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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조 이야기〉, ‘부채의식을 떠안고’
    REVIEW/Theater 2022. 4. 14. 01:28

    〈금조 이야기〉[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금조 이야기〉는 한국전쟁 당시 딸을 잃어버린 채 딸을 찾아 나서는 금조의 여정을 주된 서사로 하되, 거기에 그 주변의 여러 역사적 맥락을 교차 편집한다. 여기서 여러 이야기는 역사에 대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시각보다는, 동시에 그 모든 인물의 내적 동기를 형성하며 그들 간의 관계를 구성하기보다는 전쟁 안에서 비이성적인 인간으로의 형질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수렴하며, 결과적으로 정주할 수 없는 금조의 삶, 그의 지연되는 도착을 더욱 강조한다고 보인다. 관객에게 그 고통은 곧 다른 시간만큼 더 유예된다. 
    금조는 그와 여정을 함께하는 들개 아무르와 함께 유일하게 거의 모든 곳을 경유하며 존재들을 스쳐 지나갈 뿐 그 모든 서사가 그와 온전히 결부되거나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안을 점유하지 못하고 밖으로만 떠돈다―그는 역사의 중심에서 비켜남으로써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의 처지는 들개의 처지와 같다. 그는 미래를 향하는 게 아니라 사라진 딸의 시간―이미지―에 묶인 채 선회한다. 그가 있는 곳의 정확한 좌표도 가늠하기 어렵다―아니 세계는 장소를 잃어버린 상태이다. 전쟁터로 딸을 찾으러 간 그는 딸 대신에 전쟁의 흔적들을 만난다.

    전쟁으로 멈춘 열차의 자리를 반복해서 상기시켜 주듯 금조가 맞는 세계의 황량함은 부재의 자리를, 텅 빈 세계를 맞는 존재의 좌표 없음―실존―으로 연장된다. 여기서 자기만의 공간이 없는, 나아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온 채 타인이 있었을 빈 공간을 자신의 일시적인 공간으로 점유하는 금조의 주체성은, 결코 주체의 특권으로 연결되지 못하는데, 결정적으로 그 역시 자신의 딸의 위치를 잠시 대리하던 고아 영선과의 관계를 부정하여 그를 죽게 하며 이 참혹한 역사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반성을 통해 승화되지 않는다.
    거대한 황량함의 세계가 금조의 시간을 진공으로 구성한다면, 그가 일촉즉발 ‘격발’의 상황에 놓였을 때, 곧 죽음의 현실에 연관되는 순간, 그 역시 전쟁으로 인한 형질 변화의 경로를 이탈할 수 없게 된다. 그 역시 범속한 인간이 된다. 또는 그러한 인간임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적 전개로부터 저항하는, 적어도 의심하는 인물은, 시인 2나 노구치로, 오히려 이들에게 주체의 자리가 생겨난다. 

    금조 역의 윤현길 배우.

    그럼에도 가장 주요한 서사의 축을 형성하는 건 도착할 수 없는 세계로의 끝없는 여정이다. 금조와 함께 그 여정을 시작한 들개 아무르가 표범이었고 다시 들개가 되는 과정은, 금조가 여정의 출발점이 된 자신의 잃어버린 딸을 금조로 부르는 장면처럼 묘연하게 겹쳐진다. 존재는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다른 존재를 입고 있다. 아무르가 표범의 성질을 잃어버린 채 들개로 살아가는 것처럼 금조는 자신의 딸을 잃어버리면서 자신 역시 잃어버렸다. 자신을 타자로 오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딸을 찾아 떠나는 금조는 자신의 딸의 흔적을 이내 발견하지만, 종래 그를 찾지 못한다. 개마고원 숲의 수력발전소에서 키워지다 탈출한 아무르와 굶주림과 생사의 고락 끝에 죽음에 처한 금조는, 메밀밭에서 부둥켜안고 한 몸이 된다. 마치 자신의 부모를 잃어버린 아무르와 딸을 잃어버린 금조는 상대방의 부재의 자리를 대신하며,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메우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아무르의 내적 동기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아무르는 ‘인간’에 대한 타자의 형상을 띤다. 여기서 분명한 건 금조의 내면이다. 적어도 금조의 고통과 시련은 공감할 수 있다. 금조의 딸은 어떤 실재적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곧 금조는 사실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것 아닐까. 

    아무르 역의 이은지 배우.

    금조와 마찬가지로 역사에 좌표를 구성할 수 없는 존재로서, 금조 옆에 유령처럼 붙어 있던 아무르는, 금조에게는 단순히 반려동물이라기보다 금조의 딸의 현신 같은 존재의 지위를 차지하는 듯 보인다―이는 온전한 타자라기보다 금조에게 흡착되는 어떤 대상에 가깝다. 아무르는 들개일 때 배우 박용수, 강해진, 문예주 등에 의해 차례차례 연기된다. 그는 그렇게 금조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안에 있는 금조에 의해 유령처럼 드러나기도 한다. 둘의 포옹은 수많은 존재의 교차와 착종을 동시에 보여준다. 둘의 관계는 사실 긴밀하게 연결된다. 금조가 메밀밭의 심어놓은 씨앗을 파먹고 살던 아무르처럼 금조의 희망을 실은 시도는 결국 금조가 아무르에게 안기는 것으로 수렴한다. 

    표범 아무르는 인간을 죽이는 살인 기계로 훈련받았지만, 메밀밭에 오며 폭력성이 지워진다. 〈금조 이야기〉에서 무대는 크게 턱이 있는 바깥쪽―무대 가―일부와 흙이 깔린 바닥과 그 앞의 테이블이 있는 곳을 포함한 안쪽 두 층위로 나뉘며, 옆쪽은 경사져서 두 곳을 오가도록 만들어졌다. 조명으로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하기는 힘들고, 또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럼으로써 어느 정도 공간 전반으로 주의가 분산된다고 할 수 있다. 〈금조 이야기〉는 시종일관 조명과 사운드 등에서 극적 효과를 크게 주지 않다가 금조가 다시 메밀밭에 돌아왔을 때 일순간 공간 전체에 메밀꽃이 핀 광경을 프로젝션으로 투사해 만든다. 거의 유일하게 이 장면은 완벽하게 힘을 주었다, 다른 모든 장면이 이 장면의 힘을 상쇄하지 않으려는 듯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기서 아무르가 자연에서 ‘획득’하는 야생성(?)은 인간이 주입한 폭력성과 대립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본 자연의 비폭력성, 곧 아름다움이다. 이는 그의 본성처럼 묘사된다. 따라서 이는 그가 처음부터 자연에 있었으면 가능했을 어떤 야생성으로 설정된다. 

    (사진 좌측부터) 시신을 끌고 가는 남자 역의 윤성원 배우, 금조 역의 윤현길 배우.

    한편, 금조의 모습은 초반에 자신의 친구의 시신을 끌고 가는 남자의 거울상이었음이 확인된다. 금조의 딸을 찾고자 하는 불가능한 여정은 사라진 죽은 자의 좌표 없음의 역사를 증명하려는 극의 불가능성의 플롯을 초점화한다. 금조 역시 남자처럼 영선의 시체를 묻을 곳을 찾으며 이를 이끌고 가게 된다. 헤어진 아무르의 자리를 대체하며, 부채의식으로서의 시신은 그림자처럼 산 자를 따라간다. 시신은 죽은 자에 대한 탕감할 수 없는 부채의식을 육화한다. 우리가 금조를 경유해서 보는 건, 이 부채의식을 안고 떠나는 여정이다. 단지 그것을 아는 것―알게 되는 것―과 모르는 것―결국은 알게 되는 것―사이에 놓일 뿐인 여정.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창작공감: 작가] 본 공연 - 금조 이야기

    공연 일시: 03.30. ~ 04.10. 평일 18시/ 토, 일 17시 (화 공연없음)
    공연 장소: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관람 연령: 14세(중학생) 이상 관람가
    소요시간: 260분(인터미션 1회 포함)

    작: 김도영 
    연출: 신재훈 

    ■ 출연진

    금조: 윤현길
    아무르: 이은지
    노구치, 시신을 끌고 가는 남자: 윤성원
    모리타: 박세정
    정무 총감, 들개: 박용수
    역무원, 미야키 순사, 곰: 이동준
    시인1, 말, 들개: 문예주
    시인2, 피난민 남편: 윤일식
    가정부, 여인1, 래빗1: 박옥출
    피난민 아내, 여인2, 래빗2: 이혜미
    주인여자, 여인3, 래빗3, 들개: 강해진
    소녀, 소년병2: 김주빈
    소년병1, 개구리: 남재국

    ■ 스태프

    무대: 남경식
    조명: 노명준
    의상: 이윤진
    소품: 남혜연
    분장: 장경숙
    움직임: 이재영
    음악‧음향: 이승호
    영상: 김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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