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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새 작·연출,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미래 앞에서 우리는…
    REVIEW/Theater 2022. 11. 8. 14:14

    정진새 작, 연출,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사진 제공=ACC](이하 상동).

    끊임없이 지구의 끝을 향해 걷는 ‘여행자’, 산티아고 순례길 반대편으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시베리아 길을 향한 그의 여정은, 온라인 게임 유저들의 화제를 모은다. 동시에 기상청 소속의 기상탐지 시스템 연구원들의 관찰 대상이 된다.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이하 〈순례길〉)에는 알 수 없는 자의 미지의 좌표가 전제되고, 이는 그 바깥에서 사유되고 추적되어 현재의 삶에 들어온다.
    그의 좌표는 일반적인 인간 사회의 바깥에 있지만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한 VR 체험 방식의 가상 세계에서는 새로운 이정표가 된다는 점에서, 기술은 일견 현실을 더 잘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그 기술이 재현할 수 있는 사전 데이터 확보 차원에서 오히려 ‘그’의 존재는 특별하다. 비가시화된 장소의 영역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특별한 그의 행보, 그리고 그를 찾는 수많은 사람으로 인한 집적 경제에 의거한다.

    이 미지의 존재에 관한 숙제를 풀기 위한 연구원 AA와 BB 두 존재의 질문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그는 게임상에서‘만’ 매개되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고 따라서 그의 내면은 이따금 실루엣으로 등장하는 모습으로만 반추될 뿐이다. 이 같은 간극은 횡단하지 못하는 소통의 단락을 이야기한다―개인의 정체성은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럼에도 ‘그’의 방향은, 끝은 무언가를 함축한다. 출구는 없다! 이는 팬데믹으로 통제되고 봉쇄된 사회상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반영한 것일까. 시베리아라는 유사성의 기호로부터 빙하가 녹고 있음으로 반증되는 인류세와 기후 위기를 포괄하는 것일까.

    출구 없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를 앞지를 수 있는 방도, 소통의 가능성을 극은 차단하고 있다―이는 물론 그의 이미지만을 경유하는 세계에 우리 역시 속해 있다는 가정 아래서다. 여기서 “정체성의 위기”가 아니라 “비현실의 위기”라는 말은 일견 현실이 매개될 수 없다는 자각을 유예한 채 현실이 온전히 매개되지 못하는 또는 왜곡되는 현상에 관한 비판을 간접적으로 지워 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계에서 후자의 차원에서 현실 대신에 비현실을 선택하려는 것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면, 현실이 사라지고 있음을 지켜보는 기상청의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적막 가운데 ‘그’의 목소리처럼 ‘독백’으로 반복되며, 이러한 현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반면 ‘그’의 고독한 실존적 결단은 외화면 목소리처럼 담긴다. ‘그’는 무대의 가에서 출현하며 현실의 가장자리임을 주지시킨다. 그는 인류의 새로운 영도를 모색하거나 그 반동으로 추락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장 주요하게 그의 행위는 배우자에 대한 애도 행위라 할 수 있다. 절망이 뒤섞인 그의 고투와 함께 미래에 대한 공포와 과거의 어린 시절로 침잠하는 AA, 날씨가 아니라 그를 관찰하고 있는 것을 회의하는 BB 역시 모두 누군가와 합치될 수 없는 각자의 내면을 갖는다. 이러한 내면은 무언가에 대한 명확한 시도나 투쟁 따위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으며, 서로의 관계 양상으로 관철되지도 않는다.

    〈순례길〉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다고 볼 수 있는데, 끝내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은 ‘그’를 추적하는 극의 중심인물 AA와 BB의 모습에 오버랩된다. 부조리극이 나온 시대적 배경이 공통되지만 〈순례길〉은 공통된 모티브와는 달리 일종의 CCTV처럼 기능하는 게임이 극단적으로 존재를 매개하며 현실에 과포화되는 비현실이 실제적인 현실에서의 관계와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며, 고도가 소셜 미디어상의 커뮤니케이션이 미끄러지는 지점에서 탄생하는 것임을 적시한다.

    오히려 〈순례길〉은 체호프의 고전 『바냐 아저씨』의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를 몇 차례 전유하며 기후 위기를 맞은 인류의 최후를 냉소적으로 수용하는데, 이는 일종의 피처링처럼 언어 유희적 차원에서 소각된다. 이는 〈앞으로〉의 익숙한 노래 가사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을 다 만나”에서 선회하여 “려는 건가요.”라고 끝맺는 BB의 말과 유사한데, 이는 엄밀히 재현도 아니고 변주도 아닌 인용하고 있음 자체를 드러내는 메타 언어이다.
    그것은 언어를 언어의 표면으로 수렴시키는 일차적인 기호 놀이이며 동시에 해당 언어가 지닌 컨텍스트로 수렴함을 막는 방어적 제스처로도 보인다. 가령 BB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동방견’과 ‘문록’, 곧 동방의 개와 글을 쓰는 사슴의 절합으로 전유해, ‘그’와 그의 반려견을 묘사하는 장면은 고전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 것으로써 고전에 주눅 들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정진새의 극작은 기본적으로 고전 드라마가 가진 고양된 정서를 극적으로 체화하지 않음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AA와 BB가 ‘그’와 직접 관계를 직접 맺지는 않으며, 관찰자의 시점, 곧 작가의 시점에서 거리와 태도를 형성한다는 점은, 그가 주인공처럼 심각해지거나 그의 상황 안에 온전히 침잠해 있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지난 작업인 〈외로운 개, 힘든 사람, 슬픈 고양이〉(2021)에서처럼, 대화는 정보를 생산해 내고 시대적 의제를 논구하며 바깥을 매개하는 창구가 된다.
    앞서 인용으로부터 출발한 언어 유희적인 전유가 고정된 의미에 붙잡히지 않으려는 몸짓과도 같다는 차원은, 교훈이나 의미를 소거하는 차원의 또 다른 인용의 방식에서도 드러나는데, 소위 지식 채널과도 같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보―중세 이후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스탈린 시절 공사 중 사망한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 그대로 묻힌 콜리마 대로―와 그것이 갖는 그 자체의 메시지는 라디오라는 인용부호 안에 담김으로써 단지 하나의 배경지식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으려는 것과도 상응한다.

    〈순례길〉은 깜빡이는 무대의 눈, 곧 수많은 암전을 통해 무대의 하나의 구조적 언어를 만든다. 이는 ‘그’의 행방의 특이점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점철된 AA와 BB의 일상이 거꾸로 어떤 큰 의미가 없음을 가리킨다. 결국 사건을 기다리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이 우리의 삶 일반이 되었음을 가리킨다고도 할 것이다. 곧 우리는 오프라인을 온라인으로 매개한 ‘비현실’을 통해 삶을 감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깜빡이는 세계는 파편화된 언어들과 불안정한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세계의 총체성을 ‘그’를 통해 (현상학적으로 인지함으로써) 획득하려는 인류의 시도는, 마치 오프라인을 온라인으로 완전히 번역하려는 시도이기도 하고, 그 온라인의 세계로 오프라인의 세계를 대체하려는 시도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현실과 비현실을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쉽게 등치시킬 수 없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는 우선 경계되어야 하겠지만, 〈순례길〉은 ‘비현실’ 자체가 이미 현실과 뒤섞이는 세계상―이미 비현실이 현실을 내파하고 있다.―을 기술하면서 동시에 현실이 비현실 뒤에 가려져 있음 자체도 드러낸다. 이러한 ‘현실’은 곧 실재의 사실일 것이다. 곧 비현실은 하나의 현실이지만, 실재는 비현실 너머, 그리고 현실의 미세한 틈에 있다.

    〈순례길〉은 깜빡이는 세계와 꺼져 가는 지구, 헐거운 추적과 맹목적 추종 속에 재잘거리는 언어와 이따금 스쳐 가는 언어유희가 있다. 결과적으로 현실에 대한 번역과 믿음의 차원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 거대한 믿음의 뒤편에는 평범한 인간의 애도가 오인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순례길〉은 아이러니하다.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전기를 끊으면 사라지는 전자 이미지처럼 불연속적이며, 또한 데이터의 차원에 속한다. 나아가 이 세계 자체가 그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질 수 있다면, 또는 암흑천지로 변화할 수 있다면. 곧 이러한 깜빡임은 〈순례길〉이 가진 가장 불길한 유머라 할 것이다. ‘그’에 관한 추적이든 추측이든 ‘그’의 비합리적 또는 비논리적 행위에 대해 전념하는 것이 희망 없는 미래, 영웅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일지 모른다는 점을 〈순례길〉은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순례길〉은 세계의 공백에 주체의 공백을 더한다.

    [공연 개요]
    공 연 명 :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연극) *본 공연
    일    시 : 10.20.(목)~23.(일) 평일 19:30, 토일 15:00  | 4일 4회
                    *국립극단 11.2.~11.27.(총 23회) / 백성희장민호극장
    장    소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극장1
    러닝타임 : 100분
    관람 연령 : 8세 이상

    ■ 작·연출 : 정진새
    ■ 출연진
    AA(에이에이) 외: 이은정
    BB(비비) 외: 정슬기
    그 외: 전선우

    ■ 스태프
    무대: 임은주
    영상: 백종관
    조명: 이혜지
    음악: 정혜수
    음향: 이현석
    의상: 이예원
    소품: 장윤정
    분장: 장경숙
    조연출: 정혜린
     
    ACC 발굴 ‘원천 소스 확장’ 및 공연화, ACC × 국립극단 공동제작
                       * 2020 ACC 스토리 공모전 당선작 희곡 개발 “극동시베리아순례길 ”(각색 정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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