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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엽 연출 〈커뮤니티 대소동〉: 하나의 커뮤니티를 가설하기란…
    REVIEW/Theater 2022. 4. 14. 01:48

    접촉을 통한 우리의 형성

    〈커뮤니티 대소동〉 창작과정공유 사진. [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커뮤니티 대소동〉은 접촉에 대한 감각을 강화한다. 안대를 쓰고 들어간 어둠으로 뒤덮인 극장에서 안대를 벗으며 시작된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감각은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는 감각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곧 어둠을 보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시각적으로 판별되지 않는’ 세계에서 목소리와 타자를, 무엇보다 발 디딜 공간에서 그것들을 예측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커뮤니티 대소동〉은 이진엽 연출이 속한 ‘코끼리들이 웃는다’의 〈몸의 윤리〉(2015)의 재판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몸의 윤리〉가 보이지 않는 곳이 우리의 변화를 시도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함을 의도하고 동시에 다른 우리의 감각을 활성화하고자 했다면, 총 아홉 명 중 과반수의 시각장애인이 직접 참여하며 공연을 만드는 〈커뮤니티 대소동〉의 경우, 시각장애인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대등한 관계 차원에서 어둠이라는 매체가 도입된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같은 환경의 선택을 위해 긴 시간을 거쳐왔음을 또한 의미한다. 반면 이곳은 시각장애인의 차원에서 분별이 가능한 공간이다―비시각장애인 역시 그 분별의 표지를 따라 이동할 수 있다. 곧 무정형의 공간이 아니라 발바닥이 뚫린 양말을 신은 채 촉지도를 통해 각자의 할당된 자리―좌표―를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있는 공간이다. 

    소리에 이끌리며 끊임없이 저곳에 있는 그들의 존재, 트윙키, 엄지공주, 푸렴, 모리, 카이, 리리, 조재, 베썬, 원뜰은 하나의 계열체로 명명된다. 프로그램 북에서 연출을 포함해 배우들 모두 뒷모습을 찍었으며, 그들이 시각장애인인지 아닌지도 명시하지 않았다. 공연에서 이들은 존재의 어떤 구분도 없이 관객에게 관객 스스로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는다. 사실상 수행은 관객의 몫이다. 놀이는 다양하지만 전제가 되는 규칙은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간단하며, 그들은 놀이가 끝나면 차례로 이름을 잇는다. 먼저 이들과 악수를 하며, 이후 옆 사람과 그리고 어디서 왔을지 모르는 사람과 접촉을 한다. 

    시각적 편견과 선입견이 없으므로 이러한 접촉은 어떤 사심이나 오해도 방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러한 접촉은 위협적이지 않고 편안하게 상대방을 대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해한다기보다 스스로를 내어주면서 상대방을 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과 살이 닿을 때 어떤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감지된다. 이러한 세계는 이미 〈몸의 윤리〉에서 제시된 바 있다. 〈몸의 윤리〉에서는 어둠 속에서 안대가 아니라 신체를 감싸고 있는 옷 모두를 다 벗을 것이 주문되었다. 물론 강제는 아니고 선택에 맡겨졌지만, 이는 옷이라는 사회적 관습의 시선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벗어던지며 자유로워짐을 스스로 의도할 수 있다고 전제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시각의 국소 부위에서 신체 전체로 감각을 분배한다는 점에서, 물론 여전히 유효하며 의미가 있다.

    개인의 시간과 확장된 시간 사이에서

    〈커뮤니티 대소동〉은 어둠이 오기 전에 배우들의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녹음을 헤드폰으로 들을 수 있게 배치한다. 그들의 어떤 경험과 감각 들이 소환된다. 이는 장애에 초점을 맞춘 것 같으면서 그것을 벗어난다. 질문은 그들의 특정한 경험과 사유를 끌어내고자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글쓰기의 역량을 가진 통상의 저자임을 전제한다. 가령 삶에서 어둠이라는 ‘알레고리’에 대한 글쓰기는 시각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적인 알레고리를 향하며 구체적인 삶의 지난함은 깎여 나갈 수도 있고, 이를 승화시킬 수도 있다. 그들의 삶을 글로 쓰는 게 아니라 각자의 삶을 알레고리로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글이 거꾸로 그들의 지위를 구성해 나간다. 

    어둠에 대한 친숙함의 정도가 다른 두 존재가 함께 하나의 공간에 존재함으로써, 그리고 직접적인 말하기가 아니라 내적 글쓰기를 듣는 외부의 시간을 부가함으로써 〈커뮤니티 대소동〉은 〈몸의 윤리〉와 차별화한다. 먼저 어둠 속에서 ‘따로 또 같이’ 위치하며 이들의 특정함―보이지 않는다는 것(의 외양)―은 사라지고, 모두는 특정한 또는 동등한 조건에서 각자를 또는 서로를 사유해야 한다. 따라서 다른 감각이 절대화된 조건에서 타인을 만나는 것이 우선 과제가 된다. 시각장애인의 존재를 특정화하지 않는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를 공연 전후에 부가적으로만 넣음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공연 바깥의 시간에서 압축된 시간이 투여된 글쓰기의 재생은 이들의 표현 가능성을 일축하지 않으면서, 이 표현이 존재의 특정화가 아닌 특정한 존재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커뮤니티 대소동〉은 그 확장된 세계를 “우주”로 전제한다. 거기에는 어떤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불안전함, 불편함 따위는 없다. 그 환원의 명제는 사실 비약의 위험이 따른다. 곧 구체적인 현실과 특정 조건의 차이를 무화하고 은폐할 가능성이 따른다. 이는 눈을 감고 수행하는 명상을 통해 모든 것이 평온해지며 안정될 수 있다는 어떤 진리의 외양을 가볍게 전유하는 것으로 공연이 환원되며 그 속에서 공연의 전제 조건 역시 상쇄될 수 있음 역시 의미한다. 곧 서로를 동등한 조건에서 전제하기 위해 어둠이 특정한 조건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무화되므로 모든 존재는 평온할 수밖에 없다는 유사-신학의 계시로 침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어둠이라는 불편한 조건을 딛고 나아가기 위한 다독임의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근본적으로 〈커뮤니티 대소동〉이 설정하는 세계가 현실을 재현하지 않고, 추상적인 감각의 세계로 도약하는 가운데, 그 사이에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는 어둠 밖에서 모두가 똑같이 자유롭지 않은 세계에 대한 장막이 되는 것은 아닐까. 

    무매개적 소통을 향해

    결과적으로 〈커뮤니티 대소동〉은 우리가 어떤 전제 조건 없이 만날 수 있으며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의도한다. 시각장애인을 타자화하지 않으며, 대신 관객 스스로가 타자화되는 환경 안에 있게 된다. 여기서는 모두가 서툴지만 표현 가능성을 펼칠 수 있으며, 그것에는 우열과 평가가 불가능하며 동시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 모두는 희미하면서 뚜렷한 연결 가능성을 가진 각자임을 상기시킨다. 이는 예술이라는 매체를 특정한 조건에서 구체화할 때 가능한 것이다. 어둠이라는 비시각의 영역을 구성하는 환경 자체를 매체로 수용하는 것은, 그 조건 아래에서 여유와 평온, 안전함 등의 가치를 전제하며 서로를 서로에 대한 신뢰의 조건으로 구성하는 여러 수행의 몫을 관객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커뮤니티 대소동〉은 일시적으로 현실을 차단하며, 극장의 세계를 시각이 아닌 촉각과 청각의 현상학적 세계로 구성하며 모두가 동등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특정한 누군가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며 모든 이가 거기서는 자신이 중심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는 단지 나와 다르다고 생각되던 이의 친밀한 매개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커뮤니티 대소동〉과 〈몸의 윤리〉가 어둠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점 또는 다른 감각을 사용하며 낯선 타인과의 관계를 친밀함으로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같다면, 그 근본적인 차이점은 시각장애인의 배우 구성에 있다. 하지만 공연과 공연에 대한 프로그램 북에는 없는 시각장애인과 다른 배우와의 구분은 이 공연의 출발선상에 있는 ‘장애’라는 키워드를 알고 있기에 특별한 것이 된다. 그 구분 자체가 무력해지는 시점에서 〈커뮤니티 대소동〉이 구성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몸의 윤리〉가 제시하는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커뮤니티 대소동〉의 윤리적 독특성은 그러한 구분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지점 자체에 있다. 그 전달 방식과 효과는 다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같이 하나의 세계를 누빈다는 것은 중요하다. 동등한 방식으로 서로를 인지하고 관계 맺는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에 대한 차이, 그 인지적 조건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은 공연에서 의도적으로 사라진다.
    어둠에는 비시각장애인의 시각장애인의 감각에 근접해지기 위한 시각의 차단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거기에는 다른 감각의 사용이나 활용을 통해서만 타자와의 소통, 타자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어떤 사고가 전제된다. 코끼리들이 웃는다에서의 활동과 함께 이진엽 연출의 작업에서는 그러한 감각의 사용이 다른 세계 체험을 할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니까 그 ‘구분’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라 또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진엽 연출은 다른 시공간을 찾았고, 이러한 구분은 후차적으로 윤리의 부분으로 작업과 결합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커뮤니티 대소동〉의 위상

    〈커뮤니티 대소동〉과 〈몸의 윤리〉 사이에 〈세시에서 세시, 네시에서 네시〉(2019)가 있다. 1박 2일, 24시간 동안 서울혁신파크에서 연수동 공간 전체를 사용해 생활하는 가운데, 여러 방에서 놀이와 이야기, 체험이 이어졌다. 일시적인 공간에의 체험이 아닌, 시간의 흐름을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것 외에도 자기만의 시공간을 운용하는 기술 역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경험의 폭은 훨씬 크고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시에서 세시, 네시에서 네시〉는 〈커뮤니티 대소동〉에 비해 오히려 더 실험적이고 과감하며 다양하다. 
    시각장애인들도 일반 배우와 함께 관객의 안내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같고, 오히려 여러 방을 시각장애인 자기만의 방으로 전유해, 자율적인 선택에 따른 관객의 회전과 만나는 지점에서는 더 자유롭고 무엇보다 적극적인 주체로 자리했다. 〈커뮤니티 대소동〉은 하나의 시공간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진행과 헤드폰을 통해 전해 듣는 배우들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개성과 그들이 직접 운영하는 ‘다양한/여러’ 시간은 드러나지 않는다. 

    장애가 전면화된 예술계의 근래의 시도들 가운데 〈커뮤니티 대소동〉은 위치한다. 이는 동시에 이전부터 이진엽이 시도해온 다른/특정 감각의 활용, 서로 다른 존재와의 마주침이라는 ‘커뮤니티’ 안의 매체 특정성에 대한 실험의 일부이다. 결과적으로 이진엽은 크게 다르지 않은 걸 했고, 이는 일관된 태도와 미학의 결점점이라는 측면에서 수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반면 국립극단 안에서 이진엽은 덜 자유롭거나 실험적이지 않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더 나아간 단계를 보여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는 공연의 시작점과 함께 공연의 시간 전반에 시각장애인이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역전된다. 무엇보다 시각장애인이 전면에 참여하며 그들의 말과 사유를 들려주었고 그것을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잉여적으로 끼어 있는, 공연과 매끈하게 연결되지 않는 그 ‘틈’이 그러한 과정의 일단을 보여준다. 

    ‘커뮤니티’를 재고하기

    이진엽의 세계에서 유아적이고 환상적인 ‘우주’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가 확장되며 그곳으로 환원되고 있다(고 믿어진다)면, 협업의 차원이 과정에서 그리고 결과로 연장된 것은 공연의 부가적인 다른 결―그들은 각자의 삶의 진실을 질문으로 요청받는다.―에서 첨부되며,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의 사유 역량이 현실적으로 비시각장애인의 차원과 다르게 작가의 역량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는 작가와 비작가,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 둘에 대한 고정된 분할을 동시에 가로지른다.―을 사유하게 하는 한편, 우리 모두의 ‘내면’이라는 것의 구성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에 완전히 융해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개별적인 자아로 수렴된다는 것 역시 의미한다. 

    그렇게 본다면 커뮤니티는 너무 쉽게 불화와 간극을 지우고 하나의 세계를 향해 일방적으로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소동으로서의 커뮤니티의 균열이 아니라 ‘하나의’ 커뮤니티가 이미 전제된 채 이들이 겪는 대소동이 바로 〈커뮤니티 대소동〉이다. 좌충우돌―“대소동”―하며 자신의 영역에서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에서, 〈커뮤니티 대소동〉은 일자의 목소리를 따른다. 하나의 계열체로 명명된 또 다른 공동체의 선례로부터 출현하는 소리를. 그 소리와 다른, 예외적인 개별자의 일상에서의 목소리가 바로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녹음된 소리이다. 
    관객은 자신의 옆에 놓여 있던 “소리 상자”를 통해 각자의 이야기를 할 시간을 가진다. 이는 나중에 공연에서 재생된다. 곧 공동체의 시간에 개인의 시간을 넣은 것, 이는 〈세시에서 세시, 네시에서 네시〉에서 프로그램이 주도하지 못하는 시간의 잉여를 우리가 운영해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독특한 개인으로, 나아가 저자의 위치로 구성한다. 이러한 각자의 시간과 녹음을 통한 사유/목소리의 재현 방식은 〈커뮤니티 대소동〉의 특이점인 동시에 공동체의 윤리를 구성한다. 

    다음 날 오후 5시 55분이 되고 온 메시지, ‘어제의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는 공동체 구성의 재확인이면서, 〈세시에서 세시, 네시에서 네시〉에서처럼 기억을 상기시키는 의도를 가진다. 〈커뮤니티 대소동〉은 〈몸의 윤리〉에서 시작해서 〈세시에서 세시, 네시에서 네시〉의 시간 실험의 자취를 일부 가져가며, 장애에 대한 현실의, 현재의 목소리를 일부 가져가는 것으로, 극적 세계에 대한 몰입의 요청에서 일부 비켜난다. 이는 물론 문학적인 화자의 서술에 가까워진다는 점에서 엄밀히 모든 말이 다큐멘터리적 기입이나 구술의 엄밀성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커뮤니티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커뮤니티를 재고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는 이진엽이 구성하는 커뮤니티에서 어떤 다른 향방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창작공감: 연출] 본 공연 - 커뮤니티 대소동

    공연 일시: 03.30. ~ 04.10. 평일 20시 / 토,일 14시 (화 공연없음)
    공연 장소: 소극장 판

    장르: 연극
    소요시간: 100분(인터미션 없음/준비시간 및 퇴장시간 제외) * 변동 가능성 있음
    관람연령: 17세(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작: 공동창작

    ■ 출연진
    김경림, 김민서, 김시락, 박규민, 박하늘, 이애리, 조재헌, 최선애, 최원석

    ■ 스태프

    공동창작: 김가은, 김경림, 김민서, 김시락, 박규민, 박하늘, 이애리, 이진엽, 장영, 조재헌, 최선애, 최원석
    구성: 장영
    무대: 송성원
    음악·음향: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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