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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해숙 개인전, 《파랑의 여항》: 자본주의 이후의 고고학, 그리고 (비)주체적 투사
    REVIEW/Visual arts 2026. 2. 24. 20:50

    용해숙, 〈행진 March〉(2021. 잉크젯 프린트, 180×60cm. 촬영, 편집: 양이언, 설치: 용해숙, 홍봉석, 이유미: 촬영장소: 제주시 화북거로마을.)

    용해숙 작가의 《파랑의 여항》은, 그간 이어온 그의 파노라마 연작의 계승이다. 그의 작업은 사회적-정치적 차원의 세계를 또는 세계에 대한 관점을 현시해 왔다. 그리고 전자의 차원에서 《파랑의 여항》을 볼 수 있으며, 여기서 이 세계의 연합체로서 존재들의 연결 양상이 부각되는 가운데, 그 풍경 안에 속하는 인물들은 연극적 차원에서 미션을 하달받아 그것을 수행하는 중이다. “파랑(波浪)의 여항(閭巷)”은 오기이거나 오인을 유도하는 제목이다. 그를 통해 파랑색 여행에 대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병기되는 한자를 알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주어는 여항이 아니라 파랑이다. 주거지들이 집산된 곳의 삶의 내력에 관한 메타포가 아닌, 여러 물결 자체를 의인화하여 삶을 전환시킨 것이다.

     

    장소의 선택과 그 위의 설치미술과 그것에 결부되는 행위를 파노라마 비율로 구현해 낸 사진은 이 시리즈의 가장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정의이다. 그렇게 펼쳐진 풍경은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생산된 공산품들의 이력이거나 자연의 드넓은 모습이며, 그 ‘사이’를 채우는 사람(들)이 그곳에 자리한다. 사물들은 새롭게 투여한 것이거나 이미 투여되어 있던 것들이다. 사물들은 새삼스러운 것으로 발견된 것이거나 놓이게 된다. 이 현장과의 합의를 통해 배치된 인물(들) 역시 과투여되어 있다. 이들은 사물 안에 있으면서 그 사물을 다룰 수 있는 잠재성을 갖는다.

     

    그들은 새삼스럽게 그곳에 던져진 존재이면서 사물로부터 이격되거나 접촉될 권리를 유일하게 가진 ‘사물’이다. 설치의 요소는 독자적인 미술품의 범주가 아닌, 공산품 혹은 레디메이드의 사물들의 구성, 배치의 차원에서 갈음된다면, 인물들은 모델이나 배우가 아닌, 작가의 주변 지인을 사정이 되는 대로 섭외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연기를 애초에 전문적으로 할 수 없는 이라는 지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물 역시 보통의 것이면서 일상의 추출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시 민중의 형상이다. 그들이 다중 분포 함으로써 그들은 평등해진다. 평범하거나 평범함을 가장한 그들은 자본을 집적하고 이것을 누리지만, 그것에 저당 잡혀 있고 파묻힌다. 빈의 한 가정집에서 네 명의 인물이 자리한 〈우유의 주름 펼쳐진 물-빈 Wrinkles of Milk, Unfolded Water_Vienna〉(2022. 피그먼트 프린트, 270×90cm.)은 그 극단적인 형상이다. 이 민중을 더 큰 자연의 세계 안에 재위치시킬 때 민중은 유희와 행위의 이미지에서 선동과 구호의 물결로 전화된다.

     

    운동의 물결은 역사의 형상과 문맥에 상응하며, 재현의 출처를 향하고, 역사의 장면을 현재의 자리로 가져오며 선취한다. 가령 〈행진 March〉(2021. 잉크젯 프린트, 180×60cm. 촬영, 편집: 양이언, 설치: 용해숙, 홍봉석, 이유미: 촬영장소: 제주시 화북거로마을.)에서 예수의 입성을 환영했던 예루살렘 주민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일화는 사람들이 두 손에 든 사물로 옮겨 간다면―역사를 형식으로 택한다면, 그 행렬에 속한 포클레인과 그 전면의 용암지대는 운동의 초점을 암시한다―곧, 운동의 내용이다. 거기에는 예수의 구원은 없으며, 말라버린 종려와 커다란 돌무덤과도 같은 배경, 침잠한 사람들의 표정이 있다.

     

    용해숙,〈세상을 말할 때 , 숲 The Word for the World, Forest〉 (2024. 잉크젯 프린트 , 420×140cm. 촬영 : 용해숙 , 편집 : Florian Karg, 설치 : 전수현 , 김소형 , 김수민 , 박소연 , 배윤재 , Jan Creutzenbarg: 촬영장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세상을 말할 때, 숲 The Word for the World, Forest〉(2024. 잉크젯 프린트, 420×140cm. 촬영: 용해숙, 편집: Florian Karg, 설치: 전수현, 김소형, 김수민, 박소연, 배윤재, Jan Creutzenbarg: 촬영장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은 중앙부의 사람들, 한데 겹쳐진 채 좌측을 향한 시선을 견지한 채 손을 위로 올린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그 시선이 저당잡힌 곳은 거울 안의 흰머리 여자의 같은 몸짓이라기보다는 그 광기가 비치는 웃음인데, 실제의 존재가 이미지 바깥에 자리하며, 존재는 점프컷(되며 관객의 위치에서 체현)된다.

     

    도시 스카이라인에 포함되는 초록색 바닥의 옥상에 놓인, 널브러진 화분들, 병풍의 매난국죽의 일부, 그것을 수렴시키는 “RE: EARTH”가 그려진 에코백 등이 문명과 자연의 대립의 기호 작용이라면, 흰색 머리를 지닌 구미호라는 존재의 프레임 바깥으로의 지시는, 이 복잡다단한 쓰레기-자본의 가짜 생태 구호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의 증명, 곧 다르게 소비함으로써 지구의 소진을 부인하는 인류의 차원 너머로 갈 수 있는 틈을 환각적이고 시차적으로 수여하는 듯하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인용을 거듭하는데, 그럼으로써 레이어를 복잡하게 확장하고 그것의 얽힘으로 주제를 세공한다. 제목 “세상을 말할 때, 숲”이 SF 작가 어슐러 K.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상기시킨다면, 그리하여 식민지로서 숲의 착취를 주제화한다면, 거울 속 구미호 옆의 김정헌 작가의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 -럭키모노륨〉(1981)은 이 작품을 설명해 낸다. 상단에 적힌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 라이프스타일로부터 고개 숙인 농민의 뒷모습은 실재의 차원에서 그것을 무의도적 차원에서 불편하게 침범하는데, 이 부조화, 부적응의 반동적 차원은 분명히 하단 끄트머리의 대지를 밟고 있다는 점에서, 애초에 그것과 단지 절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위로 솟구치는 그 원근이 시작되는 아파트 바닥의 럭키모노륨 소재의 시작이 그로부터 가로막히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저분한 것, 더러운 것의 차원을 우리의 시야로부터 치우는 데는 실패한다. 우리의 광고 속 자본주의의 쾌적한 이미지는 더러움의 환상으로 오염되고, 그것으로부터 지지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더러움/깨끗함, 울퉁불퉁함/매끈함, 달라붙음/쾌적함의 이분법적 기호의 도식 아래에서. 따라서 그것은 깨끗함의 환상이다.

     

    〈세상을 말할 때, 숲〉이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 -럭키모노륨〉을 오마주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열망을 빈 언어의 도식들로, 그리고 농부의 형상을 구호를 외치는 존재들의 형상으로 대비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또한 민중미술 작업의 역사적 계보를 환기시키는 차원에서도 그러하다―곧. 김정헌의 작품은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먼저 작품 설명 안에서 작품으로서 지시되고 있다. 반쯤 비틀려 있지만―거울 속 구미호로부터도 그러하다.―, 그들은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일체화된다.

     

    김정헌의 작업은 구미호 옆에 자리하는데, 그것이 잡다한 사물 전경의 사진에서 최종 출구가 되는 것처럼, 어쩌면 이 작업은 재고찰의 이미지라기보다 그로 소급되는 과거로서 고착되는 이미지가 아닐까. 그리하여 구미호는 과거라는 환상으로 튀어나오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를 가로지르는 이미지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이미지로서 말이다. 그 둘이 짝패를 이루면서, 참조점으로서 과거를 과거보다 더 근원의 과거가 총체적 난국의 현실로부터 방어하고 있는 것 아닐까, 곧 그것을 과거로서 물신화하면서.

     

    어쩌면 이 구미호는 과거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의 도입을 통해, 그 신체를 영롱한 눈과 활기로써 재가시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왜 웃고 있을까. 그 웃음의 시점은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가, 또는 가리킬 수 있는가. 그것은 도래하는 미래인가, 이미 지나간 과거인가.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의 불분명한 표정은 어디를 향하는가. 그들은 현재로부터 진정 진동하고 있는가. 이 사물들의 무덤은 현재에 대한 알레고리인가. 아님 현재를 죽음으로 방부 처리하는 것인가.

     

    방부 처리의 모티브는 〈화북천 영감당 Hwabuk Stream Shrine〉(2021. 잉크젯 프린트, 420×140cm. 촬영, 편집: 양이언, 설치: 용해숙, 찰영장소: 제주시 화북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풍경 안 중앙의 사람은 유유자적하며 자연을 향유 또는 전유하한다. 그가 누운 자리에 싸인 얇은 비닐 안에 분홍색과 초록색 등의 거대한 사물, 자연의 형국이 구성되며, 그로부터 그는 적잖이 게으르고도 거만하면서 천연덕스러운 몸짓으로 자연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는 가운데, 그 스스로 그것에 은폐되어 있는 형국을 만든다. 그는 자연과 자연의 구분의 경계에 위치하며, 자연 바깥의 사물로 함몰된다.

     

    이는 집이라는 보호막 바깥, 자본의 바깥으로 나올 때 처한 존재의 무심한 대처가 갖는 무기력함과 부존재성의 알레고리를 상기시키며, 동시에 그는 자본의 표피에 기대어 있는 형국이기도 하다. 〈우유의 주름 펼쳐진 물-홍천 Wrinkles of Milk, Unfolded Water - Hongcheon(2023. 잉크젯 프린트, 120×40cm. 촬영: Jan Gartner, 편집: Florian Karg, 설치: 용해숙, 김승찬, Katrin Baumgartner, Florian Karg, 촬영장소: 홍천 화촌면 분홍공장.)은 그와 달리, 바깥은 온전히 존재들의 놀이터로 자리한다. 이들은 중앙에 자리한 반가사유상의 상징적 오브제를 순전히 의태하는, 신화적 세계가 탈구된 완전한 일상의 유희 안에 있다. 〈세상을 말할 때, 숲〉에서 존재들은 죽은 사물들로부터 자신들의 외딴 영토를 만들고자 한다. 곧 ‘바깥‘은 무덤임에도 그것으로부터 방어하는 존재들의 또 다른 더미를, 순수한 영토를 만든다.

     

    용해숙, 〈용의 길, 고망난 들 Way of the Dragon, Hole in the Stone〉(2024. 잉크젯 프린트, 180×60cm. 촬영: 용해숙, 편집: 김경열, 설치: 용해숙, Jan Creutzenberg,  촬영장소: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용의 길, 고망난 들 Way of the Dragon, Hole in the Stone〉(2024. 잉크젯 프린트, 180×60cm. 촬영: 용해숙, 편집: 김경열, 설치: 용해숙, Jan Creutzenberg, 촬영장소: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은 대나무 대에 거름망 같은 사물의 구멍을 결합해 소리를 내거나 듣는 음향 도구처럼 전유해서 안팎을 잇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통발로 장구를 연주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 이도 있는데, 하나의 유니폼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현실이 극적 놀이로 연장되면서 특정 방향성이 지정되지 않았음을 추정케 한다. 곧 도구들을 짐작가는 대로 신체와 결합하게 하는 주문을 따른 즉흥적이고 임시적인 방편으로서 몸짓들이 그것이다.

     

    이는 물을 향한 손짓의 〈화북천 영감당〉과 방향성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 외에도 용해숙의 여러 작업들에서 방향성의 지시가 가로 놓이는데, 이는 2차원의 평면에 대한 직접적 균열과 구멍의 메타포로 적용된다. 손가락들은, 시선들은 하나같이 정면을 벗어나 너머를 향한다. 그리고 그 시선의 방향이 정면을 향하는 예외가 구미호에게서 발생한다. 그것은 거울을 향한 것이지만, 그 거울 속에서 우리를 향한다.

     

    《파랑의 여항》에서 기존의 사물-세계 안에서 작가의 단독자적 형상은 사라진다. 주체의 숭고한 행위가 비워진 자리에서 민중의 쾌활하거나 유희적인 몸짓들이 스며든다. 그 시선과 몸짓이 향하는 바는 이상의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이다, 텅 빈 기표의 자체 반향이다. 아마도 구미호는 또한 그 결정적 분기의 경계에 있다, 이미지가 되거나 이미지가 되길 거부하거나. 이 파노라마 사진 〈세상을 말할 때, 숲〉은 가령 그의 개인전 《파노라마 3부작》(2018)의 작업들에서 그가 단독자 모델로 중앙을 채우던 것에서 그를 소거한 가운데 새롭게 현상된 민중 혹은 (예외적으로) 환영적 실재 모두를 기입한다.

     

    용해숙, 〈너절한 변명〉(2018. 잉크젯 프린트, 270×90cm.)

    ‘너절한’ 사물들의 배치 아래 머리를 감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연출된 〈너절한 변명〉(2018. 잉크젯 프린트, 270×90cm.)은 사실 구미호 전에, 구미호를 포함한 기원으로서 ‘럭키모노륨’ 너머의 농부의 뒷모습을 체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역시 너절한 사물들의 옥상의 배치 아래, 불타는 쟁반을 이고 있는 작가의 뒷모습이 정중앙에 박힌 〈우울한 열정-리덕스〉(2018. 잉크젯 프린트, 270×90cm.)는 더 직접적으로 그 뒷모습을 닮아 있다. 그는 바닥 대신에 빌딩을 가로막는다, 자신에게 불길을 얹어서 말이다.

     

    더욱 너저분한 〈진지한 정원〉(2018. 잉크젯 프린트, 270×90cm.)은 얼굴이 한 손에 든 우산에 가려진 채 다른 한 손으로 물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땅에 주는 물일까, 폐허가 된 도시에 생명의 은유로서 말이다. 어쩌면 이 너저분함의 양가적 의미, 세계에 대한 지칭과 그 안에 속한 존재의 행위에 대한 지시 모두는 실존적 차원의 존재를 조소하고 기각한다. 곧 그 둘은 주체의 심리적 차원에서 구분된다.

     

    따라서 《파랑의 여항》은 이 주체의 무력함이 굴절돼 민중의 쾌락이 응결되는 환상의 영역을 투사하는 결과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모델들의 알 수 없는 표정은, 정확한 명령의 번역 불가능함에서 혹은 그 모호한 명령에 대한 적확한 반응으로 오는 것 아닐까. 민중으로 변환되는 ‘백성’의 살림집이 모여 있는 여항과 갖은 물결, ‘파랑’의 조합은 “골목에서 이는 파도”로 번역되며, 그 현장에의 탐색을 통해 “소외된 자들”의 신앙과 “공동체”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조금 더 미래적이고 또한 의고적이다. 구미호가 마치 과거에서 현재로 현현하는 가운데 잠재된 미래로 용출되는 것처럼.

     

    〈화북천 영감당〉은 자본주의의 상징적 포장재와 신앙적 차원의 염의 포장을 등가 교환 한다. 하지만 전자를 후자로 전이시키면서 전자에 대한 비판을 성급하게 소거, 승화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예외적인 건 〈행진〉(2021. 잉크젯 프린트, 180×60cm, 촬영, 편집: 양이언, 설치: 용해숙, 홍봉석, 이유미, 촬영장소: 제주시 화북 거로마을.)이다. 〈행진〉은 너저분하지 않은 작업으로, 자연의 스펙터클과 장비와 인간의 노동이 절합되며 인공적 개발을 병치한다. 하지만 종려 나무를 든 채 일렬로 늘어선 이들은 자연을 훼손하는 대신, 무언가를 애도하기 위해 자연의 경로를 따르고 있는 것―미니 굴착기라는 중심은 그 안으로 흡수되며 전도된다―으로 보인다.

     

    상단 위쪽, 언덕 위에서 낚싯대로 미역을 들어 올리고 있는 남자 아래로, 언덕 아래의 땅에는 대형 노란색 찌 구조물들이 파묻혀 있다. 서사는 결코 온전하게 메워지지는 않는데, 제주의 개발 정책적 기조를 나타내는 파헤쳐지고 뒤집힌 땅은 제주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사라진 바다로 전이되는데, 낚시라는 기호가 불특정한 거대한 힘으로부터 예외적인 개체적 행위의 미약함으로 기입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력한 환상인 것이다. 이때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백성들이 환영의 의미로 흔들었던 종려나무라는 도상이 그것을 향해 가는데, 이때 푸른 잎들 대신 앙상하고 둔탁한 가지는 십자가 나무의 형벌에 가깝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장소에 대한 우울과 애도는 신을 외부로부터 맞는 대신 신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개체들의 연합된 운동의 빈 행위―신의 상실에 대한 우울과 애도―로써 갈음된다. 그런데 저 노란색 발광하는 구조물과 거기에 맞닿기 전, 중앙의 위치에 다다른 가장 선두의 존재가 아이라는 점은,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의 도착된 환상을 심어주는 것처럼 보인다―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은 해에 전시가 열렸다. 두 손으로 든 나무의 무게와 황량한 대지, 다른 사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워진 연출로부터 〈행진〉은 직관적으로도 우울한 심상을 초래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메울 수 없는 부재를 무겁게 해소하려는 개체들의 분투를 보여주는 것이다, 곧 공동체의 형상 아래 주체의 공백이 이어진다.

     

    너저분한 사물들은 자본주의의 영도 아래 고고학적 차원에서 발굴, 조명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 안의 존재들은 그곳에 안착되는 대신 또는 신경 쓰지 않는 대신, 너머로서 미래를 염원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그 환경과는 상관없는, 그 환경을 개의치 않는 일종의 모델들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곳은 현재화되기보다 더 정확히는 미래를 불러오기보다 어떤 과거로서 종착지, 폐허의 전경으로서 의미를 강화하는 듯 보인다. 〈행진〉은 예외적이다. 아마도 사물의 무게와의 연합, 곧 이 나무라는 일정 정도의 무게를 지닌 지지체가 인물들의 내면적 구심점을, 무겁고 둔탁한 발걸음을, 퍼포먼스로의 진정성 있는 신체적 투여를 만들어 줬다고 하면 과장된 것일까.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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