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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의미화의 전략과 수렴되지 않는 의미 사이에서
    REVIEW/Visual arts 2022. 4. 14. 02:14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전시 전경(이하 상동). 봄로야, 〈유연한 손〉(2022. 종이에 혼합 매체, 15.8x22.7cm.).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라는 전시는 도시의 빈 공간을 잠재적 실천의 장소로 재인식하고 나아가 재규정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작가/팀은 실천 전략으로서의 작업을 선보이는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1949~)을 경유해 실재계로 옮겨질 수 있을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오드라데크”는 인식하기 어려우며 규정 불가능한 대상의 성질을 띠는데, 이 전시는 이를 도시의 버려진 곳이나 빈 장소, 쓰레기가 모이는 등의 장소로 상정한다. 
    이러한 장소가 상징계의 잉여 또는 그림자를 보여주는 곳에서 나아가 제도 바깥의 상상력이 틈입할 수 있다는 전제가 곧 이 전시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도시 빈 공간의 재인식으로서의 실천은 사실 공고한 사회 시스템에 균열을 내고 질문을 생성하는 예술의 몫을 전제하는데, 사실 이러한 전제를 가리는 “오드라데크”는 이 예술의 역할을 신비화하며 치환하는 기이한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오드라데크 자체는 어떤 의미를 표상하지 않는 부유물로 남는다. 

     

    일반적으로 전시가 큐레이팅의 언어와 각 작품의 봉합될 수 없는 어떤 간극과 균열 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오드라데크’는 작품들 자체의 공통된 본질을 가리키기보다는 작품들 역시 어떤 차이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명명 자체의 새로움은 미술 제도에서 파생되는 어떤 개념 생성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오드라데크라는 말 자체가 특정하기 어렵다는 특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시에서의 명명은 이중의 과제를 갖는다. 그 과제는 개념과 작품 모두를 향한다.

    오드라데크는 말 그대로 떠돌아다니는데, 각 작품 역시 하나의 의미를 띤 상징물로 머물기보다는 움직이며 하나의 의미 계열체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차원으로 옮겨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드라데크를 구체화하는 차원에서, 강정아 기획자를 비롯한 전시 연구 그룹은 오드라데크에 대한 여러 개의 정의와 함께 그 다양한 용례를 작업과 연관해 설명하며 개별 작품의 다른 특성을 조망해 내고자 한다. 그럼에도 결국 이는 작품을 특정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전략의 차원에 속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오드라데크라는 명명과 그에 따른 작업의 재명명은 예술의 자율성과 해석의 자율성 대신에 진리로서의 예술이라는 예술의 신비화 안에 작품과 그 해석이 침잠할 위험을 적잖이 감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봄로야, 〈자연 초과〉(2021. 종이에 혼합매체, 35x27.5cm.).

    핸드아웃 안의 강정아의 서문은 각 작품의 매체적인 특징과 특정 서사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작품들이 출발하며 관계되는 장소성을 보여주는 데 가까운데, 그렇다면 각 작품을 다시 기획의 언어에서 작품의 언어로, 곧 하나의 작품으로서 추상적이지만 특정한 ‘진리’로서 주어지는 오드라데크에서, 열려 있는 의미로서 붙잡히지 않는 오드라데크의 불균질하고 자유로운 속성으로 해석의 틈을 벌리며 이동시키는 작업이 요청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곧 오드라데크가 가진 진리의 속성을 고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오드라데크라는 본질이 사라진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물론 최후에는 기획의 언어로서 ‘오드라데크’를 개별 작품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살펴보는 작업 역시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오드라데크’의 의미를 일종의 슬로건으로서 교조적인 차원에서 완성시키는 히스테리안의 동명의 영상 작품인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2022. 싱글 채널 비디오, 00:04:00.)를 예외로 한다면,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봄로야 작가의 영상 작업 〈유연한 손〉(2022.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00:13:00.)일 것이다. 이 작업은 도시의 버려진 곳의 이미지와 오브제를 작품에 도입하는 한편, 마임으로 지난 삶의 시간을 재생한다. 이는 직접적인 재현이 불가능한 시간을 다시 불러오는 것과 다름없다. 무채색의 영상이 사라진 과거에 대한 멜랑콜리의 정서를 불러온다면, 보이지 않는 사물과의 접촉을, 사물의 생성을 생성하는 움직임은 사라진 것에 대한 미메시스의 열망을 투사한다. 

    봄로야, 〈가난한 천이〉(2021.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00:05:32.).

    봄로야의 또 다른 작업들은 장소에 대한 재현보다는 공간을 지표로서의 장소로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가난한 천이〉(2021.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00:05:32.)는 음악과 빠른 컷 편집의 기술, 어절이 횡으로 붙는 자막을 통해 리드미컬한 전개로 시청각을 사로잡는 작업으로, 쓸모와 쓸모없음의 이분법적 구도 아래 쓸모없는 것으로 처리돼 잘려나가고 버려지는 잡초에 대한 시선에 무분별한 도시 개발 논리가 적용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그러한 논리의 분열과 간극을 유도하고 지시하는 작업이다. 이미지들의 연쇄 작용으로서의 영상과 맞물리며, 봄로야의 회화는 장소에 반응하고 장소에서 돋아난다. 이 작업들은 드로잉의 특성을 살려 자유분방한 작가의 역량 자체를 드러낸다. 
    이는 선분의 힘 자체로서 재현의 영역을 비켜나되, 헝클어진 선분들, 덩어리진 입방체의 복합적인 대기로부터 비교적 간명한 의미로 초점화되는 듯 보인다. 제목과 같은 언어를 하나의 레이어로 덧입혀 그라피티 같은 느낌을 주는 〈Do what scares you〉(2021~2022. 종이에 혼합 매체, 79.3×55cm.), 동그란 땅의 영역과 그 위에 퍼져 나온 잡초들이 ‘희미한’ 누군가의 얼굴과 손이 겹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 초과〉(2021. 종이에 혼합매체, 35×27.5cm.), 두 개의 손이 서로를 향하면서 찰나에 미끄러지는 이상한 자장을 그린 〈유연한 손〉(2022. 종이에 혼합 매체, 15.8×22.7cm.)은 정서적인 조각들로 일련의 계열체를 이룬다. 각각 안으로의 응시와 그 전도된 외침, 생명력을 띤 고통과 연약함의 얼굴, 완성되지 않은 관계는 흐릿하게나마 어떤 연대를 구성한다. 

     

    지상에 위치한 공간 창문에 넣은 작업은 파란색 선분(테두리와 X자―지하에 위치한 공간 창문에는 파란색 선분이 없이 투명하게 그 선분이 인지된다.)과 그 바깥의 노란 선분들의 덩어리로 이뤄지는데, 이름 없는 이 작업은 명명될 수 없는 장소와 생명의 이름을 지시하면서 금지의 언어와 덩어리로서의 생명력―빛이 들며 드로잉의 듬성듬성한 간격은 자연의 틈으로 치환된다.―은 인간 문명의 자연에 대한 제어―슬픔과 연민―와 동시에 제어되지 않음의 역설―희망과 연대―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서로 우는 밤〉(2021. 종이에 혼합매체, 35×35cm.)의 흰색 덩어리―마치 얼룩처럼 돋아나온다.와 검은색 X자 경계선이 뒤섞이며 추상화되는, 작업의 구획과 그것을 초과하는 어떤 생명력의 양태에서도 반복된다.

    오선영, 〈Terrarium〉(2021. 싱글 채널 비디오, 설치, 00:40:00.).

    오선영 작가는 자신의 신체를 배경 일부로 만들며 전면에 드러내는 퍼포먼스와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초록 식물 위에 그것으로 덮이는 신체를 보여주는 〈Terrarium〉(2021. 싱글 채널 비디오, 00:40:00.)―테라리움, 밀폐된 유리그릇에 구현한 작은 정원의 뜻―과 흙탕물과 식물에서 몸을 뒤척이는 〈Paludarium〉(2022. 싱글 채널 비디오, 00:30:00.)―팔루다리움, 습지 생태계를 인공적으로 조성한 공간―모두 잠이 들며 그 환경 자체가 된다. 눈을 껌뻑이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장면 역시 공통되는데, 이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친밀하지 않은 타자의 형상을 취하는데, 인간으로 판별하기 힘든 다른 의식을 가진 존재가 강조되는 것이다. 봄로야의 작업이 인간 의식에 틈입하는 자연의 형상과의 정서적인 연대를 포착한다면, 오선영의 작업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탈형상에 직면하게 한다. 오선영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환경에 내어주면서 그 신체에 직면할 것을 요청한다. 

    우희서 작가의 〈Bad breath - 탐지도구〉(2022. 호박, 휴대폰, 아크릴, 헤드셋, 가변 설치.).

    우희서 작가의 〈Bad breath - 탐지도구〉(2022. 탐지도구, 호박, 휴대폰, 아크릴, 헤드셋, 가변 설치.)는 아마도예술공간의 자투리 공간 같은 공간을 아크릴로 양옆 가벽을 치고, 공간 벽과 연결된 무릎 높이의 타일에, 엎어 놓은 두 개로 분할된 헤드폰으로 서로 다른 소리를 듣게 하는데, 헤드폰 자체가 해체되어 떠돌아다니는 신체인 것처럼 관객의 수용에 의해 가변 설치로 위치하게 된다. 그것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끔 뚜껑처럼 바닥과 붙어 있지만, 달리 말하면 엎어진 가운데 미세하게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것은 공간에의 작은 반향에 가깝다. 닫힌 소리를 거슬러 능동적인 관람을 통해 이 소리를 택하면 그것은 어떤 데이터에 대한 읽기로의 변환 자체로만 수용된다. 어떤 좌표 혹은 시간에 대한 측정을 지시하는 이러한 음성은 역설적으로 장소에 대한 인지를 무화시킨다. 

    노드 트리, 〈땡볕, 초승달과 대추〉(2022. 캡틴의 수집품―수집된 무대의 일부, 잔해 더미에서 온 강철, 쪽나무와 참죽나무―딸기밭 하우스에서 온 강선, 그물망, 베어링, 래칫 렌치, 각종 고철, 비닐, PET, LED, MCU, 스피커, 배지, 표고버섯, 모래꽃이끼, 혼합매체.).

    노드 트리의 〈땡볕, 초승달과 대추〉(2022. 캡틴의 수집품―수집된 무대의 일부, 잔해 더미에서 온 강철, 쪽나무와 참죽나무―딸기밭 하우스에서 온 강선, 그물망, 베어링, 래칫 렌치, 각종 고철, 비닐, PET, LED, MCU, 스피커, 배지, 표고버섯, 모래꽃이끼, 혼합매체.)는 부여에서의 관계와 자연, 사물을 활용한 아상블라주 형태의 작업으로, 작품의 페달을 밟아 그 관계를 가시화하고 연장하도록 유도된다. 삐거덕거리는 페달과 부풀어 오르는 비닐과 무언가 크게 변하지 않는 작품처럼 이전의 장소와 시간은 그것 자체의 반향과 완성 대신 덕지덕지 붙어 조합된 이 사물-관계 동맹의 우연하고 비의적인 조합의 생경함 자체로 연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봄로야의 〈유연한 손〉에서 철근이 여기저기 삐져나온 콘크리트 덩어리를 하프처럼 배우가 즉흥적으로 치는 것과 같이, 이러한 실재의 사물은 장소의 맥락을 직접 전용하면서도 그것의 맥락을 해체와 조합 과정의 현재적 시간으로 두며 탈결정화시키는 차원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유연한 손〉이 우연히 그 맥락을 현재 새롭게 결정하며 유연한 움직임으로 이를 연장할 수 있었다면, 〈땡볕, 초승달과 대추〉는 버려진 것과 새로운 사용의 어떤 중간 단계에서 사물이 침묵하고 있는 사태 그 자체이다. 곧 이를 접촉하고 활용할 때 ‘이상한’ 사물은 크게 변하기보다 그것 자체의 우묵하고 우둘투둘한 표면으로 침강한다. 활기와 생동력이 없이 그것은 주체의 무(기)력한 동력에 의해 ‘아가리’를 벌리고 닫는 타동적인 사물로 자리한다.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는 도시의 이면의 장소로서 ‘오드라데크’를 불러온다. 이는 개발에서 밀려나는 또는 개발 바깥에 놓인 지역이라는 맥락과 결부된다. 이는 도시의 무의식적 공백의 공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얻는가. 지역 자체의 역사와 삶이 기록되지 않고 누락되었다는 점에서 도시와의 접점에서 근대의 역사로 재기입되어야 하는 차원에서 가치가 있는가.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는 이 두 가지 중 전자의 차원에서부터 시작하거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드라데크’는 도시 예술가의 다른 장소와 접면했을 때 오는 어떤 감각을 명명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한 감각은 장소의 이동과 또 다른 장소, 장소가 아닌 장소의 발견을 통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재는 특정 장소와 결부되는 것이거나 어떤 형태의 현존을 마주함이 아니다. 이는 두 장소의 경계, 두 시간의 사이에서 비롯되는 인식적 각성에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오드라데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수행적 과정의 일시적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결국 전시 연구 그룹 역시 이러한 수행적인 과정 아래 도시를, 작업을 재발명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에서 ‘오드라데크’는 우화적인 존재에 대한 상상력과 상상하기 힘든 도시 바깥의 감각과 그에 대한 명명의 어려움을 접붙인 결과에서 탄생했다고 할 것이다전시는 후자를 전자로써 상쇄한다. 그 근저에는 낭만화될 수 없는 또는 신비화될 수 없는 도시 개발의 이면에 대한 어떤 대응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방어인가, 또는 그럼에도 어떤 나아감일까. 그런 차원에서 ‘오드라데크’라는 명명은 예술가의 무의식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전시 개요]

    전시명: 제9회 아마도전시기획상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전시 일시: 2022년 3월 11일(금)~4월 7일(목). 화요일~일요일(월요일 휴관). 11:00am-6:00pm 
    전시 장소: 아마도예술공간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54길 8)


    기획: 강정아(제9회 아마도전시기획상 선정 큐레이터)
    참여작가: 노드 트리, 봄로야, 우희서, 오선영
    연구자: 강병우, 민주
    공간 연출: 천근성, 문우림, 아주
    제작 도움: 김정기, 이상철, 이헌철
    디자인: 파이카
    사진: 조준용
    전시장소: 아마도예술공간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54길 8)
    주최/주관: 아마도예술공간
    후원: 서울문화재단
     
    * 매주 금, 토, 일 오선영 작가의 〈Paludarium〉 퍼포먼스 진행
    – 16:00~16:30 / 16:3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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