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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 미인,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 예술가의 그늘을 비추다
    REVIEW/Theater 2021. 12. 1. 01:15

    극단 미인,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 공연 모습(이하 상동)

    예술이 노동인가의 질문으로 시작한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인간의 유희에 대한 본능과 일상의 잉여 짓에 주목하며 예술의 범주를 일상으로 확장하려 한다. 곧 예술이 예술가 고유의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것임을 지시하는 것으로써 예술의 고립된 영역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며 예술가의 현실/법적 소외 또는 예술가의 예외상태에서 우리 모두 예술적 인간이라는 인식의 지점으로 도약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매개자로서 예술가들은 담론을 나르고 그것을 상호 간의 몸으로 분배하는 자리를 가져간다. 
    영화 〈모던타임즈〉를 인용하기도 했지만,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톱니바퀴처럼 얽혀 들어가며 역할 간의 바통터치로서 분배, 말의 나눔과 움직임의 원환을 구성하는 놀이를 규격화해 수행한다. 마치 노동을 하듯 이러한 놀이는 질서를 갖고 빈틈없이 이행된다. 여기서 서울청의 중앙 테이블과 그 옆의 벤치 등의 중앙 지형지물을 비켜나가며 회전의 반경을 그리며 입체적으로 관객을 둘러싸는 전략의 연장에서 속도와 간격의 정합성이 한층 부각되게 되는 부분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마 간과될 수도 있을 배우로서의 역할은 실제 자신의 경험을 무대에 부단히 나열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적 분배가 전제된 가운데, 보편을 향하며 그것에 파묻히는 한 개인의 사례로 수렴한다. 배우들은 하나의 주체라기보다 노동을 기록하기 위한 노동을 하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닌 또 다른 수단으로서의 노동을 실천한다.[각주:1] 그것은 극단에서의 임무가 바깥으로 연장돼 무대로 들어온 결과이다.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의 수행성은 다름 아닌 배우들을 노동자로 임하게 하는 데에서 직접적으로 온다. 
    배우들은 브이로그 식으로 이곳저곳에서 아르바이트 하나씩을 선택해 진행한다. 이는 적성과 개성, 취미와 결합되지 않은 순전한 일로서 재현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어떤 대중의 삶의 표피를 재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과 예술의 분리적 심급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되게 되는데, 중간에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자동화 사회』를 요약하는 발표를 경유해, 앎을 향해 나아가는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에 의해 그러하다. 이를 통해 노동과 예술이 하나의 경로로 묶이는 지점을 상상할 수 있다. 반면 이러한 이야기는 대중의 이데올로기와는 쉽게 통합될 수 없는 지점에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가 주체에 대한 심문에서 대중을 예술적 인지 주체로 만들려는 시도로 나아가는 공연은 예술이 우리 일반의 삶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소환한다.

    따라서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의 결말은 다소 낭만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노동과 예술의 구분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그것이 의식적이든 (아마도 예술가 대부분에게 해당할) 무의식적이든 그런 예술가의 고민하고 있는 위치 자체를 열어젖힘으로써 그 위치의 곤궁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런 결말은 예상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술가의 예술 너머의 의제가 아니라 일반 대중의 예술로서의 의제를 선취하는 부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거꾸로 이런 자기 점검의 혼란상에 다가가려 한다는 점에서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이 가진 참신함 역시 있다―어떤 형식이나 주제 자체, 여러 매체의 도입이 아니라.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표면적으로 뉴다큐멘터리 연극의 특징이 다분하다. 노동에 대한 질문과 배우들의 경험, 인터뷰(영상), 스터디가 극으로 들어온다. 앞선 분배의 노동적 몸짓은 극의 활기와 원활한 전환의 차원으로 물론 볼 수도 있다. 반면 극의 주제에 맞춰 예술을 노동으로 치환해 생각해보는 것 역시 가능하다. 배우의 행위는 배우 자신의 경험을 경유함에도 아르바이트의 경우 유형학적 분류의 차원이나 클리셰의 어떤 일용 직업군들에 대한 예시로 수렴하면서, 개별적 고유성이 지워지게 됨은 앞서 언급한 바다. 한편으로는 내 일(=직업)의 전망이나 내일 나(=예술가)의 위치를 가리키는 제목은 위기 상황 속에 있는 예술가, 더 직접적으로는 배우들 스스로를 향한다. 

    구체적으로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프랑스의 예술인 복지제도인 ‘앵테르미탕’의 예시를 들고, 국내 역시 예술인 고용보험이 들어오고 나서 예술이 본격적으로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알리고, 어떤 배우 역시 예술인의 노동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 자료로서 예술 작업을 몇 건 쌓았는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는 스티글러의 긍정적 미래에 한발 다가선 것임에도 배우에게는 긍정적인 현실을 가리키기보다 뭔가 어색한 개념을 입은 듯한 어정쩡한 수용의 자세로 연결된다. 
    나아가 스티글러의 이론에서 기계가 인간의 자동화된 노동을 대신하고, 그 상반된 노동으로서 앎을 추구하는 일에 전념할 때, 유용 가능한 자본의 유무, 경제 공식과는 상관없는 예술 행위를 그 자체로 작업으로 나아가 경제의 가치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가능할지 등이 미지수라는 점에서 공연은 묵묵해진다. 따라서 공연은 해묵은 예술과 노동에 관한 여러 의제를 던지면서, 그에 관한 정보 전달, 질문, 목소리 등을 삽입하며, 예술가와 대중의 시선 사이를 다채롭게 오가며 예술(가)의 현실에 다가서거나, 고립된 예술을 벗어나 사고 실험을 통한 예술적 주체의 성장을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결말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술과 노동에 대한 기존의 의제 자체를 크게 확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안긴다. 공연은 ‘예술은 특별한 노동이다.’에서 모더니즘 예술의 협소한 범위를 벗어나는 데로 나아가지만, 예술 바깥에서 예술을 직시하는 것으로 향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이런 지점에서 삽입되는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나 이택광 교수, 강영민 작가 등의 말이 있다. 동시에 배우들은 각자 한 명씩의 사람을 상대하며 이를 버바텀으로 싱크를 맞춘다. 여기서 특이한 지점은 자연 배우가 그 사람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성심성의껏 따라 한다는 데 있다. 객석에서 웃음의 효과를 가져오는 이러한 부분들은 버바텀이 주가 되기보다 각 존재가 지닌 말의 이념과 정동을 연기적인 부분의 재현 양식의 기술로 수렴시키는 부분이 크다. 곧 이런 행위조차 노동의 일부로 느껴진다. 연기라는 기술(技術)을 기술(記述)하는 부분은 곧 노동자로서의 예술가 양식을 보여주는 일단일 것이다.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드라마의 서사 대신, 다양한 리서치를 통한 자료의 가공 및 브이로그 형식의 배우들의 영상, 인터뷰 삽입 등을 통해 오늘날 예술과 노동에 관한 사유를 구성하고자 한다. 그 한계와 가능성 모두 현재의 발화라는 지점에 있다. 아마도 주체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발화, 그것이 만드는 특별한 지식, 또는 기존 지식에 구멍을 뚫는 균열 같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식의 주체화, 타자의 언어를 체화 또는 체현하는 것 역시 쉬운 과제는 아니다.[각주:2] 
    따라서 버바텀의 동기화 양식은 다큐멘터리 연극이 갖고 있는 주체의 타자의 함입의 어려움을 아이러니적으로 보여준, 따라서 예술의 형식으로는(메타 연극적 차원에서) 가장 신선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배우는 배우로 환원되는 이런 광경에서 조금 더 나아간 주체의 양식으로서 발화 역시 가능할 수 있을까. 〈내 일의 내일, 내일의 내 일〉은 예술과 노동에 대한 담론을 구성하는 것과 함께, 뉴다큐멘터리 연극에서 배우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 역시 구성한다. 이 공연에서 배우의 ‘앎’은 무엇일까. 그런 솔직한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은 욕망도 생겨난다. 곧 가능성과 한계가 질문과 지속의 이후로 이어지길 기대하며.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1년 11월 14일 (일) 오후 3시

    공연 장소: 예술청

     

    공동창작/출연

    강해진, 곽지영, 권덕일, 김선경, 김태우, 이경우, 장시현

    연출/구성  김수희

    조연출  김영락, 조영

    무대감독  김요한

    구성협력  전강희

    무대미술  김혜림

    음악  베일리홍

    조명  박그림

    안무  이재영

    영상제작  유니온씨

    사진  윤현태

    그래픽  보통현상

    기획  이정은, 한민주

    1.  1. 뉴다큐멘터리 연극에서 배우는 때로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주체는 변경되거나 변화한다. 여기서 배우는 기존의 자아를 관성적으로 고수하는 게 아니라 과정을 통한 자기 성찰과 자기 질문을 가진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이 쉬운 것이 아님은 분명한 듯 보인다.  [본문으로]
    2.  2. 극단이 갖는 통일성에 대해 평소 의문이 든다. 이는 공동창작의 방식에서도 각 주체의 발화 사이의 간극과 균열, 매끈하지 않음이 아닌 통일된 양식하의 발화와 리서치의 규격을 통일하는 어떤 재단이 느껴질 때 이는 양식적 완성도로 봐야 할지 결국 일자와 다자의 관계가 펼쳐진 결과일지를 고민하게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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