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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명한 플랫폼’으로서의 공간
    Column 2021. 12. 4. 02:03

    부재하는 (기획의) 언어

     

    김민관

    어떤 여러 작가 혹은 아티스트를 모은 축제(페스티벌) 혹은 그룹전/단체전 형태를 생각해 보자. 하나의 어젠다 혹은 이념에 참여 작품들은 완전히 합치되거나 복속될 수 없다. 그것을 엮는 또는 꾀는 그러한 ‘시도’로서 이러한 이념은 작품 앞에 놓인다. 주로 물리적 장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마주치는 서문과는 다소 다른 이러한 말은 그 축제의 첫 번째 입구가 된다. 그 축제를 인지하는 정보가 된다. 그러한 종합의 언어는 왜 이 작품들이 하나의 이념으로 모였는지, 그리하여 이러한 이념과 결부되며 작품 해석의 또 다른 단초를 제시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작품이라는 실재가 있다면, 거기에 어떤 관점을 첫 번째로 부여하는 것이 이 기획의 언어이다. 
    이 언어는 작품들을 동시대적 언어의 차원에 재위치시킨다. 사실상 그러한 기획의 언어는 실재를 규명하는 언어는 아니다. 반면 그러한 언어가 없다면 실재들의 저장소로서 그 축제는 그다지 유의미하거나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 작품이 유의미하지 않거나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작품이 위치할 현재의 장소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기획의 언어는 적어도 그 입구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기획의 언어가 없다면, 굳이 개별 작품을 거기까지 가서 볼 이유가 없다. 기획은 발굴을 통해 어떤 레이어들을 새롭게 찾고 이념과 결부 짓는 행위이다. ‘큐레이팅’에 비견될 이와 같은 기획의 언어는 대부분 명확한 형태를 취하는데, 모호한 작업을 더 모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방식의 기획과 다른 기획의 언어 역시 존재한다. 사실상 그것은 그 언어 자체가 침묵함을 의미한다. 가령 기관에서 취하는 방식인데, 여기에는 기획의 언어도, 기획자의 존재도 드러나지 않는다. 작품들은 나열의 방식을 취한다. 다만 축제의 이름과 작가 혹은 작품을 나열한 멋들어진 하지만 의미는 없는 포스터는 존재한다. 이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건 그러한 외형을 만들 수 있었던 여분의 자금, 따라서 그 작품들을 모으는 과정에서의 어떤 논의와 사람들이다. 일반적인 지원제도 내의 카테고리로 묶이는 작품/작가는 사실상 그 지원제도에 그 작품들이 선정되었고 펼쳐진다는 외의 정보는 없다. 여기에는 1차적인 서류 정리와 2차의 아웃소싱된 ‘공정한’ 심사, 그리고 이를 정리해서 발표하는 3차의 과정이 선행되었음을 전제한다. 
    민-관 거버넌스라는 형태를 통한 실험은 그것과 조금 다른 결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축소된 스펙터클과 더 ‘젊은’, ‘아직 활동 경력이 많지 않은’ 작가들의 나열이라는 대상의 차이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장르나 매체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더 ‘개방된’ 원칙을 지향하는 탓에 전문성 자체는 사실상 더 의심되는 블랙박스의 영역에 놓이기 쉽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기획의 언어가 부재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공정한’ 심사가 지원제도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외부 아웃소싱을 하든 설사 내부로 돌려지더라도[각주:1] 마찬가지로 거기서 기획은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공모를 통한 방식은 작품의 나열 방식 이상으로 넘어가기 어려운데, 공모 자체에서 그 기획의 언어를 작가에게 온전히 이양했기 때문이다. 그 기획의 언어가 다시 홍보의 언어가 되고, 균열이 없는 작품에 대한 절대적 언어로 부상할 때 기획의 영역은 물끄러미 뒤로 물러설 수 있다. 작업자와의 관계는 작업이 시작되기 전, 더 정확히는 선택이 완료된 이후 표면적으로는 끝이 난다. 
    이러한 기획자의 언어 없음은 ‘투명한 플랫폼’의 이상으로 연장된다. 이를 개설하는 하나의 네이밍과 포스터면 된다. 사실상 더 많은 작업자에게 균등한 기회―1/N의 자본 할당―를,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는 공정성의 대의가 재단의 직접 지원 사업의 축소된 버전―소액다건의 방식―을 재현하고, 그 부족함을 완충하며 시스템을 적당히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 

    가령 이러한 모습이 구체화된다. 

     

    공간은 1/N로 구획되고 거기에 1/N의 작업 공간이 예술가들에게 분배된다. 평등함의 이상은 각자의 고립된 공간으로 실현된다.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의 커다란 무대는 없다. 각각의 사람을 위한 각각의 무대가 있을 뿐이다. 아니 이러한 무대는 간이/임시 개별 작업장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이제 공공기관 안의 예술가의 영토 이양이 실천되었다. 임시적인 공간 점유는 합법적으로 ‘허락’되었다. 


    《서울 바벨》 포스터. 2016, 서울시립미술관.

    이러한 예술가가 거주하는 예술의 장은 예술가를 위한 이상적 터전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제도적 공간이 기획의 언어를 제거하는 곳에서 예술가는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립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는 곧 관객의 소외를 창출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논란의 전시였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서울 바벨》(2016)을 떠올려 본다. 신생공간이라는 특성 자체가 아니라 신생공간이라는 이름만이 나열된, 서로의 닫힌 구획 안의 자율성을 시험하는 전시는 산재한 현장들을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간격 없이 재현한다. 신생공간에서의 발화가 ‘신생공간’이라는 발화로 옮겨지는 전시. “…대안적 공동체의 활동과 방식을 하나의 현상으로서 조망하기 위해 기획”되었던 전시는 “(현장의) 조망”을 통해 그 현장을 닫힌 그리고 닫히는 시공간의 질서로 구성한다. 

    제도가 추동하는 공평함의 이념은 곧 모두를 위한 것으로 열리면서 모두를 질서 정연한 분배의 과정에 복속시키며 그 바깥 없음을 만든다. 이 안에서는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자율성과 평등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투명한 플랫폼’의 이념은 이런 것이다. 


    예술이 시연되고 박제되는 곳. 이탈된 나머지 예술의 가능성을 대신해서 현장의 생명력이 작동되고 있음을 시연하는 곳. 예술의 언어를 기획의 언어로 전환하지 못하면서 그러한 예술들이 끊임없이 나열되는 곳.

     

    여기서 기획자는 행정가의 다른 이름을 가진다. 몇 시간의 할당된 회의와 과제 증명을 통해 임금을 받는, 그리하여 진짜 행정가의 일부 임금을 받으며 나머지 시간만큼의 자유를 존엄으로 가져갈 수 있는 반절의 노동자가 된다. 예술이 아닌 예술계의 현안을 고민하며 논의하는 시간이 계산된다.

    곧 지원제도 바깥의 예술을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려운 시기에 이르렀다면(이는 지원제도 바깥의 예술이 없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예술은 제도권 내에서 매개되거나 해석되거나 인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제 직접적인 자본이 아니라 간접자본, 곧 공간을 획득한 기관은 현장이 이곳에서 재현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예술가가 ‘또 다른’ 현장에서 작업하고, 이는 예술이 실천되고 있음을 충분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갱신되는 하나의 기념비다.
    사실상 민관 거버넌스라는 체제가 추동한 각종 회의의 구조는 민주주의적 의사 수용 시스템을 지향하지만, 실은 구심점 없는 목소리들의 향연을 이룬다. 내부 회의록으로 갈음되는 회의는 편집점을 갖추지 못한 말들의 더미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증빙용 서류로 쌓여 나간다. 이러한 서류가 회의 수당이나 자문료로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담론이 구성될 것이라 믿는다. 1/N은 돌아오는 길에 회의한다. 동시에 짧은 시간 용돈을 벌었다는 뿌듯함이 인다. 

    “예술청 창작소 공간실험 프로젝트 《텅·빈·곳 새집의 모양》 쇼케이스”는 투명한 플랫폼의 이상을 잘 구현한다. 공간은 예술가를 위해 열려 있으며, 예술가의 작업은 각각의 새집 안의 모양으로 수렴한다. “새”는 물론 예술가를 함의한다. 나아가 이곳이 “새집”을 지을 수 있는 공간임을 함의한다. 그 바깥에는 또 다른 “조망”이 있을 것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기획의 언어가 나타나지 않아도 너무나도 명확한, 매우 깔끔한 네이밍이다. 
    행정가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특별한 누군가의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예술가의 정체성 역시 그럴 수 있다. 그 두 개가 절합되는 지점에서 어떤 특별한 예술로서의 행정의 언어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각주:2] 반면, 민-관 거버넌스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수행하는가. 수행할 수 있는가. 공평함의 분배와 합치되는 지원제도의 스펙터클을 연장하면서, 조금 더 따뜻한 언어로써 행정의 언어를 번역하며, 예술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예술가와 불화하거나 적대하지 않기 위해, 행정가의 투명한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예술가와 분리되며, 결국 예술과도 분리되며 1/N의 예술들의 ‘나열’이 시작된다. 이러한 나열만이 있는 기획에서 소진되는 건 정작 이를 기획한 예술가다. 도대체 이러한 기획을 통해 무엇이 남는가? 
    예술은 사실 공공을 설정할 수 없다. 공공의 분할을, 공공의 간격을 구성하고 가시화할 뿐이다. 공공이라는 개념을 재위치시키려고 의도할 뿐이다. 그러니 애초에 예술가가 모두를 위한 이상적 공공성을 고민하며 공평하게 예술가를 위한 투명한 플랫폼을 설정한다는 역할을 관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은 딜레마였을 수 있다. 사실상 이 안에서 관객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 여기에 어떤 현장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기획의 언어가 살아나야 할까. 

    《텅·빈·곳 새집의 모양》 포스터. 2021, 예술청.

    《텅·빈·곳 새집의 모양》에 대한 어떤 자료도 홈페이지나 웹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사실 아카이브의 차원을 잘 고려하지 못했다의 차원보다는 결국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고 관객과 만날지를 아예 배제했다는 혐의에 이르게 한다. 거기에는 애초에 새집만이 있었던 것이다. 곧 새집이라는 타자화와 그 바깥 관객의 또 다른 타자화가 있었던 것 아닐까. 행정의 모든 것들은 포퓰리즘적으로 돌아간다. 예술가를 위한다는 정책은 예술가-친화적으로 모든 것을 변혁해 나가려 한다. 예술가를 행정의 반쯤의 주체로, 재현된 현장으로 초대하고 포섭하려 한다, 자꾸만. 그것이 투명한 나열이 아님은 분명하다. 투명한 나열이 기획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 역시 분명하다. 거기에는 예술의 언어가 없다. 단지 행정의 언어, 기계적인 언어만이 있을 뿐이다. 


    p.s. 이 글은 《텅·빈·곳 새집의 모양》의 정보 없음[각주:3], 그리고 아카이브 자료의 확인할 수 없음에 대한 경험이 누적되며 출발하게 되었지만, 이 행사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이 행사를 주최한 예술청[각주:4]의 공간에 한정 지으려는 것 역시 아니다. (“행정 기관”을 뜻하는 “-청(廳, agency)”은 왜 곳곳의 이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아가 민-관 거버넌스로 이뤄지는 모든 형태, 그리고 그것이 연장되는 현재의 공간들에 대한 언급이다. 

     

     

    1. 1. 전문성의 부족에 대한 대안이거나 잔혹한 심사를 모두에게 전가하기 위해 동료심사제가 동원될 수도 있다.  [본문으로]
    2. 2. 새로운 정체성도 생겨난다. 여러 민-관 거버넌스를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 또는 그것만을 수행하는 존재. 노트북을 갖고 바쁘게 옮겨 다니며 일의 영역을 분할하고 적당한 에너지를 분산 투자 하는 행위로써 삶을 살아가기, 그와 같은 모습은 기존의 예술가 상과 어떤 차이가 있다. 문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예술과 관계된 일의 층위가 전도된다는 것인데, 그의 본 정체성인 예술가는 부차적인 것이나 부연적인 것이 되며 나아가 작업이 일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 3. 출처=https://sap.sfac.or.kr/?s=%ED%85%85%EB%B9%88%EA%B3%B3&et_pb_searchform_submit=et_search_proccess&et_pb_include_posts=yes&et_pb_include_pages=yes [본문으로]
    4. 4. 엄밀히 “서울”예술청으로 명명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부분의 제도 예술은 서울에 있다. 둘째, 보편명사로서의 ‘예술’청 역시 (어떤 성찰 없이) 서울에 위치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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