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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재민, 《폭포와 희열》: 일상의 기호학적 검출로서 사유 혹은 리서치
    REVIEW/Visual arts 2026. 2. 20. 20:30

    차재민, 《폭포와 희열》 전시 전경. ©조준용(이하 상동).

    《폭포와 희열》은 하나의 동명의 영상과 그것의 단초가 될 법한 여타 드로잉들로 구성된 전시로, 그 둘의 상호 연관성은 하나의 닫힌 루프를 그리는 가운데, 무언가에 도달하기 직전의 잠재태로서 가시화된다. 실제 드로잉이 영상에 이르기 전의 어떤 사고, 언어, 관념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영상을 예비하고 선취한다면, 영상은 어떤 무한히 반복되는 순환성의 시간 체제를 그리며 특정 장소들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주는데, 이러한 결말의 서사가 없는, 과정의 연속된 경계만을 그리는 건 잠재태로서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드로잉은 그것을 형식적으로 인계하는 어떤 과정 차원의 잠재적인 것이 된다.

     

    이 전시의 주요한 지점을 차지‘할’ 것인, 일상의 평범함을 조금 특이한 것으로 비범한 것으로 포착해 낸 이 밋밋한 영상보다는 역설적으로 사고와 내면의 구조화로서 취해진 다양성의 조각들인 드로잉이 조금 더 세계에 대한, 세계를 보는 관점의 입체성과 독특함을 드러낸다고 보이는 것 역시, 이 전시가 소위 완성을 향한 전 단계 같은 감각, 실은 의도적으로 특정 서사의 매듭점을 유예하며 일반적으로 네가 생각하는 결말 따위는 없다는 감각에 의하면, 역설적으로 그 전의 시간, 또는 무언가를 먼저 안고 있는 시간으로서 드로잉은 영상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영상이 그 결말에 더 가까운 시간을 선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고, 언어, 관념 자체로서 드로잉들이 더 잠재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상이 구체적인 현실 위에 입혀진 어떤 가상, 현실인 양 도포된 가상을 보는 것이라면, 드로잉들은 이 현실과의 혼동을 애써 의식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현실로부터 더 자족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현실 자체를 완전하게 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상에서 눈여겨볼 것은 그것이 현실의 재현 체계가 아니라, 자족적인 세계 질서를 그 위에 ‘얇게’ 가설하며 현실과의 어떤 틈을 현실과의 닮음 안에서 펼쳐내고 있다는 것이다.

     

    〈폭포와 희열〉(2025. 3채널 비디오 설치, 4K, 컬러, 사운드, 14분.)

    우선, 영상 〈폭포와 희열〉(2025. 3채널 비디오 설치, 4K, 컬러, 사운드, 14분.)은 낮과 밤이라는 자연의 거대한 시간 체제 아래 진행되며, 세 가지 장소를 절합한다. 강변이 사람들의 여러 모빌리티 양상을 좇는다면, 굴다리는 새와 인간의 절합된 삶의 분포로 재산출되고, 인공 폭포 앞은 수많은 다양한 인간 존재들의 행위 양식으로 연기된다. 높이가 긴 영상에 맞춰 세 개의 세로로 놓인 패널이 나란히 있고, 여기서 낮과 밤의 변경만이 작동하는 일관된 변화로 고착된, 거꾸로 흐르는 폭포의 영상이 제일 오른쪽을 차지한다―그 앞쪽에 놓인 스피커들과 별개로, 전시장에서 오른쪽으로 끝까지 뻗어 나간 장소에 걸린 스피커가 이 소리와 따로 동조되는데, 그럼으로써 폭포에 둘러싸여 있음의 감각이 만들어진다, 이 주조음으로 파생되는 영상의 지배적 지위를 물리적으로 인계하면서다.

     

    여기서 거꾸로 된 ‘폭포’는 그 수직으로 상승하는 운동성과 꽉 들어찬 사운드로써 ‘희열’을 고안해 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줌 인 된 의사-자연 앞에 검도하는 사람,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 그것 자체를 찍는 사람 등이 차례차례 등장하면서 폭포와의 관계성을 구성한다. 이는 나머지 두 개의 영상에서 펼쳐지는데, 롱 샷이나 미디엄 샷을 오가는 카메라와 클로즈업으로 이를 비추는 다른 각도의 카메라는 두 개의 영상에서 끊임없이 교환된다. 그 안에서 낮과 밤이 교환된다면, 강변-굴다리는 주로 밤의 풍경에 주목한다.

     

    그것은 이동하며 스케이트에서 자체 발광 되는 빛을 추적하기 위해, 또 다른 활성화된 일상의 차원을 담아내기 위함이다. 인공물과 새의 컨트라스트를 함께 부각하기 위함이다. 또한 스케이트의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이 빠르게 뒤섞이는 이미지로부터 화면에 RGB 색상을 덧입히기 위함이다. 곧 이 작은 것의 우위, 작은 것으로부터의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역전된 위상은, 드로잉의 자율적 토대 자체이기도 하다. 이 세부의 우위가 밤에 위치한다는 지점, 곧 밤의 세부가 가진 우위―낭만적 차원에서, 밤은 또한 세계의 진면목을 드러낸다.―에 따르면, 폭포 앞의 낮 풍경도 실은 시간의 두 체제를 가리키기 위해 논리적인 차원에서 삽입되는 것에 가깝다.

     

    폭포 앞에서 인상적인 건 일상에서 추출해 온 사람들의 행위 양식이 그 자체로 연기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지나가는 여타 사람들은 비의도적으로 동원되는 엑스트라로서 그 배경으로 포함되는데, 이러한 일상을 연기하기에 덧붙는 일상 자체는 그것과의 관계성 아래 재검토되는 부분이다. 클로즈업되는 새들로부터 소리가 형식으로 추출되어 일부 구간의 주조음으로 작동하는 부분 역시 독특한데, 이는 시각적 포착으로부터 그것을 진정으로 알게 됨, 듣게 됨을 전제하며, 그로부터 그것이 내재적으로 작동하는 구조의 차원으로 확장되는 부분을 이념 자체로 가시화한다. 새는 우리 삶의 부속이 아니라 우리가 부속되는 세계 자체를 주조한다. 스케이트의 빛과 새의 울음은 세계를 구성하는 미소한-거대한 표지들이다.

     

    〈서식지〉(2025. 도화지에 과슈, 39.4×27.2cm.)[=사진 좌측].

    〈서식지〉(2025. 도화지에 과슈, 39.4×27.2cm.)는 이 인간과 새의 공간을 대별된 두 개의 장소로 놓는데, 그 둘의 서식지가 대등한 크기의 검은색의 부등변육각형 두 개로 주어지고, 그 안에서 인간과 새는 각각의 자신의 형상 안에 고인다, 또는 형상 위에 투과된다. 하얀색 안에 파란색 혹은 회색의 계열로서 말이다. 그 바깥의 세계는 다시 하얀색의 비교적 매끄러운 퍼짐과 하얀색에서 파란색-회색 계열이 점증적으로 가산된 운동성의 궤적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이 운동성은 그것이 더 빽빽하고 그래서 단단하게 응결된 채 존재로 ‘굳어진다면’, 그것이 더 느슨하고 자유롭게 이지러질 때 그것은 순수 운동의 비존재성으로 열려 있음의 상태가 되는, 어떤 존재에 대한 운동적 차원에서의 구성이라는 비의적 이념을 가시화한다.

     

    그렇게 분절된 두 개의 세계는 내통하는데, 형상으로서 서식지와 배경으로서 서식지 바깥은, 그 안의 또 다른 형상으로서 새와 인간 각각이 배경으로서 색을 머금고 있음을, 그로부터 시작됨을 경유해, 또 다른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형상과 배경이 더해진 작은 세계 말이다. 따라서 이 소세계와 거대 세계의 경계는 검은색의 형상, 검은색으로 구획된 형상일 뿐인데, 이는 물적 토대―어떤 하나의 명확한/비유연한 닫힘―로서 환경이 세계를 분리하고 나아가 세계의 경계가 그 내부로 체현된다는 것까지를 함의하는 듯 보인다.

     

    대부분 여백 위의 하나의 형상으로 처리된 드로잉과 다르게 이 배경과 형상의 구분은, ‘밤의 편대를 위한 연구’ 시리즈에서 반복되는데, 〈밤의 편대를 위한 연구 1〉(2025. 도화지에 과슈와 콜라주, 47×64.5cm.)에서 배경의 검은 구획은 “밤”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면, 〈밤의 편대를 위한 연구 2〉(2025. 도화지에 과슈와 콜라주, 47×64.5cm.)에서는 하얀색 배경 위의 회색 뭉쳐짐이 만든 ‘뇌’의 형상, 그 위에 더해진 검은색 배경 ‘위에’ 손바닥을 찍은 사진들이 관념-의식과 실재-신체의 상관적 도식을 만든다. 이는 검은색 부등변육각형 안의 형해화된 뇌와 그 바깥 하얀 배경 위의 종과 횡 방향으로 놓인 뼈들, 그리고 검은 구획에 직접 대응하는 하얀 환풍구 혹은 환풍기 들의 사진들이 콜라주로 배치된다.

     

    “과슈의 매트한 발색과 붓질이 작가 손의 소근육 감각을 떠받치는 표면이 되어, 영상과는 사뭇 다른 속도인 작가의 촉각적 사유로서, 영상 속 공간을 읽기 위한 또 하나의 좌표계로 작동하도록 한다.”(추성아) 이는 기획자의 서문에서 작가의 드로잉에 대한 요체를 핵심적으로 전파하는 문장이지만 다소 모호하기도 하다. 이는 두 개의 중첩된 지대에 대한 양방향성으로의 수행인 ‘떠받침’ 그 두 개의 의미를 따로 또 같이 표상해 내는 데 어려움을 준다는 의미이다. 곧 두 개의 의미를 개별적으로 표상하며 하나로 종합하는 데 입체적으로 의미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 손의 소근육 감각”(A)과 “과슈의 매트한 발색과 붓질”(B)이라는 이 두 절은 떠받침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선후 관계와 인과 관계의 비틀림이 있다. 곧 A가 B를 실질적으로는 완성함에도 B가 A의 행동유도성의 매체로 가정되고, 따라서 B가 A를 결정짓는다는 것, B→A의 수행은 사실 A→B의 잠재적 발현이라는 것이 B의 A의 떠받침으로 현상되는데, B의 과슈가 만드는 표면‘에’ A의 손이 자리하는 표면, 이 겹쳐짐으로서 떠받침은 이후 “작가의 (독특한/고유한) 촉각적 사유”(C)로 소급해 간다.

    이것은 실은 과슈의 매트한 발색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을, 작가 손의 소근육 감각을 그것으로 유도하고, 작가의 촉각적 사유를 촉발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는 절대적인/낭만적인 매체 결정론적 비약이 있는 것 아닐까. 앞선 ‘겹쳐짐’은 그 두 사이에서 어떤 틈이 최소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슈의 매트한 발색은 작가 손의 소근육 감각을 떠받쳐짐의 사태로 인도하고, 작가 손의 소근육 감각은 과슈의 매트한 발색을 내는 데 기꺼이 그 위의 떠받쳐짐의 표면과 같이 물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매트한 발색은 하나의 시작으로서 배경과 그 안에서의 점증되는 시간으로서 고임으로 연장되는데, 이때 하나의 표면이 다른 하나의 표면을 또한 담는다, 또는 떠받친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신체와 그림의 혼동 혹은 중첩에 대한 은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또는 의도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이때 매트함으로부터 손은 그처럼 투명해지며 매트함의 표면은 손의 신체적 그 증상을, 나아가 손의 투명함을 기록한다. A는 B를 체현하지만 B 역시 A를 체현한다. 따라서 그 둘의 서로 다른 이행의 맞물림으로부터 C를 들여다볼 수 있다. 사실 거기에는 언어라는 단서가 있다. 곧 사유를 만드는 건 언어의 기입으로, 이미지를 참조 자료로 전도하는 바깥으로의 명백한 언어의 침입 작용에 의한 사유가 있다.

     

    〈콘크리트의 표정〉(2025. 도화지에 과슈, 50×70cm.)[=사진 좌측 상단].

    가령 〈콘크리트의 표정〉(2025. 도화지에 과슈, 50×70cm.)을 보면, 중앙의 드로잉 바깥 배경으로 갖가지 ‘소리’를 기술해 놓았는데, 이는 거꾸로 덩어리로서 이미지 안의 미세한 선분들의 동세를 뚜렷한 언어적 표지이거나 시간 차원의 움직임으로서 일종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감각 혹은 언어를 부각시키는 듯 보인다. 그것은 사물의 얼굴을 읽어낸다는 것, 사물로부터 무언가를 듣는다는 것과 같은데, 이는 〈폭포와 희열〉의 고정된 축인 폭포를 동적 평형의 차원에서 하나의 덩어리-얼굴로 읽어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 하나의 얼굴은 그 안에서 미시적인 것들을 읽어내는 기호들의 지도가 된다. 그것으로부터 사물의 미세한 “이상한 멈춤”의 기호를 읽어낼 수 있고, 그 멈춤의 동작적 표지를 체현하는 미시적 주체를 담는 거대한 세계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다. 희미하거나 미세한 소리, 기척이거나 소리가 아닌 기척 역시 읽어낼 수 있는데, 이는 〈폭포와 희열〉에서 핍진한 이미지들이 서사를 만들지 않고 그 자체로 정박된 이미지로서 그에 대한 미세 지각 차원에서의 탐구로 활용되는 것으로 소급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하나의 고정된 배경 이미지 안에 자리하게 된 이미지들은 그 배경에서 차이로 응결되는, 그 배경 안에서 기척이나 미세한 소리로 표지되는 것 아닐까. 〈폭포와 희열을 위한 연구 2〉(2025. 도화지에 과슈와 콜라주, 39.4×54.5cm.)는 일종의 강이나 바다와 같은 공간으로서 파란색 계열의 번짐과 얼룩짐으로 형상화하고 그 위에 각종 새와 같은 자연의 생물들을 콜라주로 배치하고, 그 위에 다시 콜라주로써 인간의 활동 양상들과 직사각형 검은색 배경 안의 흰 글씨로 된 표찰로 그것을 명명해 두는데, 그 안에는 폭포도 속한다.

     

    따라서 배경은 변화가 갈음된 고정된 ‘하나의’ 축을 이룬다면, 거기에는 임시적인 것들, 이동하고 움직이는 것들이 덧붙여진다. 세부의 기술로서 적확함을 가져오기 위함이 있지만 콜라주는 본질적으로 그것을 ‘떠받치는’ 배경과의 차이를 명시하기 위한 분절로서 의도된 것이며, 그 안에서 발생하는 생명의 기호를 읽어내는 기호 복합체적 탐구의 양상들을 만들어 낸다. 중앙에 자리한 두 개의 스틱을 양손으로 들고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노년의 모자 쓴 남자의 콜라주 아래 “표현과 실제”가 표지되는데, 무엇이 표현이고 무엇이 실제를 의미하는가.

     

    과슈의 매트한 발색이 하나의 표현이라면 콜라주는 실제의 재현이겠지만, 이는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데, 배경 이미지를 하나의 실제로 본다면, 그 위에 자리하는 콜라주는 일종의 표현의 양태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호학적 검출 과정으로서 작가의 인지적 차원이 표현 자체를 발굴한다는 것으로 근본적 이해를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인데, 앞선 〈콘크리트의 표정〉에서처럼 하나의 실제로서 콘크리트에서 작가는 미소한 “표정”들을 읽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폭포와 희열〉을 정적 배경(실제) 안에 고이는 표현의 여러 양태들에 대한 탐구로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폭포와 희열을 위한 연구 2〉(2025. 도화지에 과슈와 콜라주, 39.4×54.5cm.)

    〈폭포와 희열을 위한 연구 2〉(2025. 도화지에 과슈와 콜라주, 39.4×54.5cm.)에는 폭포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있는데, “폭포는 수평을 이해하기 위하여 잠시 눈을 감는다.”와 “폭포는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가 그것이다. 전자에서 폭포는 의인화된다면, 후자에서 폭포는 구체적인 일상의 인간의 행동 양식으로 체현된다. 여기서 폭포를 〈폭포와 희열〉의 그 폭포로 놓는다면, 재단된 일정 정도의 크기라는, 일종의 수평의 맞춤으로 제어되는 이 폭포는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그 관성적 행보에 상응하는 무의지적 의지의 차원에서 눈을 감는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폭포의 재단됨을 수평의 이미지라는 표현으로 갈음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이해로서의 행위를 또한 체현하는데, 그것은 잠재적 이미지로서 발신이 되먹임되어 혼동되는 또한 혼합되는 주체-대상의 전위적 양상을 가시화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폭포를 보기 위해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텐데, 이는 폭포를 가동시키기 위해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관리인의 모습을, 그리고 그 폭포를 하나의 일정한 리듬으로 상정하고 그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의 일상적 반복의 모습을 환기한다. 아니 양자―폭포와 폭포와 연결된 주체들―는 상호 주체적으로 공명하고 또 서로로서 번역 가능하다.

     

    “서식지”의 반경에는 (인공) “폭포”가, 각종 “콘크리트” 구조물이 자리한다. 그것은 “산책”을 통해 “매일” 마주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의사-자연이며 자연과 문명이 절합된 양태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 주관 안에서 하나의 안정된 공간으로 상정된다. 작가는 이 서식지 안에서의 다양한 표현의 기호들을 탐구한다. 그 서식지에는 〈폭포와 희열〉의 경우,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델들이 투여된다면, ‘폭포와 희열을 위한 연구’의 경우, 그것들이 콜라주로서 부착된다.

     

    그것은 모두 일정한 재현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 행위들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하나의 의례일 수도 있고―그것들은 지극히 평범한데 그리하여 오히려 뭔가 비범한 무엇을 지닌 것으로 표상되는 듯 보인다.―, 그로써 당사자들은 희열을 얻어낼 수도 있다. 따라서 작가에게 그것들은 하나의 동적 표현이자 의미의 약호들인 것으로 보인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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