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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丙소사이어티, 낭독극 〈물 불 흙 공기〉, 서사를 생성하기
    REVIEW/Theater 2021. 12. 30. 01:26

    丙소사이어티, 낭독극 〈물 불 흙 공기〉 공연 전 무대 광경 [사진 제공=丙소사이어티]


    〈물 불 흙 공기〉는 메타-서사를 가지고 읽고 투사하고 수행하는 메타-연극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 불 흙 공기〉가 낭독극으로 열린 이유보다는 낭독극이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낭독극은 보통 보면대에 대본을 놓고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물 불 흙 공기〉 역시 그러하다. 낭독극에서 배우는 이 낭독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닐 테고, 낭독극을 하기 위한 낭독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닐 것인데, 따라서 이는 이미 머릿속에 대부분 입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나아가 말하는 부분과 페이지의 글자를 맞추기 위해 대본을 봐야 하는 입체적인 행위의 설정이 필요하다. 또는 낭독극을 하는 외양을 재현하기 위해 대본을 중간중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최소한의 무대 혹은 빈 무대를 대본의 발화로의 옮김만으로 채운다는 것은 낭독극의 과정적 진단(목적)과 경제적 효율성(실행의 조건)이 결합해 낭독극을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극 외에의 부대 요소들, 가령 영상이나 음악의 적용, 그리고 이미 다 물리적으로 채워진 무대, 그리고 대본과 떨어져서 무대 위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들로 구성된 〈물 불 흙 공기〉의 경우, 거꾸로 최종 마감 직전에 대한 일종의 변명으로서 “낭독극”을 붙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 불 흙 공기〉는 끝나지 않는 서사로서 인류라는 존재의 보편성과 직결되는 서사의 영원성, 또는 공연에 주요하게 놓이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로 흘러가는 익숙한 곡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의 전개방식처럼 비약과 절합을 통한 서사의 무한한 연결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대본은 (앞서 언급한 낭독극의 외양을 위한 구실이면서) 연극의 원형적 서사의 메타포이자 그 담지물로서 무대에 놓인다. 서사의 작동은 하나같이 서사의 인공물로서의 측면을 가리키고 서사의 기원을 다시 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고인 물”로 지칭되는 세탁기의 발화는 처음 관객과 같이 무대 정면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앉은 두 배우의 발화와 상호작용하며 출현하는데, 이 둘―빨간 사과와 노란 바나나라는 각각의 메타포에서 연장되는 “불” 외에 “물”도 겸하는 송하늘과 “흙” 역의 권형준―은 이야기를 중재하고 지속하게 하는 매개의 역량을 지닌다. 수십만 번의 회전이 모두 같지 않다는, 일종의 속류-‘차이와 반복’ 버전을 만드는 그의 말 이후, 반복에 대한 여러 논의가 발생하는데, 시간은 흐르고 있고, 자연은 유동적이므로 같은 강에 발을 담그는 두 번의 행위가 반복이 아니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앞선 논의는 변질(?)된다. 그러한 변질만이 이야기의 진정한 속성이고 힘이라는 것을 또한 〈물 불 흙 공기〉는 가정한다고 보인다.

    세탁기의 사회(司會)에 의해 본격적으로 둘은 토론을 하게 되는데, 과거의 이야기와 미래의 이야기의 대립으로 갈음되는 “흙”과 “물/불”의 토론에서, “흙”의 입장이 완벽한 과거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고수하며 하나의 정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라면, “물/불”의 입장은 새로운 것은 발견될 수 있고, 그러니 미래의 이야기를 향해 가고자 한다는 가능성의 차원으로 이야기를 붙들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둘의 의견 모두 분명한 결함을 내포하는데, ‘나아감’의 차원, 곧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의 숙명 차원에서 세탁기는 “물/불”의 손을 들어준다. 
    이야기는 고귀한 진본이나 완결된 원본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야기는 비틀릴 수 있고, 비틀거릴 수도 있다. 비약할 수도 있고 비논리적일 수 있다. 〈물 불 흙 공기〉가 원본이 아닌 이야기의 원형, 아키타입의 형태까지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보편적 형태보다는 오히려 각 존재자의 위치성, 더 나아가서는 개별적 무의식에 따른 이야기의 생성이 있음만을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공룡의 얼굴을 한 척척박사를 보는 “불”과 척척박사의 얼굴을 한 공룡을 보는 “흙”―아마도 기억의 오류로 인해 “불”과 “흙”의 위치를 바꿔야 할 수도 있다.―이 술래잡기인지 숨바꼭질인지 모를 게임을 영원히 하고 있는 풍경.’ 이것이 바로 〈물 불 흙 공기〉가 구성하는 이야기의 원형이다.

    공룡이 인류의 탄생 전의 시원적 캐릭터로서 이야기의 원형이 된다면, 척척박사는 무지와 미망으로부터 탈출구를 주며 미래를 움켜쥘 수 있는 이야기의 미래가 된다. “흙”과 “물/불”의 극단적 지향 사이에 아마도 이야기의 끝없는 생성이 있을 것이다. 1장(원질료 Materia Prima)에서 4장으로 진행되는 〈물 불 흙 공기〉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수행하고 지속하며 종결하는 기승전결의 서사의 기본적인 흐름을 갖는다. 반면 3장(투사 Projection)은 모든 무대를 접고 비우며 4장(결, 생명을 불어넣기 Conclude)에는 빈 공간과 침묵만을 보여준다. 극을 일종의 대본, 희곡으로 갈음하는 영상의 자막이 가진 역할은 그처럼 충만한 텅 빈 서사를 만들어 낸다. 이야기는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이야기는 글자에 갇힌다. 어떤 것도 제시되지 않는 무대는 그럼으로써 실재가 된다. ‘막’이 닫히고 커튼콜 직전에 무대가 실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반면 그 비워진 무대 뒤에 두 배우가 인사를 하러 나오는 커튼콜을 치름으로써 이 닫힌 무대는 가시화될 수 있다―다시 닫힐 수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가짜인가. 가상의 어떤 효과인가. 〈물 불 흙 공기〉는 메타 창작의 서사를 전개한다. 이야기가 성립하는 몇 가지 방식들이 출현한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는 무대에 놓인 소품들, ‘사과(실재/그림)-바나나(실재)-기차(모터 달린 모형 기차)-백두산(사다리를 두 다리로 세워 둔 것)’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함께 무대 위의 오브제를 지시하는 수행이 따라 오는 즉물적 재현 방식은, 언어의 연상 작용의 생성 과정을 나타낸 것이자 무대를 이야기의 단위로 재편한 것이다. 

    〈물 불 흙 공기〉는 ‘태초의 극장’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극장의 생성’을 기원하며, 이야기의 죽음 뒤에 발생할 수 있는 이야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야기의 완성보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출현하는 ‘틈새’를 찾는 것, 죽은 이야기를 돌파하는 출구를 찾는 것을 이야기로 한다. 따라서 별다른 이야기는 없고, 이야기에 대한 허무맹랑한 잡설이나 지나치게 언어 유희적인 욕망이 넘실거린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가리키는가. 

    “신세계”라는 브랜드가 적힌 박스의 “DUTY FREE”라는 문구는 ‘의무가 없는’ 이야기의 자율적 힘이 통용되는 ‘신세계’ 정도로 번역된다. 극장에 놓인 상품의 박스들은 물론 자본주의와 현대 문명의 이기를 상징한다. 〈물 불 흙 공기〉는 이를 컨텍스트로 직접 삼지는 않는데, 대신 영상을 통해 공장에서의 대량 생산의 광경을 보여준다. 3장에서 무대가 해체되는 순간, 좌에서 우로 크기순으로 도열된 박스들은 차곡차곡 가장 큰 박스로 수렴하는데, 〈물 불 흙 공기〉는 상품이 아닌, 곧 사라지고 마는 ‘공기’ 같은 이야기들을 쓰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자본에 직접 대립하거나 대항하기보다 이를 전유하고 사용하는 방식에서 이를 탈구시킨다―세탁기나 냉장고 역시 각각의 빈 해당 박스 표면에 선분들로 그 외양을 재현한 것이다. 본문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은, 제목에 포함된 “공기”는 4장의 가장 큰 주체이며, 이야기의 어떤 힘이자 비가시적 효과에 대한 말해지지 않은 메타포일 것이다. 그리고 ‘빈’ 무대로써, ‘빈’ 단어로써 나아가 ‘빈’ 의미들로써 〈물 불 흙 공기〉는 무대를, 연극을, 이야기를 “낭독극”이라는 형식으로 구성한다. 그것은 연극보다 조금 더 전위적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낭독극 <물 불 흙 공기>
    공연 일시: 2021.12.28(화) ~ 12.30(목) 저녁 7시 30분
    공연 장소: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
    관람연령: 만 14세 이상 관람 가능(2007년생 이상)
    출연: 흙_권형준, 물/불_송하늘
    주최·주관: 丙소사이어티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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