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 세상 말고〉(2024): 상상적인 그러나 실재적인…
    REVIEW/Theater 2026. 1. 19. 20:20


    16살 이언과 키코, 두 사람이 자신만의 아지트 안에서 학교 테러를 기도한다. 키코는 학교에서 왕따가 돼 괴롭힘을 당하고, 이언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탓에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 역시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아지트는 둘만의 테러에 대한 계획과 작전, 모의 시뮬레이션의 주요한 장소일 뿐 아니라 괴롭힘의 사실들을 상기하고, 선언문을 함께 읽으며 테러의 의식을 고취하고 체현하는 한편, 테러로 인한 절멸의 당위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둘만의 임시적이고도 최후의 안식처로 자리한다. 

    〈이 세상 말고〉는 세상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무기력한 삶의 자각과 포기로서 운명 공동체의 협약을 맺은 둘의 자살과 사회에 대한 테러가 실현될 운명의 시간으로부터 측정된 현재 그 둘의 상태, 행동, 의식의 흐름을 좇아 나간다. 아지트는 두 사람만의 생각, 정동, 마음이 자리하는 곳이며, 테러를 기획할 만큼 ‘저 세상’을 찾아야 하는 두 사람의 절박함과 이 세상에서의 희망 없음, 의미의 부재가 전제된다. 그리고 ‘이 세상’을 피하고 유예하는 임시 거처가 된다. 동시에 온전히 영원하고 평화로운 장소가 될 수는 없다. 

    디스토피아로서 현재의 영원한 정지를 꿈꾸는 곳―하지만 반드시 그 바깥, 너머가 유토피아일 수만은 없다.―, 사회와 격리된 곳이자 그래서 안온한 곳임에도 이곳은 바로 그런 이유로 다시금 사회로 재활성화될 수 없다. 이곳은 오로지 둘만의 의미가 새겨지는 곳이며, 사회와 연결된 기호를 산출할 수 없다. 이들의 대안은 곧 파국이고, 이 대안은 이 사회와의 접점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런 지점에서 에베레스트산은 이 사회와 이 사회의 멈춤 이전에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유토피아적 공간이다. 

    〈이 세상 말고〉는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현실로부터 또 다른 비극의 운명을 향해 나아간다―그럼에도 오직 그 둘만의, 둘의 생각 속에서만 결말이 자리할 것이다. 닫힌 이 장소, 스스로를 걸어 잠근 이 장소는 키코와 이언 둘의 사회 안의 비가시화된 자아가 발현되는 곳이고, 그들의 계획이 미리 펼쳐지고 선취되는 곳이다. 곧 그 둘의 (다른/은밀한) 자아가 확장되는 곳이고, 그 둘의 자아로 수렴되는 곳이다. 이곳은 애초의 약속대로 그 둘이 벗어나는 순간 모든 것은 종식될 것이고,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이고, 둘이 부재하는, 남은 이 장소는 아마도 미지의, 혹은 수사와 탐문의 장소로 전용되게 될 것이다. 

    벙커형 침대이거나 다락 같은 특정 구조물로부터 그 위와 아래, 그리고 그사이를 오가며 연장되는 이 장소는 〈이 세상 말고〉의 가장 연극적인 것의 특성을 부여하며,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의 시간 안에서 결코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이 둘을 만든 사건들과 환경들은 이 밖에서 실현되었고 이 둘이 이곳에 자리하는 현 순간에도 여전히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둘이 이곳을 떠날 때 마침내 연극은 끝날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극장에서의 연극이 하나의 무대를 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에 의거해 희곡이 이 장소를 선취한 것이라면, 연극은 이곳에서 끝날 것이며 이 세상의 종식은 적어도 드러나지 않은 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이 세상 말고〉는 결코 아무것도 진행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그럴 것이다. 이 둘은 연극적 물리 법칙에 의거해 이곳에서 최후가 아닌 ‘끝‘을 맞을 것이다. 오직 실현되지 않은 현재로부터의 지배적인 하나의 플롯만이 자리할 것이다. 따라서 연극은 범죄 집단으로서 이 둘의 실패를 가정하고, 그 실패로부터 이 둘의 범죄를 수용 가능한 것으로 미뤄둘 수 있다. 곧 그 둘의 죄를 이 장소에 봉인하고, 이 장소 바깥이 향하는 미래의 시점에서 이 장소와 함께 구현되지 않았던 과거로 망각될 것이라는 하나의 확연한 추정을 통해 이 둘의 범죄로부터 일정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가능해진다. 

    범죄를 도모하고 완성하는 특별한 자신들만의 망상적 신경 회로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벼랑 끝에서 맴도는 불안정한 존재 둘, 〈이 세상 말고〉는 결국 사회에 대한 테러 행위를 감행하는 테러분자로서 타자라는 형상으로 그들을 구획해 내지 못하는데, 이는 결말에 대한 은폐 혹은 열린 결말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원시적 차원에서 충동적이며 열정적인 젊음의 한순간의 찬란함을 불안정함과 동의어의 차원으로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안정함은 위태로움과 등치되며, 또한 모두의 죽음이 아닌 그들의 (선제적인) 죽음에 대한 가정으로 치환되며 안타까움과 연민을 불러온다. 곧 그들을 보는 낭만주의적 시점이 이들에 대한 도의적 비판의 차원을 비켜난다. 아마도 그 전자의 차원에 부합하기 위해, 〈이 세상 말고〉는 그야말로 날숨의 연기, 꽉 들어찬 틈을 비우는 형식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올곧게 전력 질주해 나가는 연극이다. 이는 존재의 오롯한 관객으로의 체현, 곧 관객을 외재적 사유와 비판의 샛길로 나아감을 차단하고, 왕성한 신체와 뇌의 유동적 흐름, 곧 젊은 시기의 ‘나’에 동조시키기 위함이라 하겠다. 

     

    김민관 편집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