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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동, 〈묵티〉: 영속적인 이주민으로서 삶 혹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신체에 대하여REVIEW/Theater 2025. 11. 12. 15:52

극단 동, 〈묵티〉 ⓒ 박태준 [사진 제공=극단 동](이하 상동). 〈묵티〉는 이주민, 난민으로 표상되는 존재들을 신화의 기원적 존재로 위치시킨다. 또는 신의 형상은 이주민의 현재적 삶으로 전환된다. 산스크리트어로 ‘해방’이라는 뜻의 ‘묵티‘는 먼곳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이주민들의 몸을 빌려 이따금 나타나는데, 이는 자막에서 단지 몸을 지닌 본래 그들의 이름으로 처리된다. 하나의 영혼과 다른 하나의 신체의 만남에서 신체가 우선함은, 그것이 비가시적인 것을 현실로 처리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리고 영혼과 신체의 이원설을 주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신체 자체가 진정 중요하다는 걸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 멀리서 온 존재인 것처럼 가까이에 있는 이가 타자성으로서 나에게 머물러 있었음을 깨닫는 지점, 곧 구원이 초월적 신의 현실 너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이미 구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메시지로 친숙함과 낯선 것이 전도되는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이는 어렴풋하게나마 분명해진다.

이러한 옆의 동료들, 곁의 존재들을 경유함으로써 〈묵티〉는 역사와 타자를, 타자로서 이주민의 역사를 가져오면서 ‘묵티’라는 애도 불가능한 유령으로서 신체들의 이주를 허용하면서도 그것이 임시적이고 자의적인 출현의 양상인 것처럼 또한 구체적이면서 하나의 파편적 전사로 남게 되는 것처럼―이로써 〈묵티〉는 특정 이주민에 대한 표현이나 일반적 차원의 재현의 문제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진다.―, 오히려 지금 여기의 공간에서, 현재의 삶을 어떻게든 이어 나가려는 그들의 의지에 대한 찬양으로, 곧 현재 삶을 영위하는 우리라는 새로운 주체의 장소로 귀결하려는 듯 보이는데, 이는 마지막 이주민과 정주민의 경계가 흐트러지고 뒤섞이며 함께 사는 세계의 광경 속에서, 연꽃의 화려함을 기각하고 정반대로 먹을 수 있는 연근을 캐는, 곧 신적 우위와 숭고의 서사 대신에, 그 진흙이 은유하는바, 인간의 악착같은 생명력과 부박함의 환경 조건을 긍정의 것으로 수용하는 것에서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곧 정주와 이주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원래부터 정주민이었던 적은, 원주민이었던 적은 없었다는 것, 인간이라는 형상이 우리의 관성과 관습에 의해 상정되고 이해된다는 것을 통해, 타자로서 이주민을 상대하기보다는 상호주체성을 지닌 동류 집단으로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나의 옆에 있는 이, 나와 함께하는 이의 소중함을 일컫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이는데, 이는 타자성의 차원을 나의 반경 내로 축소하고 깎아내리면서 납작하게 정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애초에 그 절대적인 타자의 형상은 부재하며, 나아가 그 반대편에서, 숨을 쉬고 세계를 마주하는 공통된 차원의 인류적 본성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이 사회를 가로지르는 적대가 아니라, 적대를 가로지르는 사회에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부터 그 타자의 형상을 재정의하려는 것에 가깝다.
물론 거기에는 〈묵티〉가 시험하지 않은, 가족 같은 관계 혹은 미시적 단위로 주어진 집단의 단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사회가 가능할지에 대한 물음이 남는데, 이는 세계의 균열로부터만 우리가 윤리적 주체일 수 있는 어떤 지점에 희미한 근거를 유일하게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묵티와 같이 편재하는 역사의 망각된 이름들, 타자의 형상들, 신화의 잔여들이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존재가 이주민이라는 것, 또는 애도 불가능성을 떠안은 역사의 특정 개인들이라는 것 앞에서 드러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들의 세계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을 불러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차라리 중요한 건 그 상실된 대상들이 아닌, 매개의 현재 주체이며, 그로 인해 그것들이 현재 들려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묵티의 우연하고도 비예측적인 차원에서의 신적 현현이 아닌, 그 신이 누구를 향하느냐이다. 결국, 묵티의 주파수 대역을 맞출 수 있는 매개자의 어떤 역량이 중요하며, 이는 그들이 다시 정주민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주하며 자신의 삶이 이미 균열이 있고 그 깨어진 틈새로 계속 되돌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 그 근거를 둔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묵티가 신화의 기원을 담은 한 파편이 아니라, 신화의 불가능성, 곧 신화가 조각나고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경계 자체를 드러내는 존재임에 상응한다.
여기서 신의 이주민으로의 여행이라는 반신화적 환원과 이주민의 특정한 역사적 기억을 대리하는 신체적 체현은 신에 대한 두 가지 형상에 대한 혼동을 초래한다. 결국, 그 두 지점이 교차하면서 오늘날의 신은 우리 삶 바깥에서 오며, 그 경계를 넘어오는 이들의 삶에, 고통에 숨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입”은 “생불”과도 같다. 그리고 그들이 뛰어든 가장 낮은 장소에서, 어떤 초월도, 비약도, 힘도 가능하지 않는, 신의 무능력과 취약함이 드러난다. 이주민과 신의 중첩된 자리, 또는 혼동된 그 자리로부터 〈묵티〉는 신화의 불가능성을 어떤 틈새로 공략한다.
이주의 끝에는 정착이 아닌 여행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들의 드넓은 시간과 변신, 전이의 역량으로부터 어떻게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의 세부가 주는 개별적이고 특정한 아픔과 고통의 현실로 진입할 수 있을까,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것은 의문부호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신이어서 가능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그것의 역순으로의 질문, 곧 우리가 어떻게 비천해짐으로써 비로소 신이 될 수 있을까의 질문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주체의 변경을 통해 또는 전이된 주체를 재상기함을 통해, 일종의 문학적 승화를 현실의 재승화로 뒤바꿀 수 있는 전략을, 우리는 〈묵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 말한 상수의 무대 구멍으로부터, 그 역시 이주해 와서 연근 밭의 고용인이 된 택주(김정아 배우)와 그가 고용한 세계 내 다른 이주민들이 함께 연근을 캐는 그 물리적 동등함에, 곧 택주가 그 바깥이 아니라 그 구멍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파라솔 아래 안착한다. 결국 〈묵티〉는 의외의 존재인 택주라는 주체로 귀결된다. 택주와 그 밖의 존재들이 혼동되는 그 순간을 그렇게 택주로부터 포착해 낸다.
아마도 〈묵티〉의 기저에 있는 가장 핵심적인 메타포는 묵티가 아닌 연근일 텐데, 이 연근이라는 기호가 꿰는 낮은 곳에 임하는 불성의 인간은 그렇게 신적 초월이 아닌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땅을 기어 넘어가는 이른바 포월을 하는 존재일 것인데―그에 비한다면, 묵티는 매개의 초월적인 위상에 가깝다―, 이것이 가장 평범한 의외의 인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도약의 계기가 있는데, 곧 그에 앞서 불탄 비닐하우스를 등지고 선 택주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심정으로 중앙의 ‘선두’에 서 있을 때 그 뒤의 존재들이 “일해야 해요!”라고 그를 추어올릴 때,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의 삶에 대한 재긍정의 태도를 다시 쓴 것과도 같은 이 부분에서, 그를 새로운 주체로 갱신하는 매개자들은 마치 택주의 세계에서 은신하며 그 안으로 배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가장 평범한, 단어의 낯섦도 움직임의 독특함도 없는 인물 정희(박지연 배우)는 그 폐허로 남은 터전에서 그가 온갖 애를 씀에도 결코 이뤄질 수 없었던 그의 시도, 곧 이주민들에게 세를 주지 않는 마을 사람들과 그들에게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되는 이주민들의 영원히 평행선상을 달리는 두 존재의 만남을 기각하면서, 그 마을 사람들의 언어를 전유함은, 그가 실리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곧 그 전까지의 현실적인 위치를 벗어나 ‘그러한’ 존재의 인식 또한 지칭을 순전하게 되먹임하며 매개하는 것에 가깝다.
이때 그는 손가락질을 남발하며 그것을 관성적이고도 둔탁한 말에서 모질고도 뾰족한 말로 갈음하는데, 그로써 이 말이 어떤 주체와 대상의 보이지 않던 위계적 위치를 점유하지 않고, 순전하게 잘못된 세계의 판본을 상연하는 장 안에서 자신의 어떤 위치를 지정하지 않는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그것을 펼쳐지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평범한 그래서 흥미롭지 않을 수 있었던 인물인 정희는 그 자신의 전도된 상으로서 마침내 실패한 매개의 역할을 완성하게 된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묵티〉가 가진 힘이다.
아마 마지막까지 악으로 남는,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른 장본인인 국호(강현우 배우) 역시 그가 전하는 이야기가 그 자신의 이야기를 돌려 말하는 것이고, 그의 아들이 불법 이주 노동자가 몰던 차량에 사고를 당했지만, 자신의 신분이 탄로나는 데 대한 두려움으로 지연되었던 사고 처리와 결과적으로 법적 책임에서 면피되었던 그에 대한 미움을 법의 자국 중심 주의의 구멍에 대한 고찰이나 구멍을 메우려는 또 다른 시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도착적 차원에서 증오의 대상으로서 또 다른 이주민에 대한 신체적 복수로 전이되는, 그것이 잘못된 인지적 경로를 따르는 것임에도 어찌 됐든 피해자의 역전된 형상으로, 그는 그 자신의 정신적 공백에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다―그는 그 아들의 죽음을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 자체로 끊임없이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이주민들은 직접적인 언어보다 기울어진 형상의 신체로써 더 명확하게 가시화된다―그들이 가진 현실은 현실 자체에 대한 하나의 은유 정도로 비쳐지고, 그 현실 자체가 체현되는 장소로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추상적이거나 생략되는 동시에 압축되어 있다. 극단 동의 이른바 신체 연기술은 그 같은 이주민들의 뒤틀리고 떨리며 유동하는 신체 양식을 잠재적 차원에서 만들어 내는데, 이는 기따로 들어온 묵티를 마주한 시따가 묵티를 중심으로 비틀거리고 어정쩡하게 서고 주춤대며 몸을 꼬며 돌면서 사선으로 향해 가며 말하는 모습에서처럼, 이 몸은 대사를 읊기 위해 있는 것이라 무대 전체 위에 선 그 공간을 드러내고 그 공간과 맞서는 차원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그 몸의 유동적인 반경 안에서 말이 허공에 맺힌다. 그 움직임과 말의 기이한 교착 관계의 절정은 아마 시따(김문희 배우)의 살며시 뜬 눈, 감은 눈과 같은 어떤 시선 자체의 고착됨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의 어머니의 눈, 아버지의 눈이 자신의 것과 역사적 차원에서 상동이며―그 반대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주민의 불안정한 지위의 동등함을, 그 확장을 이야기한다. 마치 그의 눈을 하나의 영토로 붙박이며 그의 나머지 신체가 그 눈을 주변으로 공전하는 듯한 이 순간은, 어떻게든 하나의 영토에, 역사에, 시간에 머무르고자 하는 의지와 그 과정에서 취약하고 연약하며 뭉그러지는 어떤 신체의 과정 자체를 압축적인 기호로 표상한 것과 같다.시따와 한몸처럼 붙어다니는 기따(배선희 배우) 역시 인상적인 몸짓을 여러 장면에서 보여주는데, 그는 시따와 마찬가지로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아픈 몸을 하고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움츠러든 그리고 스스로를 보듬는, 또는 긁어대는 몸짓들을 간혹 드러내고는 하는데, 이는 그로부터 그 자신을 벗어젖힌다는 인상을 준다. 그 이외에도 그는 상대방의 언어에 반응하고 그것을 동시에 표현하는 몸짓들을 보여주는데, 묵티의 사진과 여행을 위해 모은 돈을 찾으러 불길 속 비닐하우스에, 긴 외투를 걸치고 물을 끼얹은 후 뛰어들었다 수포로 돌아온, 기진맥진한 시따를 껴안을 때 그는 시따와 함께 축축하게 그 몸을 데우며 젖어 드는 것 같다, 마치 그 자신의 잃어버린 신체를 붙잡으려는 듯.

은옥(유은숙)의 경우, 아들과 손자 모두를 잃은 그의 시어머니 위례(송주희 배우)는 관성적이고 재현적으로 그 탓을 은옥에게 돌리고자 하는데, 이때 은옥은 “네”로써 그 말에 벽을 세운다. 횡으로 앞과 뒤로 교직된 위례와 은옥에서, 마침내 위례와 동일선상에 은옥이 다다랐을 때, 은옥은 자신에게 폭력을 일삼던 남편의 영정 사진 액자를 수직으로 쳐올려 뒤쪽으로 던져버리는데, 이때 약간의 지연과 함께 허공에 공간이 열리고, 사진을 위례가 주우러 가며 둘의 위치가 반전되기에 이른다. 은옥의 분노는 그렇게 급격하게 솟구친 채 폭발하는데, 그러한 폭력으로부터 남편은 가부장제의 신념과 맹목의 상징에서 하나의 조각으로 물신화되기에 이른다.

〈묵티〉는 무대 가장자리에 서서 신들이 이주민의 지위로 전락하는 세계의 풍경에서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시작된다. 이 말은 다시 마지막에 이주민의 현실을 경험하며 소진된 몸의 차원에서 한 번 더 발화된다. 이는 그 직전 마찬가지의 위치에서 뒤돈 모습으로 출현한 이들이 마주한 검은 벽―그러니까 암전 이후에 관객이 마주한 건 이들의 등이 결속된 인간 벽이 된다.―, 그 전소된 비닐하우스의 잿빛 형상 이후에, 그 말의 반복은 의미의 결정 대신에, 그들의 달라진 현재의 위상차를 가시화하는 장치가 된다. 신들이 낙하한 곳에서, 아니 신들이 기어 다니는 이곳에서, 영원한 여행자의 지위, 아니 그를 꿈꾸는 붙박인 불안정한 이주자의 지위를 그들이 체현하고 있음이 곧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도 신들의 추락이 아니라 이주민의 신적 지위에 대한 초월을 의도한다, 지극히도 평범한 숭고함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11. 01 - 11. 09.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제작진
출연: 강세웅, 강현우, 김문희, 김정아, 김진복, 박지연, 배선희, 송주희, 유은숙, 이재호, 최호영
제작: 극단 동
작: 김윤식
연출: 강량원
드라마터그: 우연
무대미술: 임일진
무대감독: 유창대
조명감독: 김병구
음악감독: 장영규
음향감독: 김경남
의상디자인: 오수현
분장디자인: 이지연
소품디자인: 제페토
안무: 금배섭
조연출: 박효진, 김지현
영상·사진: 박태준
홍보디자인: 이승은
접근성 기획·자막 디자인: 성다인
프로듀서: 김유진
음향 오퍼레이터: 박효진
조명 오퍼레이터: 하윤슬
한국어 자막 해설 오퍼레이터: 성수연
무대미술 어시스턴트: 배소하
조명 프로그래머: 전은주
조명 크루: 오정훈, 정은혁, 고두영, 박정원
베트남 문화·언어 리서치: 최태용
네팔 문화·언어 자문: Laxmi lama gurung (나민경) 뿌자 레스토랑, 세리
방글라데시 문화·언어 자문: 섹 알 마문, 정소희
철학 자문: 강정섭
극단 동 대표: 김문희
주관·주최: 극단 동
공동기획: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후원: 한국메세나협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벽산문화재단
도움: 관곡지연근농장, Sajdarun Nessa Mebin, 박시현, 손혜서728x90반응형'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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