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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민욱, 《하이퍼 옐로우》: 관점으로서 역사 혹은 관점을 향한 역사의 간격들
    REVIEW/Visual arts 2026. 2. 24. 19:36

    임민욱, 《하이퍼 옐로우》전시 전경. ⓒ스튜디오 오실로스코프[사진 제공=일민미술관](이하 상동).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솔라리스』에 등장하는 솔라리스 행성의 바다는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 불가능한 의식의 세계를 갖고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 심연의 중핵을 차지하는 실재라 할 수 있다. 《하이퍼 옐로우》의 입구에 있는 임민욱의 〈솔라리스〉(2025. 코르크, LED 조명, 혼합 재료, 가변 크기.)는 이 행성의 지표면을 재현하는데, 그것은 주로 코르크라는 재료로 만든 황톳빛 봉분들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공포 대신에 미지의 영역으로서 여러 자국, 문양, 사물 들을 관찰하고 탐사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신발을 벗거나 덧신을 신고 들어간 관객이 맞는 건, 신체 전체를 감싸는 건 하나의 조망할 수 없는 공간이며, 이 전체는 하나의 장소이다.

     

    이 총체의 세계는 분리된 오브제의 형식적 진단의 경로를 산출하는 대신에, 관객의 신체가 체현되는 환경―그 위에 서 있다.―으로, 그 달라진 환경에 대한 근거와 그 상징적 차원의 오브제와 기호를 해석하고 상상해야 하는 침입자적 위치를 떠안는다. 그 미지의 장소에 새겨진/놓인 기호들은 8세기경 지어진 도다이지 사찰 법당의 도면이 매핑된 역사적인 문화 기호들이라는 점에서, 솔라리스의 바다는 죽음의 실재가 주는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 아닌, 역사와의 절대적 차이에 대한 불가해한 인식의 근거로 전유된다. 하지만 이 역사는 다시 현재를 경유한 미래로 투사된다.

     

    이 미래는 근시적이고 즉물적인 차원에서도 발현되는데, 가령 가장 멀리서 두 개의 원반 이미지가 점차 가까워지며 융합하는 순간, 곧 평면성의 주요한 감각을 정면성의 차원으로 불러세우는 순간은 이 공간의 시간성과 지향성에 따른 경로 의존성의 측면을 보여준다. 이는 이 공간을 활주로로 설정하며 이동을 위한 장소로서 환유를 우묵한 시간의 표층 또는 지질학적 시간의 증거 또는 이질적인 신체로서 표면 위에 또 다른 시간과 장소성을 덧대는데, 이에 따라 이 장소는 그 자체로 이동 이후의 어떤 영원한 도착지로서가 아니라 이동의 메타포, 이동하고 있는 신체의 일시적 속성이 각인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작품의 근거들은 절대적인 이질성의 표상에 기울어져 있음에 따라 관객은 작가라는 존재의 의식을 물신화하는 대신, 그 작가가 향하는 전 문화의 세계에 대한 탐사를 추적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와의 시차, 현재에 대한 다른 관점의 창안이 작가의 이념으로 산출된다. 여기서 작가의 자리는 현재와 관객과 그 스스로의 피상성과의 어떤 절대적 거리를 내포하는 기호, 이미지, 문장 들의 반복적 차원 속에서 획득된다. 이는 “관광객”으로서 부유하는 신체로 성립한다, 그리고 이는 그 전시의 형식으로 귀착된다.

     

    하나의 장소-환경-세계가 보여주는 건 무엇인가. 또는 그로부터 탈취되며 산포되는 기호가, 오브제가 향하는 세계는 무엇인가. 미래를 품고 있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과거와의 현격한 시차는 어떻게 현재를 어긋(내며 미래를 생산해)낸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각각의 세계에 내속하며 충만한 의미의 흔적으로서 머무르는 다종 다기한 작업들은 어떻게 발화하기보다 읽어냄이 가능한가. 그것이 필연적으로 낯선 곳에 떨어진, 현재가 어긋나 있는 관광객이라는 주체를 산출하는 것이라면, 그 세계와 관광객의 사이에 생기는 거리, 그로 인한 관광객의 의식상의 잔여 이미지는 관광객을 다만 탈주체화된 상태로 만드는 묘약 같은 것은 아닌가.

     

    전시에서 작업들이 지닌 형태적 다양성과 매체적 다양함은 주제의식적 연계됨과 차이적 변용에 따라, 흩어지기보다 연결되며 그 시차들을 하나의 역사의 원환으로 해소한다, 또는 작업들의 차이를 역사의 추상성으로 소급시켜 버린다―이 안에서 작업들은 시차로 벌어지기보다 시차로 엮어지는데, 이는 결코 매끄러울 수 없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작품들이 가진 이질적인 형식들이 아니라 역사의 상상적 파편들 가운데의 간극이다. 마치 작가는 현재가 아닌, 그 너머의 것들에 복무한다. 이 역사는 물론 〈솔라리스〉의 땅처럼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체현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과거와 미래가 교직하며 하나의 관점으로 펼쳐지는 순간을 말한다. 실재가 아닌 잠재적 영토, 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영토, 현재를 다른 식으로 읽고 시간의 경로를 바꾸는 변경에 대한 수행적 의식, 시간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미지들의 변환, 곧 주어진 역사가 아닌 현재의 다시 쓰기로서 기입되는 힘을 의미한다. 매체는 그런 의미에서 임민욱에게 부차적이며, 그러하기에 매체는 선택될 수 있고, 효과를 위해 복무할 수 있다.

     

    하지만 관광객에게는 이미지 이상으로 그 신체를 지지하는 영토(로서 살에 상응하는 매체)가 필요함은, 〈솔라리스〉가 품고 있는 세계가 추출되듯 또 다시 전시장의 다양한 형상들로 나타나는 그 흔적들이 무언가 (그 환경을 벗어났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작품으로서 불투명하다는 감각을 준다는 것과 연관되는 부분이 아닐까. 다양한 매체의 표현 양식은, 매체 간의 변환의 자율성은, 곧 형식과 결부되는 매체 특정성의 차원을 희석시키면서, 컨텍스트―역사(이는 한편으로 수많은 작업이 일종의 임민욱이라는 생활 세계, 곧 전시의 일부로 실제 들어선 작업장의 일부가 전체로서 환유되어 가는 양상의 차원에서, 작가 개인의 역사를 가리키기도 한다.)―의 방대함으로 환원된다.

     

    ‘관광객’의 시선과 신체는 〈S.O.S-달려라 신신〉(2024-2025.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 30분.)에서 (비로소) 육화되는데, 이는 관(광)객을 비추기보다 배라는 흔들리는 영토 위에서 카메라가 연장되기 때문이다. 〈솔라리스〉가 관광객의 환경을 그 신체와 함께 체현한다면, 〈S.O.S-달려라 신신〉은 그 환경을 파편적 기록들로 연결된 시간성의 매체로 체현하며, 그와 대구를 이룬다―처음과 마지막에 각각 자리하는 이 시공간적 환경의 제시는 그 사이에 있는 기괴한 역사적 잔여들로부터 벗어나 안정감을 준다.

    우선, 슈에 선장이 하이쿠의 함축적인 짧은 문장들로 진술된 “바쇼의 방랑 규칙”을 읊는바, 관광객의 시점에서 바깥에서 오는 이 말들은, 전시의 전체적인 윤리와 태도, 그에 따른 방식으로 전시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말들은 또한 역사의 빈 자리에서 온 것이며, 따라서 현재와의 연결된 맥락을 직접 내비치지 않는다.

    가령 ‘관찰하기 전에 기억하지 말라.’와 같은 말은 이는 일견 이미지에 대한 현재의 시점, 현재의 신체에 대한 강조로 읽히는데, 이는 기억에 한 더 심오한 방법론을 유추해 내게 한다. 곧 이 주문은 물적 토대를 지닌 현재(의 증거)로부터 출발하되 (그를 지지하며) 기억의 시차적 생산 작용을 유예하라는 식의 기억의 토대를 관찰로부터 견인하라―관찰에 대한 강조―라는 조건문이면서 목격자로서 신체와 상상하는 신체를 결합하라―기억에 대한 초점―라는 다중 조건문으로 읽히는 것이다.

     

    한편, 나에게서 타인을 본다는 말은 타자화가 아닌 타자성에 대해 주목하는 부분인데, 이는 “모든 것이 내 몸이다”라는 문장이 덧붙으며 증폭된다. 곧 다음 문장은 괴-장소에 불시착한 신체의 유영성과 유령성으로부터 시작된 전시의 흩어지는 신체성, 흩어진 사물들로부터 연유되는 조각 나는 신체성 모두를 주체의 착시로 또는 착시되어 형해화되는 탈주체의 전유로 변화시킬 수 있는 문장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문장은 이미 바깥의 진리를 소화하는 나의 내부를 향하고 있는데, 곧 타자성을 모든 것에의 어떤 것의 함축에서 모든 것의 어떤 것에의 함축으로 전환하며 전유하는 문장으로 인해, ‘나‘는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잠재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는 예술의 길과 내통하고, 곧 그 모든 것이 되기 위한, 그 모든 것 앞에서의 “부서짐”의 시도들과 실패들이 긍정되어야 하며, 수도의 자세와 상응한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걸림이 없”는 열린 자세가 요구된다. 이 관광객의 의식 개조적 명상으로부터 그 ‘모든 것’의 유형들이 바깥을 넘나들기 시작한다. 또한 ‘포터블 키터’는 세계를 항해하는 수행의 지지체이자 또 다른 세계 자체를 떼어낸 파편으로 보이는데, 이는 유령 주체로서 관광객에게 비가시적인 화두로 육화된다.

     

    영상이 매개하는 것과 같이 그 바깥의 ‘도시도 달리고 있’으며, 우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우리에게 건네어져 온다. 이는 〈S.O.S.-채택된 불일치〉(2009)의 다른/새로운 버전으로 볼 수 있는데, 곧 앞에 펼쳐지는 우연한 풍경과 구성된 상황과 연극적 장면 들이 장소 특정적이라는 점, 곧 장소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며 그 장소에 불화하면서, 결과적으로 유동하는/사라지는 좌표로 또 다른 장소에 각인된다는 점, 특정 장소를 기이하게 가리키며 그것을 벗어난 장소로 소급된다는 점, 무대가 탈착된 장소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지는 환영적 주체의 신체 안에서만 실제 장소가 된다는 것은, ‘S.O.S.’의 계열들 안의 장소‘들’로서 지지체가 곧 하나의 매체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장소와 장소의 동기화로부터 저 앞의 현재는 사라지는 과거이자 도래하는 미래가 된다. 일본의 신을 모시는 가마를 휴대 가능한 디자인적 사물로 전유한 전시에 놓인 〈거울 오미코시〉(2024. 철, 수퍼미러, LED 라이트, 연기 발생기, 조각된 지팡이 머리, 바퀴, 혼합 매체, 275×70×280cm.)로부터 빛이 반사되며, 어둑한 대기의 S.O.S. 신호를 완성한다. 이 반짝거림은 그에 앞서 배에 울려 나오는, 김민기의 노래 〈친구〉(1968)의 구분되지 않는 ‘깊은 바다’ 위의 ‘흩날리는 꽃잎“이기도 하며, 또한 바다와 꽃잎, 그 둘 간의 서로 상응하는 특성, 곧 산 것이기도 죽은 것이기도 하다는 어떤 구분 불가능성으로의 시간, 그 구분의 무력해짐의 과정이 갖는 세계의 우묵한 층위로부터 멀지 않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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