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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유인매장〉: 유인(誘引)하는 유인(有人)들로서 극장REVIEW/Theater 2025. 11. 4. 22:12

김상훈, 〈유인매장〉포스터. 〈유인매장〉은 실재의 오프라인과 넷상의 온라인이 연동된 〈유인매장〉은, 무인매장을 특정 스케줄표에 맞춰 “출연/노동”자를 그것에 투입하는 것으로써 유인매장으로 전유하는 한편, 온라인상의 중개와 개입을 통해 이를 다시 전유한다. “서울 강북구 번동 470-1 1층 무인아이스크림할인점 아가 변동점”이라는 실제 장소를 기준으로, 그와 연동된 웹페이지가 여러 차원에서 연속적으로 상황을 기록하고, 또한 유저 역시 로그 기록을 남기며 참여 가능한데, 이는 카카오톡의 오픈 채팅으로 연장되는, 일종의 스트리밍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는 장소 일부만을 비추는 매우 해상도 낮은 카메라 렌즈를 경유하며, 그 장소에 대한 결여된/불충분한 시선과 텅 빈 제스처를 드러낼 뿐인데, 따라서 그 밑에 따라 오는 출연자의 로그와 유저의 로그에 (더욱/상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로부터 〈유인매장〉은 자신의 장소 특정성의 근거를 실제의 장소가 아닌 다시점의 웹 공간으로 방출할 수 있는 그 서버 자체에 두게 된다.
이러한 웹 페이지의 연동은 이곳에서 저곳을 향한 공현전된 장소로 상대화하고 더 많은 보이지 않는 장소―이는 존재로 정체화된다.―에서의 참여/접속을 낳는데, 결과적으로 〈유인매장〉은 본래의 실제 장소를 온라인상의 전유를 통해 웹상의 각자의 신체에게 공여하며, 본래의 장소적 기능을 전도시키고 온·오프 되는 접속 창구로 재위치시킨다고 할 수 있다. 〈유인매장〉이 실제 파는 건, 보여주는 건, 더 정확히 공여하는 건 이 매장(의 이미지) 자체이며, 실제 매장에 들러 물건을 소비하는 행위 역시 새롭게 갱신된 이 매장에 대한 경험으로 더해진다.
결국 중요한 건 로그인 것 같은데, 곧 이곳에 대한 경험은 오로지 로그를 통해서만 매개될 수 있으며, 전파되고 승인되며 경험으로 인증될 수 있다. 실제의 장소가 그것을 반영해내는 건 아니다. 따라서 ‘유인매장’은 일종의 인증 목적을 위한 유인의 장소이며, 그 경험의 등록을 위해 실재하는 장소로서 위치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무엇을 파는지가 전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기보다 그곳에서 실제 무엇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장소의 정체성보다 우선하는 건 장소에의 각기 다른 존재의 정체성이며, 장소에의 결속이다.
장소의 전유는 실제의 장소를 그 전과 같이 이행되는 장소로 매개한다는 점에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실제의 장소에서는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나머지를 체험한다는 것, 카메라-웹의 지연된 시간의 직전과 동기화된다는 건 무슨 의미인 것일까. 로그 기록 너머의, 로그로 매개되지 않는 경험은 존재할까. 아니 로그로 매개하지 않고 남는 경험이 유효할 수 있을까. 그 바깥의 경험(들)이 장소를 초과하며 그 장소에 대한 유일한 경험을 보증하는 것 아닐까. 그곳에 자리한 이들 역시 자신들의 로그 기록에 진정성을 저당 잡힌 듯 보인다.
‘유인매장’은 협소한 극장이다. 거기에는 한 명의 ‘인간’과 몇 가지 장치 혹은 설치가 더해질 뿐인데, 8월 17일 방문 당시, 앞서 언급한 카메라, 더 정확히는 카메라 렌즈 회로가 출입문 근처 왼쪽으로 끝쪽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이는 정확히는 매장의 일부 공간을 비추기보다 레고로 된 익룡-비행기를 찍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연결선의 사선 방향으로 더 앞에 있는(=출입문 쪽에 더 가깝게 있는) 에어컨으로부터 나오는 바람에 의해 카메라와 익룡이 함께 휘날리며 관계 맺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실제 현장에서는 공간에 대한 반영이라기보다 일종의 익룡의 상연이자 익룡과 카메라의 상연―또는 유동하는 설치 작품―이었던 것이다.
문 앞에는 녹음기가 있었고, 이는 기록용으로 추정되었다. 녹음기와 카메라 사이에는 홈캠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이는 실제 무인매장의 CCTV 용도인 듯 보였다. 다시 카메라 아래에는 노트북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음악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열화된 카메라 화면은 조금 더 핍진한 경험을 위해 조금 덜 가시화하기 위한 조처일까, 아님 현장에 더 큰 얼룩을 남기지 않기 위한 그 자체를 비가시화하는 조처일까. 애초에 카메라가 덜 매개하는 것이 현장의 더 매개할 무엇을 위한 것으로 볼 정도의 실제 차이가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매개의 범위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또는 그 국소적인 차이 자체를 향한다고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이곳이 실제로도 별 특별할 것이 없음을, 텅 빈 기호로 연장되는 것임을 자조하는 것 아닐까. 파리 끈끈이 같은 무게 없이 흩날리는 오브제의 심미적 치환물로서 공간에 더해지는 행위에 스스로를 대입하는 것 아닐까.
카메라 모빌과 익룡 모빌의 연결 네트워크는 이곳이 예측 불가능한 유동하는 장소, 곧 그 흐름이 예측 불가능성으로 측정되는 장소임을, 동시에 그것을 측정하고 기록하는 이 역시도 그 흐름의 일부임을, 또한 고착된 형체 없음을, 부유함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카메라가 이곳이 유인매장임을 증명한다면 반대로 스스로를 그곳 앞에 위치시켜 자신의 존재를 증빙할 수도 있는데, 이는 무인매장(의 단독자)임을 드러낸다. 곧 그가 이곳의 임시적으로 방문한 직원임을―“노동자임은 드러내고 퍼포머임은 감출 것”―, 실제 그렇지 않으나 그러한 것으로 위장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하며 무인매장으로 이곳을 연장하는 행위가 카메라 안에서도 핍진한 것으로 연장되(어야 하)는 매뉴얼의 연기가 현장만이 아닌 그 너머의 카메라를 향한 연기의 일부임을, 카메라가 일종의 터널로서 상호 교차되는 순간 하에 성립되고 있음을, 곧 그 너머(의 존재)를 탄로 나게 하는데, 이는 무엇보다 그러한 행위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음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조악한 설치물을 가장한 카메라, 비교적 돋보이나 문 앞이라 나갈 때 뒤늦게 인지되는 녹음기라는 기록 장치, 음악―을 트는 용도로 연결된 닫혀 있는 그리하여 기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둔 노트북, 비가시화되는 가짜 직원, 그리고 테이블 중앙의 ‘유인매장’의 명함-정보가 무인매장 위에 부착된다. 그러니까 진짜 가시화는 이 명함인데, 유일하게 너머의 입구를 가시화하는 이 명함은 그것을 둘러싼 상품들로부터 너무 미약하다 또는 그것에 짓눌려 있다, 반면 그것은 실재의 작은 조각으로 그 틈새로부터 응시를 산출한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는 건 이미 이곳이 유인매장임을 알고 있는 자뿐이다―우리가 하나의 응시로 체현된다. 따라서 현장을 마지막으로/진짜 완성하는 건 이 작고 얇은 명함이다. 이것을 보기 위해 현장을 찾아야 하는 것인데, 이는 이미 홍보에서, 그리고 공연이 있기 전부터 온갖 곳에 위치시키는 유희적 조각으로 노출된 것이었다.
명함은 상품으로부터 저항한다기보다 상품으로 소비되며 사라지고 대체되는 무한한 흐름 아래 속하지 않으면서 증식할 수 있는 형태를 단지 보여준다. 그것이 예술의 조각임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곧 대상을, 예술을 물신화하는 게 아니라, 그 행위 자체를 가시화하며 일반화하는데, 이때 예술은 무용한 것―행위―으로 지정되며, 그 대상은 붙잡을 수 없이 떠도는 기표로서 하나의 원환을 체결한다. 곧 행위자 스스로가 사라지며 공동체의 장소성을 임시적으로 결속하는 어떤 환원의 행위로부터 대상은 곧 명함은 비물질화된 이미지로 뒤집힌다.
단지 각각의 장소에서 즉흥적으로 아상블라주되며 전유되는 그 파편적 조각이 무의미하게(나마) 공간을 점거한다고 주장될 때 같이 묶이는 그 행위자들의 비가시적 환원이, 예술의 무용함을 곧 예술로 지정한다. 곧 예술의 틈새로부터 예술의 가능성이 쓸모없음의 형식으로 출현한다. 그런데 이 똑같은 이미지의 재생산이 몸들과 결합하며 증식함에 따라 그것은 대상의 지위를 벗어난다 또는 대상으로부터 구제된다. 곧 조각이 조각을 다룰 수 있는, 감각될 수 있는 행위로 옮겨 가는 가운데, 집단적 행위가 불특정한 공동체에 대한 증명의 절차로 공여하는 가운데 대상은 하나의 ‘의미’로 증폭된다.
이 명함의 편재하는 이미지는 또한 탈장소적 부착의 차원에서 미약한 자기 근거로의 소급을, 미소한 생산과 가산의 방식을, 그로부터의 은폐와 도피의 기제를 상연한다. ‘유인매장’은 극장의 대체가 아닌, 전적으로 새로움의 극장을 생산하는 대신, 극장이 일시적으로만 어쩌면 존재할 수도 있음을, 또는 기존의 극장이 일상의 바깥에 있으며 그리하여 낡고 고루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는 이곳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기에 연극/극장이 된다는 ‘빈 연극’의 전언을 두꺼운 일상의 증명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쓰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그것이 기입하는 건, 상연하는 건 정작 연극이 아닌, 일상(의 틈새)이다, 자기를 부존재로, 일상에 끼어 있는 사물로 입증하는 행위의 절차 안에서.
일상은 두껍고 예술은 한없이 가볍다. 다시 말하면, 대상은 무거운 실질로서 반복되고 반복되기에 무의미하다면, 명함은 무의미한 반복의 놀음 자체를 위해 존재하며 자신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유효하다. 그 반복은 주체로부터 사라지며 그 현장에서 외설과 얼룩의 사이를 횡단하기에 오직 그 스스로가 응시할 것이기에, 응시하는 것 외에 어떤 기능도 달성하지 않을 것이기에 예외적으로 현존한다. 쓰레기로서 예술은 소비되지 않으면서도, 무가치하면서도 유효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명함은 예외적인 수신자 바깥의 수많은 가짜의 수신자들만 양산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무용함을 내재적으로 승인하며 그 자체로 외화한다, 혹은 은폐된 것으로 가시화한다. 이는 곧 유인매장이 무인매장과의 틈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아마도 카메라 역시 그러할 것이다.―과도 상응한다. 여기서 출연자의 “한 것”, “안 한 것”, “감춘 것”의 3항의 로그 기록 작성의 의무는 일종의 무인매장에서의 품목 관리 일지를 전유한 것으로, 노동자와 퍼포머의 틈에서 그 스스로가 어떻게 자리할지를 그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결정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를 신경증적 존재로 만든다.
그는 스스로 대타자의 결여를 채워야 한다. 그는 이곳에서 초과된 존재로서 자신의 잔여적 차원을 공간과 결부 지어야 한다. 자신의 행위가 오인되도록 공간의 질서를 따라야 하고 그에 녹아들어야 하며, 또한 자신의 행위가 텅 빈 것임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이중적으로 연기를 해야 한다. “노동자임은 드러내고 퍼포머임은 감출 것”은 노동자와 퍼포머의 분명한 틈을 전제하고 있고 그에 대한 자각을 경유해서 그 틈을 어느 정도나마 상쇄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유인매장〉은 극장보다는 극장이라는 프로세스를 가시화한다. “출연”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이를 극장의 구조로 자연스레 확장, 환산해보면, 전유라는 방식에 따라 실제 무인매장의 기능을 계속 가져가고 있는 이곳은, 근방의 불특정한 소비자들, 여전히 무인매장의 기능적 장소로 사용하는 이들을 제외한, 이곳에 더해진 레이어를 인지하고 방문하는 특정한 관객의 수보다 출연자와 스태프가 더 많거나 많을 수도 있으며, 그와 동시에 그중 단 한 명(씩)만 대면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나흘 동안 24시간 전체의 러닝타임을 결코 다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연은 공간이 아닌 시간에 특정되고 관계는 오직 관객과 출연자 한 명에서만 이뤄진다.
참여자 로그 기록 또는 채팅방 내 출연, 곧 출연 너머의 출연 혹은 가시성으로부터 전략, 의지, 의도, 내면, 성찰 등이 노출되고, 나아가 이는 애초에 하나의 공연 팀의 제작 과정 전반을 노출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퍼포머로서 비가시화 전략과 퍼포머임을 드러내는 발화의 정체성은 양극단으로 분열되며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 사이를 즐기며 연기하며 자신을 기록하고 관찰하는 자신으로의 또 다른 환원을 연기하게 된다. 이는 외설적인데, 그 자신의 내면이 철저히 이 온라인 극장 안에(서만) 전적으로 투여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가 노동자의 일의 외양만을 검수한다면, 〈유인매장〉은 그 내면까지 철저히 포획한다.
〈유인매장〉은 이 무인매장을 가장하는 실제의 유인매장 너머에서 스스로를 지켜보고 확장하는 잔여로 구축된 공간, 또 다른 진정한 무인매장―실제의 어떤 손님도 없는―으로서의 극장의 뒤편으로 반드시 되돌아오며 유인매장이 별도의 무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텅 빈, 닫힌 극장 공간을 형상화해낸다. 그러니까 〈유인매장〉은 부재하는 따로 극장을 가설하지 않고 그 극장에 기생하고 그 극장을 원격 조종하며 사실 그들이 따로 또 같이 있는 곳이 극장임을 분열증적으로 확인한다. 이에 따라 관객 역시 분열되는데, 극장과 매장 사이에서, 그리고 극장 너머가 곧 극장이 되는 경로 안에서 관객의 정체성이 전도되고 과잉된 참여 감각 안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퍼포머가 퍼포머로서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관객의 정체성 역시 유저의 그것으로 지각 변동을 겪는 것이다.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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