨트롤러에 의한 두 개의 사운드 채널 중 하나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쪽의 버튼을 눌러 다른 쪽 소리를 듣는 경우, 반대쪽 소리는 꺼지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퍼포먼스’는 소거될 수 있으나 중단될 수 없다(=들리지만 소거될 수 있다.).          

     

    권희수, 〈코어〉 퍼포먼스 ⓒ이현석(이하 상동). 퍼포머 전보람.

    권희수 작가의 〈코어〉는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전시인데, 관객은 한 시간가량의 시간 동안 전시장을 체류하며 사운드를 듣는다. 무언가 가시적인 것이 없다. 곧 전시장은 텅 비어 있다. 하지만 그 텅 빔을 가장 잘 반향하는 것이 곧 사운드임은 분명하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여기서 퍼포먼스는 연장된다. 퍼포머로 선택된 세 명의 무용가는 춤을 추기보다 사물에 가까운 포즈와 이동을 꾀한다. 음악 일부를 명상으로써 함입하는 제스처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퍼포먼스는 전시와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전시를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도록 유도하는 기제로서 퍼포먼스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을까. 
    사운드로만 충만한 전시(장)에서, 가시적인 것의 연장이 필요했을까. 반면 〈코어〉는 퍼포머가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 무언가를 듣는 법, 곧 전시 안에 있기의 방식을 지시하고자 한다. 퍼포머는 실시간으로 바뀌는(시선을 틀고 이동하는) 관객과 흐르는(선형적이며 동시에 단속적인 사운드의 공간에의 입체적 흐름에 따른) 공간 사이에 유영하며 어떤 동작을 펼쳐낸다. 이는 피드백적 관계의 공진이 전제된다. 거의 대부분의 요소가 빠진 전시에서 하나의 요소를 더하는 실험은 관객의 자유로운 배치를 유도하는 퍼포먼스의 형태를 통해 관객 스스로를 무대에 묶어 두는 실험으로 볼 수 있기도 했다. 중앙이 막혀 있어 사방이 통로로 기능하는 따라서 조망이 불가능한 공간의 특징에서 시간의 조경적 삽입을 통해 전시를 보는 법을 제시하는 것은 충분히 시험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그러니까 일종의 가이드가 퍼포먼스일 수도 있다.). 이러한 특성과 결부해 〈코어〉는 관객을 무대로 함입하기로 실천한다. 

    임고은, 〈아키펠라고 맵: 세 개의 고래-인간 동그라미〉 ⓒ박수환 [사진=옵/신 페스티벌 제공]

    대부분의 전시장에서 극장의 프로시니엄 아치의 무대와 객석의 층위 구분이 없다는 점―사실 그냥 평평하다는 점―은 퍼포먼스의 현장성을 부각하는 데 영향을 준다. 역으로 객석을 일시적으로 폐쇄하고 프로시니엄 아치의 무대를 하나의 극장으로 전유해서 퍼포먼스에 가까운 요소들을 활용―관객과 마주하며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거나 발화하는 등의 행위를 도입함으로써―하는 공연은 실험적인 시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반면 관객의 현존을 분명하게 구획하고 설정하는 공연과 다르게 애초에 전시의 퍼포먼스는 그 배치를 크게 고려하지 않거나 비워둔다. 이러한 주어지지 않음의 몫이 관객의 수행성으로 이어지는 부분도 있다. 임고은 작가의 〈아키펠라고 맵: 세 개의 고래-인간 동그라미〉의 경우 전시의 동선을 안내하며 분할된 장소들에 분포한 각각의 작업들을 ‘퍼포머’가 켜고 끄며 때로는 그것을 보도록 유도한다. 말이 없는 불친절한 도슨트이거나 (고래에 대한 이야기와 캄캄한 고래 배 속, 동시에 근대의 망각된 시간―고래가 포획되고 사라지던 시간―을 가리키는 내용적 차원 그리고 그 분위기의 연장에서) 신비한 매개자이거나 할 수 있는 이러한 존재를 굳이 퍼포머로 명명하는 것은, 그가 전시 자체를 작동하고 선취하는(그것은 작가에 의해 위임된 부분이다.) 유일한 공간에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일종의 규격화된 행위를 통해 불친절한 소통을 강행하기 때문이다. (그는 엄격한 시간을 수행하도록 하므로 퍼포머이다.)

    그는 관객의 모든 시간을 관할하는 일종의 말이 없는 도슨트나 엄격한 관람객 안내원을 대체하는 존재로도 볼 수 있지만, 퍼포먼스로 명명된 이동형 전시에서 내용과 별개로 그러나 매체의 조작자로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작가는 그를 작가를 대리해 작품을 통제하는 권한을 위임했지만, 그의 캐릭터성을 일부러 잡거나 그것의 반향되는 정도까지는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이 통제되고 엄격한 시공간의 틀 속에서 진행되는 관람 방식에서 전능한 권한을 가진 퍼포머는 이곳이 보고 듣고 보고 듣기 위해 이동하는 것만이 있음을 주장한다. 곧 결론적으로 전시를 전시로 다시 지시하기의 차원에서 퍼포머가 존재한다. 

    이 세 퍼포먼스의 양식은 앞서 언급한 퍼포먼스의 일반론적인 사례에서는 조금 예외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비교적 가까운 시일 내에 “퍼포먼스”의 이름으로 펼쳐진 사례들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퍼포먼스가 다양해지고 있음을 반증하기보다는 퍼포먼스가 어떻게 재인식되고 정의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자 한다. 오늘날 동시대의 퍼포먼스라는 매체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로 정의할 수 있고, 어디까지 또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전시를 어떻게 새롭게 구획하고 전시를 다시 쓰며, 전시를 연장하되 전시를 갱신할 수 있을까. 또는 해체할 수 있을까. 퍼포먼스의 일시성은 또 다른 아카이브의 필요성을 부르는 것일까. 

    전시의 이념

    전시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 전시 전경과 김방주 작가.

    만약 우리가 퍼포먼스를 보고도 그것이 퍼포먼스인지 모른다면 이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을까. 김방주 작가의 전시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는 일종의 퍼포먼스가 내재된 전시였다. 전시장에 자리하는 작가는 공간에서 1/N의 몫을 갖는다. 관객과의 거리 산정을 통한 관계 맺기는 다시 작가가 어떻게 관객과 함께 전시장에 머물 것이냐에 대한 응답이다. 작가는 작가의 사물에 부착되며 전시 동선을 제한하는 동일자적 관객인 동시에 전시장의 물리적 지형 자체를 인지하고 탐사하는 산책자로서 자리한다. 
    대부분 관람의 방식을 띠는, 따라서 공연화되는 전시상의 퍼포먼스가 아닌 관객이 들어오는 자의적 순간에 성립하는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전시의 외양을 재현하면서 그 자체의 고유성을 획득한다. 관객과의 일종의 게임에서 관객은 퍼포머의 자리를, 퍼포머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인지하지 못한다. 여기서 작가는 퍼포머로 자신을 분할하며 전시의 요소들을 관객의 곁을 통해 재인지한다. 따라서 앞서 대상화되는 데 불편함을 겪게 하는 작가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면 이는 작가가 작가로서의 지위를 일시적으로 속임으로써 가능하다. 

    작가와 작품의 분리를 지시하는 게, 작품을 만드는 시간과 전시장의 시간이 분화되는 게 일반적인 전시라면, 작가는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분리된 주체가 된다. 전시장에 들어온다면 작가는 보통 전시와 분리된 대상이 된다. 관객과 접면을 형성하기도 여의치 않다. 여기서 퍼포먼스가 그 매개체일 수 있을까. 김방주의 퍼포먼스는 특이하게도(?) 그 발신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수신에 대한 고민이 연장된 것에 가깝다. 작가로서 눈에 띄지 않게 작품 더하기를 구성하는 것. 작가의 움직임은 전시의 조망에 대한 시선을 방해하면서 전시장과 작업을 가장 자세히 파악하는 사람으로서 관객과 동화된다. 
    실제 작가는 장현준 안무가와 한 달여의 시간을 안무를 구성하고 체현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이는 전시의 시간을 이격시키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또한 전시의 예외적 스펙터클이 아니라 퍼포먼스의 시간을 전시의 시간과 합치시키기이기도 하다. 또한 위임과 아웃소싱의 방식이 아니라 퍼포머로서 작가가 관람객의 자리에서 자신을 체현하며 전시의 시간을 마지막 하나의 작업으로 연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예외적인 이 사례는 퍼포먼스의 출발점을 내재적인 차원으로 둔다. 이는 그 발화 방식과 연결된다. 

    아마도 다양한 퍼포먼스의 형태를 일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퍼포먼스가 없는 퍼포먼스로서의 전시 역시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퍼포먼스의 이념이 있는 게 아니라 전시의 이념으로서 퍼포먼스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퍼포먼스의 이념은 무엇일까.). 전시의 목적이 결국 시간과 존재의 경험을 짜는 것이라면, 또는 전시의 전달 방식―관객 모집을 위한 효율성이든 주제 의식의 강화이든―에 대한 고민의 연장이 결국 퍼포먼스라는 매체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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