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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애순 안무(국립현대무용단 제작), 〈몸쓰다〉: 부재하는 몸‘들’의 생채기적 몽타주, 그리고 박유라라는 전사(前史)
    REVIEW/Dance 2022. 4. 5. 23:39


    터널같이 펼쳐진 넓은 공간에는 한 존재가 뒤돈 채 이동한다. 그의 움직임은 유려하다가도 결정적으로 엉덩이를 긁는 제스처로 옮겨 간다. 하나의 정동으로 기꺼이 수렴되지 않으며 하나의 이미지에서 분화되는 종래 균열을 일으키는 움직임의 한 초상은, ‘몸을 쓰는’ 것을 다양하게 기술하는 것이 안무의 초점임을 역설하는 듯하다. 여기에 한두 무용수가 무대에 진입할 때 등장과 함께 이전의 무용수와 동기화가 이뤄지며 무대는 쌓여 나간다. 여기서 전략은 한 존재의 이중적 분화를 각 존재의 병치를 통해 각 존재를 다초점으로 ‘분쇄’하는 것으로 옮겨 간다. 
     
    안애순 안무가의 〈몸쓰다〉는 각 무용수 고유의 몸의 무늬와 흔적을 다중 레이어의 사운드 평면 속에 배치하는, 비교적 간략한 전술을 펼친다. 가장 큰 구조적인 분기는 아마도 공간의 실천인데, 회전하고 좌로 이동하며 위로 솟구치는 등의 무대 변전 이후, 무대 전면에는 불투명한 막의 단이 내려지고, 중앙의 통로로 한 명의 무용수가 다가오고, 그 밖의 다른 무용수들은 실루엣으로 사라지는 것이 그것이다. 음악이 끊임없이 겹쳐지며 이동한다면, 실상 음악으로 인한 서사의 흐름은 사라지며 메타적인 차원에 그친다. 이는 하나의 실존에 얇은 막 같은 것이 씌워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 얇은 막으로 변하는 순간 무용수는 유예되는 시간의 반경 안에 은근하게 닫히며 곧 사라지게 된다. 그러한 시간 동안 두꺼운 막과 동기화되는 존재는 자신의 실존적 층위를 조금 더 강화한다. 

    〈몸쓰다〉의 매시업 식의 음악의 변이적 구성은 기본적으로 인공의 전자적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내용적 차원에서는 쉬이 신파를 불러오기도 하고 여러 효과음을 활용하는 가능성을 주기도 한다. 신파의 최고조로, ‘1세대 재즈 보컬’ 박성연의 〈바람이 부네요〉가 흘러나오자 그에 걸맞은 배경 안무 차원의 서정적인 몸짓을 앞으로 두고 한 손을 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동작이 병치된다. 언어 유희적인 몸짓이면서 동시에 주요한 음악의 또 다른 배경음을 상정한 몸짓일 수 있다. 무엇보다 주요한 음악 모티브로부터 도출된 움직임을 분쇄하는 전략적인 몸짓으로서의 의미가 짙다. 가령 주요 음악의 모티브는 신파인 상황이며 여기에 유효한 몸짓은 서정적 발라드의 유려함을 유지하는 박선화는 그에 부합하지만, 손을 흔드는 얇은 움직임은 그 음악의 경계선상에서 진동하며 심층 코드를 차지해낸다.

    〈몸쓰다〉의 특이점은 그런 막, 서로 어우러질 수 없는 존재들을 의도적으로 한 곳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둠의 폭력은 각자의 무늬가 하나의 언어로서 유력해지기 어려운 시간을 만든다. 동시에 각자는 자신의 몸짓을 펼쳐내는 데 있어 갖는 당위를 물리적으로 지속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움직임과 교신하지 않기 위해 또는 영향을 연장하지 않기 위해 곧 자신의 고유성을 발현하기 위해 바깥을 인내해야 하는 어떤 불편부당한 경계에서 춤을 춰야 한다. 
    마치 두 개의 음악이 가볍게 병치되듯 단지 이미지일 수만은 없는, 부피를 가진 물리적 존재들은 하나의 시선 아래 의도치 않게 경합하는 동시에, 의도적으로 경합을 은폐하는 스스로의 몸짓을 구가해야 한다. 따라서 막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주어진다. 음악이 갈라지는 가운데, 무용수들은 ‘그’ 음악이 아니라 음악‘들’ 사이에서 진동한다. 얇은 막으로서 진동하거나 얇은 막을 찾기 위해 진동한다. 이 얇은 막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도 있다.

    반면, 안애순은 완전한 복잡성, 또는 카오스 상태와 그로 인한 무화에 대한 제동을 걸며 일종의 텅 빈 시간 안의 실존적 구성을 실험하는데, 여기서 무용수의 실존이 극단적으로 불거진 예는 박유라 무용수의 몸짓이다. 박유라가 그 전에는 무대 뒤에서 소리 없이 얼굴 동작의 구김을 통해 울부짖음을 표현했다면―배경음 속에 완벽히 사라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간에 울음과 웃음, 재채기를 섞으며 끊임없이 변하는 사운드의 파고를 춘다. 이러한 시간은 앞선 시간과의 단절이면서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간극을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조형준은 그 밖의 존재 바깥에 위치한다. 그는 서사 바깥에 있으며 동시에 그래서 서사를 쓸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의 처음 몸짓이 이 무용이 어떤 내용적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음을 보여줬듯, 그는 이 세계를 총체적으로 비켜나면서 총체적인 이 세계 자체를 허구로 만드는 최소한의 진실을 갖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이 진실의 무게를 갖는가. 
    박유라는 이 무대가 허상이라는 걸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움직임을 취한다. 그의 소리는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억지로 그것을 이어 간다. 위태롭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그것을 그칠 것이다. 반면 이것은 극의 위기를 자연스레 드러낸다. 곧 가상이 끊기는 순간 찾아오는 실재는 가상의 끊어짐 직후, 곧 그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실재의 인공적인 인공호흡의 면모가 탄로가 날 지점에서 온다는 것이다. 

    조형준은 역사의 무대로 사라지고, 다른 존재들은 실루엣으로 사라지는 가운데, 맨 마지막의 존재는 다시 복기되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사라짐’ 그 자체로 사라진다. 따라서 가상의 공간 안에 허덕이는 실존, 또 음악으로부터 스스로가 옥죄이며 생채기 내는 어떤 허름한 몸짓들, 끊임없는 음악 자체에 옥죄이며 분열되는 관객의 ‘혼합되는’ 상태는 묘연하게 끝을 맺는다. 각개 전투의 기기묘묘한 움직임들이 주는 일종의 황홀경은, 잠시이다. 그보다 거대한 건 음악적 혼합, 그리고 공간의 전이, 각 무용수의 서로를 분쇄하는 몸짓의 병치이다. 그렇게 다시 조형준의 기이한 굴절의 몸짓으로 돌아오게 된다. 

    박유라의 편집술

    박유라의 장면은 여러모로 이 작품에서 기이하다. 〈몸쓰다〉의 유일한 외부 사운드가 없는 구간이면서, 유일하게 하나의 퍼포머에게 집중된 시간이 주어지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는 안애순의 안무 전략의 일환이겠지만, 그것을 이끌고 가는 건 오로지 퍼포머 박유라의 몫이며, 그러한 빈 공간을 열어 두는 것이 안애순의 전략이 완성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박유라의 이 장면은 그래서 조금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며, 적어도 여기에 해당하는 안애순의 안무의 내용적 진실은 박유라 자체에 대한 분석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박유라의 소리-몸으로써 형질 변화의 연쇄 과정을 일으킴은 지난 그의 안무작 〈장면싸움〉(2021)의 맥락을 직접 떠올리게 하며, 그가 이전 출연했던 소리를 통한 표현의 차원에서 황수현 안무가의 작업 〈아이 원트 투 크라이, 벗 아임 낫 새드〉(2016), 〈검정감각〉(2019)이나 조아라 연출의 〈판소리움직임 탐구-조아라 편〉(2021)을 생각하게 한다. 전자에서 〈아이 원트 투 크라이, 벗 아임 낫 새드〉가 정동이 맥락과 함께 인과적으로 주어지는 부산물이 아니라 미미크리를 통해 후차적으로 획득되는 인공물이라는 전제―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웃는다는 뇌과학적 명제와 결을 같이 하는―, 곧 메소드의 일종으로 지시되는 것처럼, 박유라는 감정의 맥락을 소환하지 않고 감정을 표현한다. 

    어떤 차원에서 소리를 내는 것으로 몸을 대체하는 박유라는 그 전에 소리를 안무했던 ‘안무가’ 황수현의 작품에 출연한 ‘퍼포머’라는 점에서 황수현 안에 고립되어 인식될 수 있지만, 박유라 역시 ‘안무가’로서 독립된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중이며, 또한 이번 작업을 놓고 보면, 박유라는 ‘퍼포머’로서 ‘안무가’ 안애순 안으로 고립되어 인식되어야겠지만, 오히려 그의 솔로 무대를 열어 두는 방식이 그 밖의 모든 무용수가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이를 하나의 필드에 담는 안애순의 무형의 공간성 안의 형식만을 내세우는 전략에서는 박유라는 안애순을 떠나, 동시에 안애순 안에서 ‘박유라’ 자체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한편, 안무가와 퍼포머의 관계는 온전히 ‘안무가에서 퍼포머’로라는 선형적인 차원으로 양분되지 않는데―반면 모든 크레디트는 안무가로 수렴한다.―, 안무의 영역은 이상적으로 계속 무형의 것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각 무용수의 과정에서 체화되며 형질 변화를 일으키는 한편, 안무가의 아이디어는 그 몸에서 실체화되며, 이때 실행의 신체는 아이디어가 가진 언어의 궤도를 이탈한다. 그래서 역으로 안무가의 초기 아이디어는 중요하며, 또한 퍼포머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또 다른 언어 역시 공연의 언어로서 부가되어야 한다. 

    박유라는 〈장면싸움〉에서 황수현처럼 감정의 미미크리의 메커니즘을 규명하거나(〈아이 원트 투 크라이, 벗 아임 낫 새드〉) 이를 감각의 차원으로 확장하며 공감각적 신체에 대한 탐구(〈검정감각〉)를 하기보다는 감정의 미미크리를 시계열을 구성하는 극적 편집술 차원으로 사용한다. 한편, 〈판소리움직임 탐구-조아라 편〉이 판소리를 배우는 여러 초심자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식으로,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을 수행하는 존재 자체를 가시화하기 위한 전략 안에 드러냈다면, 박유라는 내용적 진실 대신에 그 몸의 흐름이 어떻게 불연속적으로 그래도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이는 실존 자체에 대한 탐구이며, 실존을 연기술로 고립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는 희로애락을 연기하는 배우 자체의 연기술이 무대를 채우고 있음 자체만을 반영한다―이는 마찬가지로 연기술 자체를 고립시키는 고전적인 마임의 무대를 떠올리게도 한다. 〈장면싸움〉은 곧 가장 직접적인 〈몸쓰다〉에서의 박유라의 구간을 이룬다. 그리고 앞선 박유라가 소리를 낸 작업들은 그 맥락과 뒤섞이는 중이다. 

    결과적으로 안애순의 박유라의 고립 전략은 방대한 사운드 기술과 복합적 배치술로 진행된 무대에서 간극을 형성하는 유일한 구간으로서 필요했던 반면, 박유라의 연기술은 붕 뜬 느낌으로 그 전과 다른 자장을 형성한다. 큰 맥락에서 보면, 가상과의 대립이면서, 그 세부를 들여다보면, 또 다른 가상-실재의 전략―‘가상을 실재로 변환하는’―이 내용적 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박유라의 구간은 안애순 안무의 고유한 스타일―각 무용수의 내용적 진실을 스타일로 소환하는―의 개방적 측면과 그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불가능성과 간극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곧 〈몸쓰다〉의 안무는 움직임들의 병합술을 시험하며 몸과 몸, 사운드와 사운드, 장면과 장면 사이의 경계에 처한 몸의 실존들을 보여주는 반면, 각 파편들의 내용적 봉합과 각 파편들의 시계열적 종합, 그리고 반복의 무늬가 모두 기각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2.4.1.(금)-3(일) 금 7:30PM / 토 3PM·7PM / 일 3PM
    공연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령: 8세 이상 관람
    예매: 예술의전당·인터파크

    안무: 안애순
    드라마투르그: 김지연
    무브먼트 코치: 장혜진
    출연: 강진안, 최민선, 조형준, 서일영, 강호정, 정재우, 박선화, 서보권, 박유라, 김도현, 도윤승

    작곡·사운드 디자인: 피정훈
    무대 디자인: 김종석
    의상 디자인: 임선옥
    조명 디자인: 후지모토 타카유키
    제작무대감독: 조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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