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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윤환 작/연출,〈기후비상사태: 리허설〉: 리허설의 과제
    REVIEW/Theater 2022. 6. 3. 01:18

    전윤환 작/연출,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권근영, 전민호, 서지우, 신사랑, 김다흰, 박근영, 정대진, 김세환, 정슬기, 김예은, 강민지 배우.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이하 〈리허설〉)은 기후 위기에 얽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다른 한편 이는 전윤환이라는 해당 작품의 작가가 그러한 내용을 고민하며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여러 경험과 그에 동반되던 궁핍함을 함께 드러낸다는 점에서, 곧 이를 여러 배우로 분화시켜 상연함 자체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리허설〉은 그의 지난 〈전윤환의 전윤환 - 자의식 과잉〉과 결을 같이 한다. 
    이 후자의 차원은 그가 기후 위기에 대한 예술가의 역할이나 그러한 내용 자체에 대한 표현 형식을 탐구하는 데 따르는 고민보다는 작가로서 그 주제와 나 사이의 거리를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글을 데드라인 안에 퇴고해야 하는 조급함과 피로도, 체념 등의 일련의 작가로서 받는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자의식으로 수렴한다. 그와 주제 사이에서의 거리는 철저히 그의 개인적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기후 위기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리허설〉은 한 개인의 내재적인 곤궁을 전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난 왜 유류세 인하를 인류세 인하로 읽었을까?”라는 반복되는 문장은, 기후 위기 관련한 모든 문제가 인류세의 위기로부터 왔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또는 인류세에 대한 인류의 무의식적 두려움을 대표한다기보다는 기후 위기 관련해서 무언가를 써야 하는 작가 고유의 강박적 의식을 보여준다. 곧 여러 차례 강조함으로써 주제를 애써 함축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 문장은, 내가 기후 위기에 관해 써야 함을 전제하는 것에서 나아가 내가 왜 그렇게 일상을 기후 위기의 한 용어로 오인할 정도로 사안에 중독되어 이를 글로 쓰고 있는지를 회의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결국 작가의 창작 동기가 기후 위기 자체의 문제의식보다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왔음으로 수렴되는 듯하다.

    (사진 왼쪽부터) 박근영, 정슬기, 김세환, 김예은, 김다흰, 권근영, 정대진, 전민호, 강민지, 서지우, 신사랑 배우.

    물론 기후 위기 관련해 친환경 이미지 구축을 강요받는 기업들의 광고가 다시 환경에 대한 이념이 보편화되고 일상화된 차원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그럼으로써 환경은 안정화되고 있다는 판타지를 수여하며 악화를 구축하는―이나 화성 이주의 꿈이 신분 계층에 따른 구분 짓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 등을 드러내는 것은, 기후 위기의 외연을 넓히는 하나의 계기이며 기후 위기에 대한 현 실상을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인지 감각을 선사한다고 할 수 있더라도, 그것만으로 작품의 가치는 이미 충분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후 위기 관련한 사회적 구조를 재편하는 운동성과 그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러한 사실들과는 별개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러한 대안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작가가 가진 강박이 기후 위기와 다른 서브 텍스트로서 극 안에 너무 주요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곧 그러한 개인의 문제의식에 대한 해소가 부상하기 시작한다.

    〈리허설〉은 어떤 것도 신분의 격차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며, 현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후 위기와 별개로, 동시에 기후 위기와 함께 (더욱) 나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입장은 작가 자신이 가진 회의주의적 입장―신분적 적대의 해소 불가능성―을 보편화하는 차원이 전제된다. 〈리허설〉은 기후 위기를 맞아 인류 멸망 이전에 1분 남았다고 하는 기후 시계를 거꾸로 돌려 현재를 계속 반복해서 상연한다고 전제한다. 이는 대안 서사가 가능하지 않음을,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되돌릴 수 있지 않음을 전제한다. 

    정대진 배우.

    리허설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부인하는 연극의 수행은 여전히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리허설(‘이라는 명명’)은 어떤 완성을 굳이 유예한다. 연극이 영원히 완성될 수 없음을, 그보다 완성된 연극이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리허설’이라는 이름은, 극작에서 무대로 연장되는 과정에서 그 극작이 날것의 목소리 자체로 어느 정도 머물러 있음을 또는 파편의 흔적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전윤환의 자의식과 자아가 투영되는 무대는 이 무대를 이루어 가는 말들의 상연이 전윤환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전윤환의 자의식이 담긴 글이 전윤환 연출의 무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배우들이 전윤환과의 거리를 연기로 봉합하고 있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전윤환은 무대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로 계속 살아간다. 따라서 리허설은 전윤환을 수행하는 전윤환이 아닌 배우들의 연기를 시험하는 장에 내재하는 특성―원본과 복제본의 차이를 수행―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보인다. 

    〈리허설〉의 특이점은 전윤환을 열한 명의 배우들이 나눈다는 점인데, 이는 전윤환 그 자체의 역―김세환 배우―도 있고, 암묵적으로 전윤환의 말과 생각을 옮기는 존재자들이 있는 것으로 나뉜다. 전자는 하나의 독립된 전윤환의 자아로 분하며 그 밖의 전윤환을 이름 모를 존재들로 대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이 무형의 존재들은 일상을 연기하는 현대인을 연기하며 뭔가 무대의 잉여로 자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대부분이 일상을 재현한 이 무대를 등‧퇴장 자체로 약간의 변화를 주거나 일상의 사소한 행위들을 쌓아 올림으로써 발화를 하는 게 아니라 발화가 비어 있는 풍경 자체로 환원되는 구성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리허설〉은 곧 전윤환이라는 작가의 자의식이 투영되었음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그의 말을 글로 다시 말로 전환하는 절차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윤환’의 분신을 직접 등장시키는 경우를 제하면, 누가 그 발화를 하건 크게 상관이 없다. 이는 캐릭터가 만들어질 이유가 없으며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함을 의미하는데, 배우는 일종의 자신이 아닌 자(임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존재하기가 과제처럼 주어지게 된다. 

    (사진 왼쪽부터) 박근영, 강민지, 김다흰, 정슬기, 김예은, 신사랑 배우.

    따라서 일상을 이루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마치 환영처럼 이 시공간 사이를 떠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기묘한데, 너무 많은 인원이 무대에 투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를 해소하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데, 〈리허설〉은 무대의 포화 상태를 통해 기후 위기의 전제가 되는 과잉 인구의 세계 현실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리허설〉이 드디어 한 사람의 발화로 안정감을, 진정성을 얻기 시작하는 건 뭔가 암전 이후 한 차례 접힌 무대를 겨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펼쳐놓을 때이다.
    이는 전윤환 작가가 기후 위기 관련 환경단체 워크숍을 참여하고 해당 워크숍에서 읽었던 일종의 편지 형식의 발제문을 다른 배우가 읽을 때로, 기후 위기에 대한 체감보다는 기후 위기가 체감되지 않는 현실의 실상과 자신의 현 상황에 집중하며 무엇보다 현실의 저자, 연출로서의 지위에서 번민하던 전윤환이라는 상징계의 인물이, 처음으로 직접 체험한 개발 이슈가 있는 천혜의 환경들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자로서 위치하면서 쏟아낸 말들의 재현이 ‘수행’될 때이다. 곧 기후 위기에 대한 담론과의 거리를 해소하는 건 현장에서 사라진 또는 사라질 어떤 환경을 직접 체험하고 나서이다. 광주 아파트 붕괴 참사 현장과 가덕도 신공항 등을 갔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는 그것이 담백한 데다 그의 의식 자체가 그의 진정한 변경을 통해 빚어진다는 점에서 기후 위기와 관계 맺는 개인의 관점을 어느 정도 보편성의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앞선 극에 주요하게 놓인 개인의 분열이 불필요하거나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그 분열에 얽힌 개인의 자의식이 공연의 형식으로 전개되어 가며 기후 위기는 무언가 명목상의 괴리감으로 주체에게 주어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후 위기 관련한 작가의 자의식이 비로소 문제의식의 단서를 찾을 때쯤 공연이 끝난다. 

    〈리허설〉은 처음에 암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암전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암전을 좋아했던 전윤환의 목소리를 배우가 대체한다. 이는 마지막에 한 번 더 반복된다. 이때 배우는 또 바뀌며 한 명씩 번갈아 하는 것으로 전환된다[각주:1]. 극장 자체의 특수한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미래 극장이 남아 있을지에 대한 회의의 맥락에서 이를 연장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미래 극장에 대한 논의가 조금 더 촘촘하게 극 중간중간에 들어가지 않았음의 아쉬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왼쪽부터) 김세환, 김예은, 김다흰, 정슬기, 강민지, 서지우, 정대진 배우.

    ‘리허설’은 현재를 반복, 복기함으로써 미래의 좁은 틈을 열어젖히는 현재의 성찰적인 사유를 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형식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허설〉은 이따금 마치 데자뷔처럼 앞선 장면을 반복한다. 무대를 시험하고 그 시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곧 인류의 시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리허설적 주술이 연극의 놀이성과 실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리허설〉의 암전은 연극의 시작으로 돌아가며 연극 자체의 질서를 수용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가 극이 말하던 기후 위기와 직접 관련을 맺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결국 가장 나중에 그리고 가장 처음에 두 번에 걸쳐 나왔다는 점에서 이는 주제적인 메시지로 기능한다. 하지만 이는 전윤환이 가덕도 신공항 현장에 갔을 때의 어떤 숭고함과도 맞물려 있지 않은가.
    곧 ‘경험’으로 완전히 펼쳐지지 않는 강렬한 원-체험으로서 극장도 어떤 자연의 모습도 전윤환에게 존재한다. 그것이 곧 기후 위기와 극장의 어떤 위기가 맞물리며 그로부터 어떤 대안을 찾아야 할 동기를 마련해준다고 할 수 있을까. 곧 〈리허설〉은 리허설 자체로 닫힌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2.5.11.~6.5. 평일 19시 30분 / 토, 일 15시(화요일 쉼)
    공연 장소: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관람등급: 8세 이상 관람가(초등학생 이상) 
    소요시간: 100분(인터미션 없음)
    작/연출: 전윤환 
    문의: 1644-2003 | 국립극단
    자막서비스: 영문 및 한글(일부 회차)
    배리어프리: 한글자막, 음성해설, 한국수어통역(일부 회차)

    ■ 출연진
    강민지, 권근영, 김다흰, 김세환, 김예은, 박근영, 서지우, 신사랑, 전민호, 정대진, 정슬기

    ■ 스태프
    드라마투르기: 장우재
    에코드라마투르기: 박지선
    무대: 박상봉
    조명: 김창기
    안무: 금배섭
    음악: 카입
    영상: 차지량
    의상: EK
    분장: 남혜연
    소품: 김종은
    음향: 이현석
    조연출: 권수현
    협력: 지속가능발전경영센터

    1. 1. 일종의 해체주의적 강박이 마지막까지 자리하는 듯하다. 캐릭터의 안정감과 배우 자체의 안정감은 분명 다르다. 아마도 전자를 지양하기 위해 후자를 해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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