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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_롤란트 쉼멜페니히/ 연출_윤한솔, 〈안트로폴리스: 프롤로그/디오니소스〉: 서사는 어떻게 시작되고 또 시현되는가에 대한 여정
    REVIEW/Theater 2025. 11. 12. 16:19

    〈안트로폴리스: 프롤로그/디오니소스〉에서, 독일어로 인류세(Anthropozän)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Polis)를 결합한 조어인 안트로폴리스는, ‘프롤로그’와 ‘디오니소스’, 두 개의 장으로 나뉘는데, 그 사이의 인터미션 20분을 포함하면 3시간에 가까운 상연 시간으로, 대규모 무대 세트, 디자인된 자막과 핍진한 이미지들, 그리고 실시간 영상이 중계되는 중앙의 커다란 막, 라이브 밴드와 18곡의 곡목, 18명의 배우의 연기와 노래, 춤은 총체적인 종합예술로서 연극 무대를 선사한다. 
    ‘프롤로그’가 도시 테베가 설립되고, 그 설립자인 카트모스의 딸 세멜레와 제우스 사이에 생긴 디오니소스의 탄생 신화까지를 다룬다면, ‘디오니소스’는 디오니소스가 테베에 도착하고 난 후,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축제를 거부하고 금지한, 카드모스의 손자 펜테우스 왕을 간계로써 유인해 그의 어머니 아가우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하여, 비극에 이르는 대략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작: 롤란트 쉼멜페니히 (Roland Schimmelpfennig, 1976년-) 연출: 윤한솔,〈안트로폴리스: 프롤로그/디오니소스〉[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프롤로그’는 압도적으로 내레이터[각주:1]의 서사에 대한 매개의 특성을 띠며, 구전으로서 서사, 전승되는 신화의 성격을 말의 옮김과 매개의 일환으로 표현하는데, 가장 처음 장면으로, 의자에 앉아 정면을 향한 채 자연과 문명의 현상으로부터 추출되는 단어들의 나열은 두 번에 이르러 가시화-발화되는데, 첫 번째의 발화 ‘이후’ 그것의 반복으로서 두 번째 발화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중복의 기입 과정은 몇 차례 갱신되는데, 이러한 문장이 되지 않는 묘연한 단어들 사이의 간격은, 반드시 중간의 그것을 듣는 이, 그리고 다시 귓속말을 통해 전달하는 비가시화-발화의 ‘지연’ 작용을 한 차례 더 포함한다는 형식상의 간격에 자리를 내어 준다. 
    그러니까 단어들을 단어들로 옮기는 과정, A와 곧 A임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A의 의미 작용 자체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데, 이러한 재현의 도식은 관념이 만들어지고 그 관념의 매개자로서 위치하는 존재자로서 숙명―마치 유전자를 전달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설명하는 개념과 같이―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신의 이야기를 전파하는 인간이라는 측면을 절대자로서 존재를 전제하는 인간의 유인을 추적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대신―합목적성을 추구하는 대신―, 그 이야기 자체의 탄생이 일종의 허구적 토대에 기초함을 증명하(며 그것을 분석하고 해체하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는 중반에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와 관객을 향해 직접 질문을 던지는 내레이터에게서 존재를 가시화하는 이름의 작용, 그리고 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말해야 하느냐는 반문을 통해 인간의 비극을, 신의 무질서함과 방탕함과 인간에 대한 폭력을 서사로써 잇는 것의 무용함에 대해 성찰을 촉구하는 장면에서 분명해지는데, 곧 신의 서사를 반복하는 것이 신의 폭력을 승인하고 신과 인간의 위계를 체현하는 부분에서 필연성이 (신이라는 예외적 존재를 달리 둘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신적인 힘의 독특함을 띠고 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물음은 합리적 토론의 주자가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일견 포스트드라마적 맥락에서 출현하는 신경증적으로 ‘나’를 그 물음의 가저에 종속되어 있는 주체로 ‘승인’하는 것에 가깝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인사치레와 같은 것으로, 이 연극이 지속하는 것에 대한 부정할 수 없음이라는 상징계적 규약을 승인하는 것과도 같은데, 그럼으로써 얻는 실제 효과는 자기 지시적 지문을 남기는 것으로, 이는 전통적 서사와 그 서사의 전승에 대한 차이를, 최소의 간극을 표기한다. 
    이는 어쩌면 이 이야기들이 압축적이고도 변용 가능성을 띤 토대의 관념들로 전승되어 온 것이며, 그것은 주체의 의지라기보다 신적 힘과 같은 어찌할 수 없는 그 이야기 자체의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행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내레이터, 매개자의 역할은 무엇보다 긴요하고 서사를 서사로서 전달하는, 서사와 현재의 틈을 벌리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일 대 일의 수어 번역의 접근성 번역을 공연 내재적 차원으로 수용하는 과정 자체에 대한 합목적적 유인을 제시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니까 언어에서 언어로 이동하는 과정은 근본적으로 발신자와 수신자의 지위를 겹쳐 놓는 것이자 발신자와 수신자의 지위를 전도하는 것, 곧 그 둘을 끊임없이 교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추정은 수어통역사의 존재를 내레이터와 같이 동등한 것으로 또 내레이터와 같이 투명한 것으로 두었음으로부터 가시화될 수 있을 텐데, 그것을 포괄하는 건 하수의 3열, 상수의 2열로 구획한 불특정한, 현대의 한 군상으로부터의 존재론적 추출이다. 모든 건 서사 이전의 서사이며, 서사가 아닌 서사의 가능성, 서사를 만드는 어떤 프로토콜의 차원에서 시작된다라는 것이 ‘프롤로그’의 시작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프롤로그이다. 

    결과적으로 충만한 스펙터클의 무대는 사실상 신화를 비워낸 현대적 장소 하나를 전유한 곳으로, 여기서 시작되는 단어들은 본격적으로 그 신화에 이르기에는 모호한 단어들로, 그 신화가, 신들의 이야기가, 마치 빈 공간에 배우의 동선만으로 연극이 만들어진다는 것과도 같이, 몇 개의 단어들로 자연이, 도시가 생겨나는 그 신화의 관념적 인계 과정의 토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념의 간격들로써 구성되는 이야기의 압축성으로부터 서사의 전파 가능성을 추출할 수 있다면, 현상을 단어로 매개하는 과정은 그 실재가 아닌 리얼리티를 매개하는 역능으로서 언어의 은폐된 매개 작용을 재가시화하는 작용이다. 곧 이러한 관념, 서사, 시각 자체로서 단어의 의미를 정초하는 것에서 ‘프롤로그’는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프롤로그’에 대한 ‘디오니소스’의 차이는 디오니소스라는 존재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단순히 주인공이 아니라, 서사를 그 자신이 만들어 간다는 것으로, 그는 서사 안에서도 그의 안타고니스트 펜테우스를 속여 서사의 또 다른 역할로서 이방인이 되었다가, 곧 펜테우스의 서사 안에 부러 갇혔다가 그 바깥에서 그를 심판하며 관망하는 위치로 도약하는 것과 같이, 서사를 잘라 붙이고 구경하는 역능을 가진 존재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공간의 끄트머리, 극장 가장 상단의 장치 위에 올라섬으로써 이 극장 자체의 가시화와 맞물려 하위의 인간 존재의 평평한 공간과의 거리를 벌린다. 

    그 등장 전에, 펜테우스의 어머니 아가우에가 자신의 무지, 곧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나서 그의 머리를 사자 머리로 ‘주장’하던 그것을 깨닫고 나서, 카드모스와 함께 비극의 순간을 체현하는 장면이 있으며, 이 둘은 그야말로 ‘주인공’으로 자리한다. 그것을 깨부수고 인간의 오만에 대한 징벌과 하락의 차원으로 위치시키는 것이 디오니소스의 재위치인 것이다. 두 주인공은 펜테우스의 갈기갈기 찢겨 사방에 널린 시신을 주워 담은 두 개의 수하물 가방으로부터 하나씩 꺼내 그것을 이어붙여 앞선 머리와 함께 형체를 구성해 놓는데, 이때 부감 쇼트를 통해 핏자국과 듬성듬성 맞춰진, 커다란 펜테우스 봉제 인형 더미를 보게 된다. 

    신의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이것들은 숭고한 비극으로 부상한다. 동시에 깊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라앉는다. 순전한 주인공은 인간의 몫인데, 디오니소스는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비극을 순수하게 체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비극은 그러한 초재적 대상으로부터 더 명료한 것으로 ‘관찰’될 수 있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의 최상의 심급으로부터 서사의 확장과 ‘미래’를 예약한다. 미래는 ‘프롤로그’에서처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발명”해야 하고, 이는 디오니소스 축제와 같이 술에 취한 상태, 이성 너머의 상태에서, 디오니소스적 광기에서 예언의 역량을 가질 수 있다. 

    막이 펼쳐지기 전 그 앞에서, 현실로 펼쳐지지 않았던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에게 순전한 인간 형상으로 나타날 때 그와 눈높이를 맞추어 등장한다면, 그가 자신이 신임을 공포할 때는 이처럼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 자리하며 차별화한다, 이때 그를 매개하는 카메라는 펜테우스의 사지가 끼어 맞춰질 때의 시선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 시선의 자리를 비로소 완성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 시선의 우월함은 그 스스로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곧 그는 그 나머지 존재들의 카메라와의 밀착된 관계에서의 의존적 상태가 출현하지 않는다. 
    반면, 펜테우스가 상수에서 하수로 지나가며 그의 호들갑이 그를 쫓아가며 미디엄 샷으로 담는 카메라를 경유해 스크린에서 비로소 사회에 가중되는 혼란으로 완성되는 부분에서는, 카메라는 그와 동등한 차원의 눈높이를 이룬다. 이때 그는 직접 말하는 대신 상수의 카메라를 경유해 말하는 주로 1부의 내레이터들, 2부의 코러스들과 같이 카메라와의 관계성을 직접 설정하는 대신, 예외적으로 그 카메라에 사냥을 당하는 것에 가깝다―물론 여기서 전자의 카메라에 대한 시선은 그 나르시시즘적 영토가 초자아의 보고 있음이 선행된 가운데 체현된다. 

    펜테우스의 죽음은 인형의 사지 조각들로써 사후적으로 물리적으로 또 목격자에 의해 서사적으로 짜 맞추어지는 것과 같이, 그의 죽음은 직접 출현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죽음이 그만큼 끔찍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고통이 아가우에에게 윤리적 차원으로 비로소 나타나며, 곧 그 행위에 대해 그 스스로가 소급되어야 하며 그것은 여전히 그 이상의 차원으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의 상상과 마음 안에서만, 실제로는 그의 표정과 행동 양식 등을 통해서만 드러나야 한다. 물론 그의 폭력이 그의 온전한 책임이 되는 부분이 그가 주체의 자리를 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고귀함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만 부여될 수 있는 부분인데, 따라서 신의 즐김 혹은 향유는 또한 우리에게 선취되거나 증명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펜테우스를 통한 국가적 몰락의 단계에서 그가 여자로 분장하는 장면에서 그는 목소리와 함께 무대 바깥의 현존으로 가시화되고, 그리고 오케스트라 피트 아래로 사라지는 일종의 점프 컷이 발생하는데, 이때 모욕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유예하며 증폭하는 이 이상한 지연의 시간은, 그의 길길이 찢겨 나가 도처에 깔린 시체가 되는 그 예정된 죽음을 괄호치고 그 죽음에의 무의식을 추동하는 장면, 곧 실재의 너머―그러니까 이 무대의 한없이 열린 발화와 카메라의 닫힌 원환의 말을 초과하는―를 상기시키며, 몸이 사라진 존재의 영역으로써 현실의 바깥에서 그의 죽음이 무의식적으로 선취되는 장면, 나아가 무의식적으로만 선취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디오니소스의 마지막 진술은 막을 열기 전 등장한 그의 시작과 대칭되며 정확히 인간의 세계에서 그의 신의 자격을 괄호 친 존재가 아닌 본래적 존재의 차원을 보여준다. 애초에 “바다 / 바다 위의 태양 / 바위 / 해변 / 해변 너머 평원”으로 이어지는 시작의 말은 태초의 말씀의 자격으로 주어지는 대신에, 자연과 인간의 긴밀한 상관관계와 함께 몇 개의 상징성을 띤 그 단어들이 불러일으키는 서사의 무한하고도 역동적인 가능성 또는 압축적 생략이 지닌 변형 가능성을 그 형식적 차원의 모방과 소통의 측면과 함께 보여준다. 
    이것은 반복되는 형식의 절차로써 곧 문명으로 건너오며 순식간에 현대 사회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물론 신화의 근본적인 ‘내용’의 변화가 아니라 또는 신화 시대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 관한 신화론이 우리 삶의 의식 구조를 지탱하고 있음을, 곧 단어가, 개념이, 개념과 개념의 연결이 우리의 정신을 지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부상한다. 

    마지막에 디오니소스에 의해 신에 대한 경배를 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죄악과 그 처벌이 합목적적인 것이 될 때, 우리는 그 신으로부터의 소외 효과로써 그 비극이 오로지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며, 과연 그 신은 그러한 비극으로부터 진정 소외되어 있음을 거꾸로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진정 이질적인 것이면서 그 스스로는 어떤 가치도 체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라는 대타자에 대한 믿음의 언어를―아마 저 처음의 단어들에서 신은 “위”로부터 혹은 “너머”에서 출현하는 대상일 것이다.―, 비극의 운명이라는 주체성의 언어와 맞바꾸면서, 진정 교훈의 대상이 아닌, 향유의 대상으로서 신화를 구성하는데, 이때 신은 디오니소스와 같이 하나의 사라지는, 비가시화되는 매개체와 다름없지 않을까. 
    아마도 바카이들의 춤과 음악은 공연의 백미일 텐데, 이는 스트리트 댄스에 기반을 둔 힘 있는 움직임들로 구성되어 엄청난 체력적 뒷받침과 사전 훈련을 요구하는 바다. 무엇보다 움직임보다는 음악이 강조된 1부보다는 2부에서 바카이로 분한 코러스의 노래와 몸짓은 신 자체에게 바치는, 보이는 그 스스로의 황홀경의 상태 자체를 표현하기에 이는 관찰되기보다 참여되는 감각을 가져오며, 바로 그 지점에서 관객에게 소구하는 일반적인 뮤지컬의 무대에 상응하는 것이다. 

    〈안트로폴리스: 프롤로그/디오니소스〉에서 ‘프롤로그’는 서사의 희미한 조각들이 또는 연결들이 어떻게 공간을 이동하여 세계의 의식을 만들고, 기원을 만들고, 영속된 주체를 만들고, 서사에 대한 의무와 믿음을 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예컨대 ‘미래를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발명해야 한다.’ 곧 서사 자체가 아닌 그 서사를 ‘수용’하는 이들의 현재에 집중하면서 이를 본격적으로 무대가 펼쳐지기 전의 잠재 영역의 시간이자 분장실이라는 메타 무대의 현실로 치환하여, 서사가 지닌 고대의 시간에 대한 재현을 거둬낸다. 거기에는 신화와 우리 사이의 어떤 틈새가 있다. 그 틈새를 신화의 기원적 틈새로 바꾸는 데, 그리고 서사의 내부가 아닌 외부, 곧 신화의 주인공들이 아닌 그것을 서사로 함입하는 수용자들의 존재로 바꾸는 데 ‘프롤로그’의 결정적 이념이 있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초재적 신의 시점과 인간의 비극적 운명 사이의 틈새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디오니소스의 질서에 대립하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충동의 철학은 다분히 디오니소스의 전략과 전술에 의한 지배의 측면에서 기능적으로 투여되며 곧 인간의 광기는 신을 무시한 인간에 대한 처벌의 외양으로 나타나며, 오히려 진정 도취와 환락의 순간과 이성과 현실의 영속된 시간 사이의 낙차가 주는 주체의 심급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변환된다. 곧 신의 다른 질서 속 인간의 초월적 심상은 균열을 떠안은 인간의 반성적 주체의 거듭남 속에서, 하나의 온전한 이념이 아닌 환영적 배경 막으로 휘발된다. 

    디오니소스’는 진정 애도 불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디오니소스 바깥의 인물들의 이야기이며, 신에 대한 인간의 오만한 정념과 합리주의적 사고의 세계 체제에 대한 비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프롤로그’의 광고판처럼 투여된 테베 왕국의 여행지로서 그래픽 이미지는 “내란”과 “계엄” 등의 자막을 통해 실시간 현재의 장소로 지정되면서, 우리 현실을 비추는데, 이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로 읽히지 않는 건 근본적으로 그것이 표피적이고 납작해서가 아니라 신화와 현실의 사이에는 어떤 틈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프롤로그’의 분장실이라는 무대 자체를 대체하는 환유―무대와 삶의 경계 없음에 대한 은유적 도식이 아닌―를 통해 드러나듯, 그러니까 카메라맨을 포함한 스태프의 난입과 행위가 허용되는 것처럼 삶을 재현하는 무대가 아니라 무대가 삶에서 분기하는 일부분임을 보여주는 연출의 방향에서, 펜테우스의 스크린으로 연장되는 서사는 현실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 분화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며, 현실이 투과되는 곳이며, 그것이 서사로 다시 자리 잡는 자리이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미디어, 주인공, 기표, 이미지의 차원이 서사 양식적 토대로 격상시키는 그 지점을 보여준다. 곧 ‘프롤로그’의 서사에 대한 서사의 연장선상에서 말이다―따라서 이 작품이 정치적 메시지로서 주효하지 않았다는 세간의 비난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이 작품은 신화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아닌, 매우 국소적 차원의 진실을 담는 세속의 외설에 그쳤을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 일시: 2025.10.10.(금)-10.26.(일) 평일 19시 30분, 토·일 15시 (화요일 공연 없음) 
    * 장소: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 소요시간: 180분(인터미션 20분 포함, 변경될 수 있음) 
    * 관람등급: 16세 이상 관람가(2009년 12월 31일 출생자까지)

    ■ 출연진
    디오니소스 役: 조의진, 펜테우스 役: 고용선, 카드모스 役: 장성익, 테이레시아스 役: 심완준, 아가우에 役: 김시영, 남자·목동 役: 김신효, 남자·목동 役: 서유덕, 코러스 役: 강하, 코러스 役: 박수빈, 코러스 役: 박은호, 코러스 役: 윤자애, 코러스 役: 정주호, 코러스 役: 조문정, 코러스 役: 조성윤, 코러스 役: 조수재, 코러스 役: 최지현, 코러스 役: 한지수, 코러스 役: 홍지인  

    ■ 스태프
    번역: 임형진
    드라마투르기: 전영지
    무대미술: 임일진
    조명: 김성구
    음악: 이민휘
    의상: 김지연
    분장: 백지영
    소품: 윤미연
    음향: 전민배
    영상: 정혜지
    안무: 최경훈
    조연출: 정인혁, 조웅철
    제작진행: 황수빈





















     

     

    1. 1. ‘디오니소스’에서는 코러스로 분하는데, 이러한 명명의 차이는 ‘프롤로그’ 자체가 극의 재현이 아니라 극의 잠재적 장소로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정초하려는 노력에서 오기 때문이다, 곧 그 자체로 모던의 체계 아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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