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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진, 〈수평선 옆에 (여전히)〉: 진동하는 서사 혹은 시각
    REVIEW/Theater 2025. 11. 3. 01:29

    이민진, 〈수평선 옆에 (여전히)〉 [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민진의 〈수평선 옆에 (여전히)〉에서 누드는 지배적인데, 이는 어떤 ‘수평선’을 상기시키는 서사의 시작과 연결된다. 누드는 그 서사의 일부로서 튀어나와 그 서사를 완성시키는 보족물이자 수행적인 신체의 매체적 전환으로서 그 서사를 찢고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누드는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반향, 처음의 순전한 픽션이 아니라 두 번째 다큐멘터리적 기록의 차원에 대응하는, 감각의 차이를 가진 똑같은 춤의 반복으로 이행되는 것이다. 

    옷을 하나씩 벗어가며 진행되는 이야기가 어느 해변에서 뒹구는 남녀를 조심하라는 조언을 듣고 걷던 안무가의 일행이 급작스럽게 마주친 누드로 배낭을 멘 남자를 먼저 실루엣으로 식별할 즈음에 이르러, 작가는 거의 누드를 완성한다. 그러니까 누드에 대한 (경험의 외양을 띤) 픽션의 언어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이민지의 몸, 곧 현재의 장소에서 현동화된다. 또는 그것으로 이전된다. 이야기에서 화자가 갖는 당혹감은 누드가 되는 이민진의 몸을 보는 당혹감을 방어한다, 동시에 그 이야기의 갑작스런 결말이 주는 당혹감을 방어한다. 그러니까 선제적 차원의 안무가의 놀람의 재현은 사후적 차원의 왜상을 그 전의 응결점으로 매듭짓는다. 그리고 이야기의 급작스러운 하강은 마지막 장면의 실재적 제시 안에서 영토를 얻는다. 곧 몸은 이야기의 허망함에 대한 물리적 방어물이다. 

    그러니까 이야기하기의 방식이 누드의 행위들을 곁의 부차적인 것으로 두는 식으로 그 누드를 일정 정도 차단하고 있었던 것에서 나아가 그 이야기 안에 몸을 종속시키고 있었고 그것이 끝까지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곧 언어는 몸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보다 이 해변과 풍경과 벌거벗은 몸과 거기에 거꾸로 달라붙은 의상이 말에 대응하는 이미지로서 몸이라는 환유물로서 이전되고 있었던 것이 맞다. 그리고 첫 번째 추는 춤은 모자를 쓴 채이다. 이로써 몸은 누드가 되지 않게 되는데, 이 최소한도로의 방어, 차이는 그 몸을 다른 현존의 차원으로 각색해 낸다. 

    눌러 쓴 모자, 시야를 가리는 모자는 흐트러짐 없는 제스처, 밋밋한 포즈들과 약간의 반동으로 이뤄진 묵묵함의 수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함인가. 그러니까 누드에 대한 수치를, 우리의 당혹감을 안정된 몸짓의 차원에 덧붙여 하나의 외양으로 먼저 드러내는 것 아닐까, 앞서 이야기가 실재를 앞서/앞질러 진술하는 것과 같이―결코 그 반대의 차원이 아니라. 또는 이 춤의 급작스러움이, 우리에게 직접 가하는 이야기의 방향이 급격하게 사라진 데 대한 일종의 모른 체하기의 의식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제스처 아닐까. 그러니까 저 모자는 우리가 뚜렷하게 그 누드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방어물, 방해물로서 일부 기능하면서 무엇보다 그 보지 못하는 우리의 자아의 상관물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민진의 신체는 우리의 드러나지 않는 신체의 벌거벗김을 우리 스스로 응시하지 못함, 그 바깥에서만 응시됨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민진이 우리의 의식하지 않은 척 의식하고 있음을 체현한다는 건 명백히 그가 그 앞에 마주한 누드를 태연한 척 받아들였다는 데서 드러나는 부분이다. 곧 이민진의 누드는 이 누드를 신비한 무엇으로, 표현주의의 절대적 이념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것이 그 자신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 역시 그럼에도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당황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음의 금기적 의식을 체현하는 차원에서, 우리와 이민지의 자리바꿈이 자리하는 것이다. 곧 남성 신체의 누드를 자신의 그것으로 전이시키는 것과 같이, 모자를 씀으로써 비가시화된 신체 일부로부터 그 주체의 전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이야기의 누드+배낭의 이미지―그것은 감산된 누드이다.―를 완성하면서. 

    하지만 두 번째 춤은 모자를 벗은 채 수행되는데, 이는 그 전의 이야기가 무용수의 의상 선택에 대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곧 이민진은 누드를 의상으로 입은 채 춤을 추는 것이 되는데, 무용수 동료의 의상 선택의 고민과 어려움은 아무런 의상을 입지 않은 몸을 통해 대안적 가능성을 일견 시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민진은 마임으로 비가시적인 차원의 옷을 형상화함으로써 의상 안의 신체 자체를 드러내 보인다. 곧 옷에 끼워지고 옷으로 감춰진 비가시적 차원의 몸을 드러내는 바가 춤이 된다. 이 두 번째의 춤은 약간의 활기와 힘을 전자음악적 사운드에서 평탄한 드럼 비트가 아주 미세하게 커지는 음악적 차이에 의해 구가된다. 하지만 그 패턴은 같고, 동작 역시 거의 같으며, 이는 본래적으로 의상을 입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임으로 드러난다. 

    이 춤은 이민진의 무심한 행위로서 드러난다. 또한 무심한 행위를 입는 이민진이라는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무언가를 완전히 벗을 수 없는 우리의 몸―그것이 선취되는 무언가를 입고 있었던 누드의 남자―, 옷을 입는 동작과 누드를 입은 몸 사이에서, 비가시적 의상(으로써 드러나는 몸)과 가시적 의상(으로서 누드)의 사이에서 자리하며, 무언가를 입고 있는 몸, 무언가를 기우면서 무언가에 기워지는 몸, 마치 그의 다리를 비롯한 커다랗게 몸 곳곳에 화려한 색감의 타투가 신체를 뒤덮고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드러내며 드러나는 몸은, 단지 동작들이 수행을 위한 형식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무심한 형식을 통과한다. 

    수평선 옆에 ‘여전히’ 존재하는 건 무엇일까. 존재하지 않은 듯 존재하는 “여전히”는 무엇일까. 그 수평선은 무엇인가. 저 너머로, 저 너머에서 건너온 존재와의 마주침이 현상하듯 그 연장선상에서 몸과 누드 사이에서, 몸짓과 행위 사이에서 삐거덕거리는 존재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몸은 서사의 언저리에서 서사를 뱅뱅 돌면서 서사가 종료되는 시점을 계속해서 산출한다. 〈수평선 옆에 (여전히)〉는 수평선의 서사로부터, 좌우 측의 평행한 이동과 그 축에 선 긋기라는 안무의 공간적 배치술로의 이행을 통한 수평선으로서 서사로 옮겨간다. 수평선은 풍경을 보는 기준이다. 그 너머를 경계 짓는 표식이다. 결국 이민진의 누드는 수평선과 같다. 그리고 그 누드 위의 모자, 누드 위에 걸쳐지는 비가시적 의상의 실재성 모두는, 수평선 ‘옆에’ 사물 혹은 그림자이다. 그리고 또한 수평선을, 그 경계를 진동시킨다. 

    마지막으로 언급되지 않은 건, 두 번의 춤 가운데, 엎드리고 또 앉고 하는 과정에서의 뒤척임으로, 이는 누드 상태의 불편함에 대한 자기 방어이자 쭈뼛거림으로 보인다. 그것은 전시의 형태로 놓이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대상의 망설임 같은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누드를 관음하(려)는 관객의 태도에 최소한도의 분열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삽입 구문으로부터, 의상의 서사가, 의상 입기의 행위가 덧씌워진 누드가 출현한다. 곧 이민진이 만드는 건 서사의 진동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의(구)심, 곧 우리의 시각 체제 자체의 진동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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