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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윤화/정이지, 〈이곳에선 모든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 이미지를 놓는 법.
    REVIEW/Performance 2022. 1. 20. 00:49

    양윤화/정이지, 〈이곳에선 모든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2022). 실제 퍼포먼스는 주최 측에 의해서 영상이나 사진 등으로 기록되지 않음이 의도되었고, 이는 글이라는 매체로의 변용으로만 기획되었던 반면에(“그 어떤 기록물로도 남지 않을 이 전시/퍼포먼스는 추후 이미지 없이 상상할 수 있는 글로 정리되어 배포 된다.”), 현장에서는 이를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기록하는 관람객이 속출했다. 기획의 의도와 현장에서의 즉흥적인 기록의 욕망은 충돌하기보다 평행한 채 나아간다고 보인다―이 글과 사진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의 차원은 정이지의 작업을 양윤화가 변용하는 방식과 같이, 이 전시/퍼포먼스에 대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곳에선 모든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양윤화 작가가 주로 두 개의 캠코더를 양손으로 들고 이동하며 벽면에 프로젝션하며 두 개의 영상 이미지[각주:1]를 교차하고 접합하는 과정의 변주로‘만’ 이뤄진 퍼포먼스이다. 여기에 내레이션과 배경음악이 라이브 스트리밍된다. 두 대의 캠코더에 들어 있는 이미지는 각각 정이지 작가의 드로잉과 회화로, 명확히 가늠할 수 없는 선분과 색채로 이뤄진 회화와 옆모습이 그려진 얼굴 드로잉으로 구성된다. 

    영상은 자체적으로 이미지와의 거리를 조정하는 구성 외에도 개입을 선취하는데,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찍는 아마도 동일한 기종의 캠코더로 추정되는 카메라의 조절이 의식적으로 이뤄지는 한편, 가령 여기에 그림 옆에 손이 드러나는 것이 더해지는 것이다. 곧 정이지의 이미지를 양윤화는 유동하는 사물-이미지로 풀어낸다. 이는 퍼포먼스로 현장에서 조정/조율된다. 구체적으로는 벽면과의 거리를 통해 영상의 크기를 조절하거나 공간 전체에 이미지를 자의적인 이동으로, 동시에 공간과 정합적인 이동으로[각주:2]를 편재시키기도 하는 작업같이 스텝을 주축으로 한 물리적 분포에 따른 이미지의 이동, 그리고 두 개의 영상을 교차시키며 경합하는 두 개의 이미지로부터 배경과 형태의 또 다른 경계가 생겨나는 손의 저울질을 활용하여 조금 더 정교한 미시 조종을 통한 이미지의 가공이 이뤄지는 절차가 퍼포먼스로 나타난다. 

    ‘조정’ 혹은 ‘조율’은 이미지를 뒤따르는 관람객과의 거리를 퍼포머가 신경을 써야 함을 의미한다―그 역도 마찬가지인데, 관람객은 이미지의 경로와 확장된 면적에서 비켜나기 위해 운신의 폭이 한층 좁다. 여기서 퍼포머의 주의는 관객을 향해 있지 않은 채 발현된다. 결국, 공간에의 한계에서 비롯된 이러한 주의는 영상과 공간이 만나는 지점을 끊임없이 탐색하기 위한 능동적 모색에 따라붙는 군중의 흩어짐과 공간의 파고로 연장되고 분열된다. 공간과 이미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일 수 있는 이러한 이동은, 이미지의 일차적인 자리 잡음으로 그리고 균열선을 그리는 또 한 번의 이미지의 자리 잡음으로 연장된다. 

    사실 퍼포머든 관객이든 어떤 주의도 이미지와 같이 제자리를 잡기는 어렵다. 순간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기보다 사라지기 이전에 사라짐을 명시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자취’를 기입하기. 햇살이 공간에 스며든 그림자같이 일시적인 무엇. 드로잉을 드로잉하는 양윤화의 몸짓은 적당히 심미적이다. 〈엉덩이, 볼을 긁적이는 손, 눈썹, 머리를 긁적이는 손, 기지개 펴기〉(2019, 플랫폼엘 플랫폼 라이브)라는 퍼포먼스 구조의 일부가 이곳으로 연장된다. 내레이션과 사운드, 이동하는 프로젝터 영상, 스코어로서 안무를 뺀 나머지 곧추선 몸의 반복적 이동―프로젝트 영상과 퍼포머의 안무는 한 명의 퍼포머로 통합된다.―은 훨씬 좁아진 공간에서 관객이 퍼포먼스와의 거리를 벌리는 데 실패함으로써 주의를 한층 강화한다. 

    “이곳에선 모든게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모든 게 자연스러운 것이 이상하지 않음을 의심하는 심리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그 자연스러움은 자연스럽지 않음과 배합되어 있음이 자연스럽지 않지 않은 어떤 세계 내 의식을 가리키는 이중의 뒤틂이 반영된 테제이다. 공간에는 무언가(오브제)가 놓이고 사라지고, 무언가(이미지가)가 발생하고 사라지고, 무언가가(존재가) 움직이고 사라진다. [각주:3] 
    동시에 이 세 대상을 모두 번역할 수 있는 개념이 이미지다. 설치의 프로세스, 퍼포먼스의 시간, 영상으로의 확장을 모두 기할 수 있는 건 또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공간을 측정하며 이미지를 놓고 저울질하는 이동 행위. 거기에는 물론 번역되지 않는 몸짓들의 기호가 가로 놓인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전시/퍼포먼스 개요]

    일시: 2022.1.16, 18, 19, 늦은 5시 39분
    장소: 시청각 랩

    작가: 정이지, 양윤화
    기획: 신지현
    디자인: 마카다미아 오!
    후원: 시청각 랩

    1. 1. 이 글은 주로 양윤화가 이미지를 구성하는 퍼포먼스 방식에 초점을 두며, 정이지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이미지는 애초에 고정되지 않은 것으로 발화하게끔 허락되었다. 정이지의 이미지로부터 퍼포먼스가 시작된다는 것은 물리적인 전제이고, 양윤화의 퍼포먼스로부터 정이지의 이미지가 비로소 다른 무언가로 펼쳐진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물론 이는 정이지의 이미지가 선제적이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차원과는 별개의 의미이다. [본문으로]
    2. 2. 정이지의 이미지는 유동하면서 본래의 지위와 멀어지는 반면, 해당 포스터에서 나온 옆모습의 드로잉은 비교적 명확하게 벽면에 투사되는데, 이때 이전의 회화가 여기 그려졌거나 위치했고 이 퍼포먼스를 위해 지워졌음을 상기시킨다. 특히 양윤화는 본래의 드로잉이 위치했던 장소와 영상 이미지를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통해 본래 회화의 지위를 복원하기보다는 그 사라짐에 대한 진실을 조금 더 환기하려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이미지의 기원으로서 정이지의 이미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 출현한다. [본문으로]
    3. 3. “이 전시/퍼포먼스는 그림과 움직임, 다시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과 사라진 것, 보는 것과 읽는 것, 이끄는 것과 따라가는 것, 부분과 전체,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필시 그림을 기대하고 온 이라면 허공을 보게 될 것이고, 움직이는 무언가를 예상하고 온 이에게는 이미지가 보이는 공간일 것이기에, 여기는 그 어떤 기대로부터 어긋나는 세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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