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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나예,〈파편들의 ㅈㅣㅂ〉: 유희, 은신술, 그리고 기이한 ‘공’터
    REVIEW/Performance 2022. 1. 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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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나예 안무, 박한결 라이브 사운드, 〈파편들의 ㅈㅣㅂ〉 [사진 제공=손나예](이하 상동).

    〈파편들의 ㅈㅣㅂ〉은 차 스튜디오라는 1, 2층이 분절/절합된 공간의 특성을 1층의 움직임과 2층의 사운드와 발화의 동시적이고 시차적인 전개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운드가 파편적이라면, 움직임은 지속적이다. 차 스튜디오는 1층과 2층이 하나의 계단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문가 쪽 2층의 터진 공간으로 1층이 내려다보이는 특이한 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온전한 ‘통합’을 이룰 수는 없어서 2층의 사운드의 근원을 따라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다시 1층의 움직임의 지속을 보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는 수행을 끊임없이 관객 스스로 지속하게 되는 풍경이 연출된다. 
    사실 이러한 교환이 일어나는 건 1층과 2층의 분절된 공간을 통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1층의 움직임이 보여주기 위한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2층의 박한결만이 유일하게 이 공간에서 화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관객을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1층의 손나예는 전신을, 더 정확히는 앞면이라는 반쪽의 신체를 공간에 붙이고 다니는 것으로 일관하는데, 그러므로 얼굴을 관객에게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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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종의 폴리 아티스트에서 디제이, 나아가 사회자이거나 강연자로 박한결은 이 공간을 매개하면서 주재한다. 매개의 기능에서 주재의 역할로 나아가면서 사라지는 매개자의 역능을 발휘한다. 비트박스와 흡사하게 소리들을 일정하고 빠르게 던지고 이를 ‘딜레이’해서 증기기관차의 사운드처럼 만들며 움직임의 전개에 대한 배경으로 자리하다, 사실상 움직임과 크게 관련이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 그보다는 움직임의 자의성을 전유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용하는 유희로써 일정한 배경음―그레고리안 성가같이 몇 개의 선율만을 웅혼하게 울려 퍼지게 하는 식으로 음악을 만들기도 한다.―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다음은 교집합, 합집합 같은 수철학의 이론을 자동기술법적 발화로 ‘웅얼거리기’ 시작한다. 
    이어 그 위치인 2층의 구멍 공간의 난간에서 1층을 바라보며 마이크를 내려놓는다. 곧 온갖 현실적인 소리로 동기화를 꾀하는 소리 장인의 역할에서 음악과 같은 사운드를 여럿 만드는 것에서, 언어적인 형태를 가지고 창작에 대한 흐릿한 사유를 조직하는 것에서 의도적으로 미끄러지는 것으로 그 말을 무화하며 소거해서 하나의 효과 정도로 자리하거나 다시 퍼포머의 움직임을 수음하는 충실한 매개자로 사라진다. 이제 움직임의 끝, 곧 퍼포먼스의 끝을 보기 위해 이동은 거의 잦아든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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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나예는 오른쪽 벽 구석에 얼굴을 ‘묻고’ 서서히 움직이며 하강해, 그것이 수직적인 위상으로 또는 몸의 동적 또는 속도의 전개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철저히 배반하며, 바닥을 타고 문 쪽 공간 가에까지 이르렀다가 마침내 다시 공간 중앙으로 돌아오는, 점진적으로 경로를 구축하는 행위로 일관한다. 손나예의 전략은 일원적인 반면, 그러한 움직임에 충실하기 위해 박한결이라는 매개자를 선택해 자율적 재량을 주는 또 다른 전략을 이에 포함한다. 물론 이 효과는 매우 크고 전면적이다. 미시적인 움직임의 변이에 비해, 사운드의 재량은 크고 공간 전체를 장악한다. 사운드를 가지고 있는 이를 관객은 추종한다. 의도적으로 얼굴을 돌린 퍼포머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애초에 돌과 구불거리는 전선의 배치로 이뤄진 1층 무대는, 마찬가지로 모니터와 여러 이펙터를 비롯한 사운드 관련 장치들이 즐비해 전선들이 깔린 2층 무대는 발을 딛는다는 것의 감각을 계속 시험에 들게 한다. 따라서 손나예의 보이지 않고 움직임에 포함된, 보지 않고 움직이는 수행은 매우 위험한 모험의 행위에 가깝다. 온몸이 촉수처럼 땅을 (딛기보다) 만져가며 세계를 유영한다. 일종의 촉수동물이 된 비인간의 형상은 우리가 갖지 않은 여러 뒤틀림과 쓰지 않는 부위의 활용이 전제되는데, 이런 표면적 차원이 형성하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비인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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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들”에는 바닥에 깔린 여러 오브제, 사물 들의 고정되었다고 감각되는 것들과 함께, 공간으로 분배, 재분배되는(박한결은 마이크를 1층으로 내리기 전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사운드를 창출한다.) 사운드, 그리고 그 유동적인 존재인 박한결이라는 퍼포머 역시 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적인 파편들을 깁는, 동시에 그 동적인 파편을 수용하는 한 명의 퍼포머로서 손나예가 자리한다. 〈파편들의 ㅈㅣㅂ〉의 손나예의 움직임은 분명 의아함을 준다. 어떤 감정이나 발화의 단위를 가져가지 않기 때문에, 관객을 등지고 있으므로, 비인간의 형상을 취하므로, 모든 말의 주권을 바깥으로 이전했으므로, 동시에 모든 사운드의 폭격을 수용해야 하므로 어떤 의미를 취하려는 건지 알기 어렵다. 
    손나예는 한동안 바닥에서 멈춰 있는데, 이는 뜻하지 않게 관객의 난입을 허용한다. 애초에 어떤 발화도 없는 상태로서, 이는 발신이 가능한 텅 빈 용기로서의 혼동을 일으켰다고도 할 수 있다―손나예의 손 위에 관객은 자신의 손을 포갰는데, 손나예는 그로부터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각주:1]. 반면 이러한 비인간의 이동은 인간과는 사실상 상관없는 곤충이나 동물과 같은 비체의 얼룩 같은 것이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는 의도치 않게 그를 존재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반면 이러한 개입은 그 존재하기의 숨은 공식을 가시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손나예는 눈에 뜨이지 않게 움직이기, 공간의 얼룩처럼 자신의 형상을 말 그대로 공간에 파묻는 것으로써 단지 존재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반면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사건은 퍼포먼스를 재설정하는 차원을 넘어 작품과 재절합된다. 손나예는 손을 얹진 관객의 위치로 향하며,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는 막다른 위치를 ‘선택’해 멈춤을 끝낸다. 퍼포먼스가 끝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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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들의 ㅈㅣㅂ〉은 끊임없는 강도를 유지한다. 춤이랄 것을 제거하고, 시각성 없는 몸의 더딘 이동을 위한 움직임만을 가져간다. 이에 대한 강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일종의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다. 곧 그것은 단단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모두 갖춘 숙련된 몸을 전제로 한다. 서사를 완전히 지우는 것 역시 가능할까. 주체를 발화의 적극적이거나 수동적인 매개자로 만들기, 또는 어떠한 정체성으로 편입시키기, 그럼으로써 비교적 서사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여타의 퍼포먼스 혹은 공연을 넘어, 의도적으로 교신을 차단하기는 오히려 적극적인 서사를 짓는 관객을 추동하거나 비인간의 형상을 가장 잘 ‘연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또한 투명하다. 
    〈파편들의 ㅈㅣㅂ〉은 장소에의 분산의 어려움을 매개자의 역량과 매체의 절합으로 전도하며 우직하게 움직임을 구현하도록 만든다. 보이지 않게 움직이기와 놀이터로서의 배경은 기이하게 공존한다. 만약 여기서 음악이 완전히 빠진다면 어떨까. 사실상 손나예의 움직임은 음악에 반응하기로서의 몸이 아니며, 몸 위에 얹히는 디제잉으로서의 음악만이 부가되는 것이므로, 그리고 그 둘은 다른 차원으로 지속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가정은 이 몸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접어들게 한다. 손나예는 음악에 반응하지 않지만, 그러한 배경 안에서 은신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곧 음악은 일종의 놀이터와 같이 온갖 소음과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고 폐쇄적인 행위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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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박한결의 매개에서 매개체는 공연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박한결의 곁에 있는 크기가 다른 두 대의 모니터는 아마도 시작 전부터 1층의 ‘텅 빈’ 공간을 비추고 있는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반면, 연주가,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때도 모니터의 공간은 움직임을 포착하지 않는다. 곧 2층을 보여주는데, 이는 두 공간이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매개를 주재한다고 생각되는 건 사실상 이 공간 전체를 음악적 역량만이 제어 가능하다는 사실을 착각한 것에 불과하다. 반면 이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손나예의 움직임은 박한결이 그를 볼 수 없는 것과 달리 그를 들을 수 있는 것과 함께한다. 박한결은 딱 한 번 손나예의 몸에 마이크를 던져주는 것을 위한 ‘확인’―약간의 틈새를 갖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아닌―을 포함해, 관객을 일절 대면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손나예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나아가 일정한 속도와 변화 없는 움직임으로 지속함으로써 음악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음악을 전면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손나예의 움직임은 그가 음악과 전혀 관계없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파편들의 ㅈㅣㅂ〉은 손나예와 박한결의 대면―각각 얼굴을, 그리고 존재를 노출―하지 않고 곁을 내어주기를 통해 서로를 보족함으로써 서로를 보지 못하게 만들며, 각자의 신체로써 이 둘이 이어져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공연인지도 모르겠다. 손나예의 가려진 얼굴을 찾아서 관객을 마주하지 않는 박한결의 얼굴에서 좌절해 내려오거나, 또는 박한결의 보이지 않는 얼굴을 손나예의 가려진 얼굴에서 찾는 데 실패하는, 거듭된 ‘악순환’ 속에서, 두 퍼포머의 시간이 하나로 뒤엉켜 간다. 앞서 그 둘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럼에도 독자적 주권을 가진 두 개 층의 관계, 아마 그것이 ‘집’이 아닌 집의 요소들이 해체된 뒤 공존하는 “ㅈㅣㅂ”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1. 1. 21.12.27-12.29의 공연 중 마지막 날인 12.29에 관람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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