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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가슴의 발레리나〉: 가슴은 어떻게, 무엇을 발화하는가
    REVIEW/Theater 2021. 12. 30. 01:09

    〈큰 가슴의 발레리나〉 ⓒ한정민(이하 상동). 서 있는 바르블린 역의 원채리 배우, 앉아 있는 왼쪽의 덱스트르 역의 신문영 배우, 그 옆의 시니스트르 역의 노기용 배우.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베로니크 셀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해 연극으로 만든 것이다. 베로니크 셀이 실제 고전 발레와 라반의 메소드를 모두 경험한 이라는 점에서, 발레에 대한 일반 사람의 판타지 차원의 상징적 의미 이상으로 메타-발레적 접근이 눈에 띈다. 가령 발레를 예술의 시대적 문법 아래 구분하는 것이 그러하다.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구분, 그리고 실제 주인공인 바르블린 블랭의 고전발레에서 저드슨 댄스 씨어터로 넘어가는 삶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무대라는 환영과 현실의 격차를 무대 위 발레리나의 활공과 구체적인 서술의 차이로 구성하며, 극적인 대비 속에 전개한다. 발레리나의 움직임은 무용 그 자체의 실시간 전개보다는 그 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서술하는 장면의 차원에서 삽입된다. 바르블린 블랭의 원채리 배우 외에 바르블린의 오른쪽 가슴 덱스트르 역의 신문영 배우, 왼쪽 가슴인 시니스트르 역의 노기용 배우가 출현하는데, 다른 두 명의 배우는 바르블린의 분신이라기보다는 독립된 위상으로 존재하며 서로의 회화(會話) 층위를 지닌다. 곧 이 둘은 분리된 독립적 인격으로 발화하지만, 그 말은 바르블린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며 바깥이 아닌 서로로 수렴되며 닫힌다. 나아가 이 둘은 바르블린의 현실을 서술하는 역할을 맡는다. 사실 바르블린이 움직이면,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 모두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이는 그 앞의 응당 있어야 하는 위치가 아닌, 바깥쪽으로 또는 사선으로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잉여물적인 성격을, 또는 그 부속적인 성격에 대한 반동적 의식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듯 보인다. 

    바르블린은 장이 넘어갈 때 이를 주로 장들을 지정하는 서술 층위를 담당하고, 마지막 장인 9장의 서술에서 온전한 끝맺음을 할 수 없음에서 이 현실 전체를 서술하는 저자로서의 지위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데, 〈큰 가슴의 발레리나〉에서 두 가슴은 가슴이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납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발레리나의 이상에는 적대적인 물질이 된다는 점에서, 바르블린의 현실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확장을 주장한다고 할 수 있다[각주:1]. 곧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통해 가슴의 사이즈를 줄여나가는 바르블린의 행위로부터 생존과 삶의 위협을 겪는 두 존재는, 익사의 위기에서 병원에 실려 나간 바르블린에게 의사의 주사 처방으로 인해 다시 삶의 기회를 얻게 됨을 ‘강조’해서 표현한다.

    이러한 강조는 이 두 존재가 각각의 서술 층위를 획득하는 비현실적 서사의 전략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비현실성은 양쪽 가슴이 주권을 가지며 가슴의 물리적 성분과 구성에 관한 과학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의 서술의 인지적인 흥미로움은 무대 위의 쌍생아로서의 독립적인 움직임, 그리고 인간에 대한 바깥에서의 객관적인(?) 서술 층위 등과 같은 독자적인 주권 설정에 따르며, 그중에서도 움직임의 측면은 발레의 그것과 발레가 아닌 또 다른 부수적이고(반면 예외적이고) 미시적인 움직임으로서 두드러진다. 이러한 가슴의 독자적인 서술 층위는 그 발화의 입체적인 움직임으로의 구성의 심미성은 물론, 그 가슴의 서술 층위에서 발레리나의 움직임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실루엣으로서의 배우의 타자성이 강조되거나, 발레리나의 바깥으로 확장되거나, 또는 완전한 3인무로서 연장되기도 한다.

    양 가슴이 바르블린과 하나의 안무를 이루는 이상적 광경, 곧 바르블린이 무대에 섰을 때의 장면은 “아름다움”의 이념 아래 나머지 둘 다 그에 합치됨을 보여준다. 손바닥 치기로 펼쳐지는 발레는, 토슈즈로 신은 발을 들고 내리는 등의 부분 동작을 클로즈업으로 재현한 셈이다. 더 빠른 속도와 밀도로써 발레는 일정하게 지속할 수 있다. 동시에 각기 다른 의미에서의 환희에 찬 바르블린―무대 위에서의 연기와 무대에 섰음에 대한 벅참―과 두 가슴―이러한 움직임이 펼쳐질 수 있음과 동시에 이러한 움직임에 내가 속할 수 있는가의 놀라움―의 표정 역시 클로즈업된다.

    순전한 발레의 표현이 아닌, 발레라는 동작을 지시하는 연극적 재현 방식은 신선한 움직임 구성의 아이디어를 또 연극의 무한한 재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발레의 대체재이기도 하지만, 발레를 서술하고 변환하며 발레를 언어화 또 기호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손지민의 안무는 이전 다른 작업에서처럼[각주:2] 연극의 언어 사용과 ‘함께’ 움직임이 가동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움직임이 언어의 부수적인 차원이 아니라, 언어로 움직임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구성하는 듯 보인다―‘움직임이 주도적으로 나오면서 언어화된다.’

    바르블린이 소설을 주로 완성해 가지만, 후반에는 덱스트르 역시 “장”을 서술로써 완성해 나간다. 바르블린은 운명의 위기를 여러 번 겪는데, 여기서 바르블린은 자신의 운명을 서술할 역량을 갖지 못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큰 가슴”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는 고전 발레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몸에 부합하지 못함으로써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자신의 가슴의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결단, 곧 일종의 가슴 축소 수술을 한다거나(이는 위기의 전환을 위한 시도라는 긍정성을 갖지만, 결국 가슴 큰 발레리나를 수용할 수 없는 모더니즘 예술의 폐쇄성이 강제하는 신체의 재단이라는 끔찍함으로 인식된다.) 섹스를 통해 임신하는 것까지 예술과 삶의 불연속적, 불합치적 관계 속에 우연히도 가슴이 놓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큰 가슴은 죄가 없다.’

    여성에 가해진 여러 억압 기제, 그것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외부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숙명’으로 분류된, 여성으로서의 성적(sexual) 상징이나 임신으로 연장되는 성별(sex)로서의 생리적 기제로 “가슴”은 순수한 기능을 떠나 그 의미가 확장된다.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바르블린 인생 전반의 굴곡진 삶의 드라마를 강조하기보다는 특정한 장르, 제도의 예술가의 삶과 여성으로서 그 삶에 더욱 주목한다. 또한 이 삶의 순간순간을 반영하는 차원에서 무대 자체의 형상화 역량에 비중을 두고,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바 있는데, 여기에는 연극의 독자적 생명력과 표현의 다양성에 의한다. 
    마지막에 바르블린의 스포트라이트가 그리는 바닥의 원형 그림자는 애를 낳고 꺼지며 밋밋한 바닥이 된다. 일종의 환상으로서의 예술과 생략되며 흐릿해지는 지난한 현실의 대립은 〈큰 가슴의 발레리나〉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예술의 환락과 예술가의 비애 사이의 간극을 내버려 둔다. 가슴이라는 비체의 가시화 전략은 여성만의 서사와 발레리나의 삶을 해부하듯 세밀하게 제시하면서 나아가 양 가슴의 존재화를 통해 무대에서 가장 흥미롭고 인상적인 광경으로 전유된다.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페미니즘 서사와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성찰과 함께 생체학적 탐구로서의 지식 서사, 비체와 같은 주변부적인 존재의 자기 발화를 통한 예외적인 세계관의 제시 등과 같이 흥미로운 요소들을 무대로 연장한다. 따라서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다소 허무한 결말과 그로 인한 공허함의 정서가 어떤 사유나 발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원작을 선택한 합목적성, 그것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대의 언어로 옮긴 것의 적절함 모두를 긍정할 만한 작업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출연: 노기용, 신문영, 원채리
    기획: 박은호
    각색/연출: 심지후
    조연출: 김수려
    드라마투르그: 장지영
    움직임연출: 손지민
    조명: 신동선
    음향: 임서진
    그래픽: 황가림
    조명오퍼레이터: 한정민
    원안: 베로니크 셀

    우린 살면서 많은 걸 이루지 못합니다. 내 몸이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고, 간절한 바람은 잘 실현되지 않지요. 날 용서하는 건 쉽지 않고 좋아하는 건 지나치게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잠은 자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요. 그렇게 살다보면 가끔은 내 꿈이, 괴로움이, 노력과 이 시간들이 어디로 사라지고 없어진 건가 싶기도 하지만요.
    덱스트르와 시니스트르는 그냥 그럽디다. 
    “살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1. 1. 신체의 언어로써 가시화되는 부분적 신체의 의식화는 예전 정진새 극작, 연출, 극단 문 제작의 〈브레인 컨트롤〉에서 뇌 내 작용으로서, 인간의 행동 이전에 여러 주의와 이념을 가진 뇌의 부분들이 각각의 주체로 가시화되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본문으로]
    2.  2. 연극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에서 손지민이 움직임을 맡았다.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모든 장면과 말에 새삼 움직임을 집어넣은 안무의 영역”, “말을 재현하거나 간단한 동작을 율동처럼 덧붙이는 게 아니라, 말의 결을 따라 말이 나오는 경로를 따라 움직임은 말의 길을 만든다. 말은 움직임의 여지를 만드는 차원에서 중간중간 단락된다. 대사의 비중만큼 움직임의 비중이 있다.” https://www.artscene.co.kr/176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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