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장서영, 《올 노 그립》: 제어되지 않는 또는 내파되지 않는 세계
    REVIEW/Visual arts 2026. 1. 31. 21:45

    장서영, 《올 노 그립》촬영: 이지양, 제공: 작가(이하 상동).

    장서영의 《올 노 그립》은 전시 공학적으로는 동명의 작품 〈올 노 그립〉(2025. 단채널 영상, 13분 45초.)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 밖의 작품들을 그것의 부속인 양 해체시켜 늘어뜨려 놓는 방식을 택하는데, 대표적으로 〈평활근〉(2025. 스테인리스스틸, 200×270×70cm.)은 영상에 나오는 “5단 변신 침대” 혹은 “5단 변신 자동차”의 뼈대‘들’로 그것은 그것들로만은 온전히 합체되지 않은, 합체될 수 없는 “가변”의 형상을 겨우 이루고 있다―여기서 숫자는 변화의 단계가 아닌 유형학적 분류의 기준으로 추정되는데, 곧 이 침대는 “욕창 없는 다섯 개의 자세”를 위한 가변 모델이다.

     

    그것이 내장의 근육이자 불수의근으로서, 우리의 의지로 구동되지 않는 근육이라는 점은, 금속 파이프 관의 이 틀이 머리와 허리를 기대고 무릎을 받치는 침대의 기본 틀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 조응한다. 여기에 이 구조물은 바깥의 날개들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데, 곧 침대-자동차의 어떤 계열, 침대에서 자동차로 이어지는 어떤 경로를 가시화하는 이 증거들은, 제목을 경유해 비로소 적확해진다, 또는 제대로 포집된다. 우리의 힘을 들이지 않아도 조종되는 전동 침대와 자율주행 자동차의 모습이 우리의 완전한 잠에 대한 하나의 은유를 이루는 지점 말이다.

     

    무의지적인 신체와 제멋대로 탈주하는 동력 장치의 대비는 〈올 노 그립〉 전반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스마트폰을 들고 옆으로 누운 여자의 얼굴 반 토막이 화면을 덮는 것에서 시작된 영상은, 무언가를 찍고 있는 카메라의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는데, 카메라가 현장을 찍는 예외적인 시점으로 예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여자가 ‘찍고’ 있던 건 사실 스마트폰의 화면이다. 그러니까 이 안에서 찍는다는 것은 기록을 남기기 위한 차원으로 변용되지 않은 채 단지 현재를 비추는 차원에서만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그것은 그냥 현장을 중계한다. 마찬가지로 본다는 것 역시 그러한데, 여자가 보는 건 이 현실 바깥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 안을 반영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피드백을 완수하는 것과 다름없다. 영원히 ‘현재’라는 회로를 완성하는 것이다.

     

    “외부의 표상들로부터 주의를 거두고 어떤 감정들이 멎을 때 비로소 고요한 마음의 집중에 들어간다. 그것이 평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이미지들은 내재적이라기보다 폐쇄적이다. 자기 반영적 공간은 내면에의 침잠―“평안”―을, 세계―“외부의 표상들”―와의 분리를 의미한다. 〈스틸 무빙〉(2025. 단채널 영상, 3분 12초.) 역시 〈올 노 그립〉에서 RC카의 주행을 모델링하는 것 같은 자율주행 자동차의 이미지를 다른 버전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올 노 그립〉의 참조 이미지로 기능하는데, 차창 밖에 비치는 세계의 풍경, 곧 “외부의 표상들”은 그것이 단순히 분리되어야 할 세계를 흡수하는 동시에 차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인데, 곧 화면은 이 자동차의 차체로 완전히 잠식, 또는 침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선 방식과 같이 일종의 기록 없는 카메라이자 응시 없는 텅 빈 주체의 시선에 상응한다.

     

    곧 〈올 노 그립〉에서 스틸 프레임의 한 조각과 같이 누워 있는 모델의 눈은 세계를 보기보다 세계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유리창 같은데, 이는 그로부터 ‘주의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때 울려 퍼지는 남자의 음성은 전형적인 광고의 격앙되고 힘준 목소리를 띠고 등장해 이내 그 안에 광고를 예고하며 삽입하는데, 결과적으로 일자의 이 목소리는, 동일자의 또 다른 반복은 광고 안의 광고라는 또 다른 닫힌 원환에 대한 메시지다.

     

    사실상 이 모든 현재를 화면으로 외화하는 이 목소리는 동시에 이 현장 안에 울려 퍼진다는 점에서 엄밀히 오프 사운드가 아니며, 그럼에도 내부로 소급되는 기원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것의 실체가 지정되지 않는다는 점, 지지체의 근거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그것은 텅 빈 공간을 일정한 크기로 채우는 진정한 입체 서라운드 스피커다.―이 이 모든 화면과 장소를 횡단하는 초재적인 시선으로 작용한다는 점에 상응한다는 것으로부터, 이 유령성의 목소리는 수동성의 주체와 달리 권능을 지니고서 내면에 체현되는 내레이터의 존재로 부상한다―사실상 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또한 장소에 체현된다.―, 그가 아난다를 부르며 석가의 유훈을 같은 목소리 톤으로 재현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사실 이 남자의 목소리는 어색한 분절성을 가지는데, 이는 AI의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화면 안에, 광고 안에, 주행의 서킷 안에 닫힌 “부동”의 주체에게 가해지는, 이 모든 걸 차체 안에서만 작용하는 내부의 그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남자의 목소리는 RC카의 랩을 경기로 기입하고 이 안의 관람자를 상정하는 일종의 경기 해설자의 형식을 띤다. 광고는 그것의 중단이라기보다 연장인데, 또는 더 포괄적 차원에서의 함입일 수 있는데, 가령 이 경기 자체가 허구로서 삶이라는 실체를 표지해줄 경계면이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이 광고가 이 “듀레이션(duration)” 자체를 무한하게 만들기 위한 쉼표 같은 것으로서 기능하면서, 멈춰진 현재를 비춤으로써 무한한 반복, 서클이라는 텅 빈 형식에 대한 고찰을 유일한 관찰자적 시점을 들여오는 것으로써 성취한다.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과 끈에 묶인 수레 중 어느 쪽이 너인지”의 질문에 의하면, 타동적 삶과 주체의 행위라는 양극단에서 선택의 몫은 제한된다. 여분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 핵심인데, 이는 이 서클을, 광고 바깥을, 새로운 미래를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차체 안의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시간으로서 강제를 확약하는 방향으로 귀결하는 듯하다.

     

    겨우 자율주행 자동차에서 그러한 메시지와 세계관을 도출한다고라고 말한다면, 수레가 거기에 묶인 끈을 세계 안이 아니라 세계 자체로 느낀다는 것, 동시에 고삐를 쥔 사람은 수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수레에 대한 제어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곧 우리가 우리와 연결된 매체 환경을 지각할 수 있기보다 단지 그 안에 전적으로 있다는 것, 수레-끈-수레는 어쩌면 삼위일체라는 것, 그것이 세계라는 것,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자각은, 곧 진리의 깨달음은 이 세계 차원을 벗어나며 그것을 외화하는 외화면적인 어떤 목소리에 있다는 것 모두를 부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올 노 그립》의 귀결점은 선각자의 진리라는 하나의 오래된 서사를 진리를 자처하는 광고문구의 매체적 차이로 복기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적으로 분석해 내며 세계의 내파되지 않음을 형식적인 차원으로나마 내파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철저하게 우리의 무지함을 일러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 새삼스러운 무지를 활성화시키는 차원에서의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곧 깨달음은 전적인 새로움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 그래서 공고한 것의 어떤 전복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주체와 대상으로 이뤄진 세계를 그 사이의 비가시적인 물질로 재서사화하는 특수한 공정이기도 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