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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환 개인전, 《Ua a‘o ‘ia ‘o ia e ia 우아 아오 이아 오 이아 에 이아》: 불탄 것들을 향한 아카이브 충동과 역사적 얼룩들
    REVIEW/Visual arts 2025. 11. 4. 21:54

    김성환(데이비드 마이클 디그레고리오 aka dogr와의 음악 공동작업), 〈머리는 머리의 부분〉, 2021. H.264 QuickTime 2160p on SSD, 16:9,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22분 59초. 작가 제공.

    김성환의 개인전 《Ua a‘o ‘ia ‘o ia e ia 우아 아오 이아 오 이아 에 이아》에서 한국과 하와이를 연결하는 근대의 역사적 시공간에 대한 방대한 인용, 너머를 재기입하기 위한 바깥의 여러 참조 체계를 구성하는 것, 수많은 자료의 병치를 경유하는 느슨한 환유의 기술은 일차(원)적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직접 말한다기보다 무언가가 말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자료로 남는다, 또는 자료는 작품을 초과하는 작품이 된다. 캡션이 붙지 않는 자료들, 또는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 끼워 넣어진 작품 곁의 좌대들은 더욱 복잡하게 전시의 지형도를 그린다. 그 가운데 자료는 작가를 통과한다. 
    따라서 그것은 2차적 표현을 위한 유예되는 질료 같은 것이며,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형식을 이룬다―이는 룸 1에 적용되며, 룸 2에서는 일부, 룸 3에서는 전반적으로 적용된다. 반대로 이는 2차적 표현, 곧 작가의 현재적 상관물에서 파편들로 개입하기 시작한다―룸 2에서는 전반적으로, 룸 3에서 스크리닝을 통해 이러한 파편들이 어느 정도 그러모아 진다. 

    역사의 재기입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병치를 통하며, 그 둘은 각각의 참조 체계로부터 이탈하며 종합된다. 이것들은 무언가를 스캔하거나 다시 찍은 것으로서, 일종의 ‘자료’로서 기입된다. 텍스트는 텍스트 이전에 이미지이며, 이미지는 실재의 자국 같은 것이다. 이러한 기술 형식은 종종 역사를 다루며 그 역사에서 사진의 기술 형식을 고찰하거나 취미나 심리적 이해 등 원-저자성의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그 형식이 무엇보다 사진을 (그 사진이 놓인 자리와 함께) 찍는 것이라면―금혜원 작가의 작업을 떠올려볼 수 있다.―, 김성환의 재기술의, 재접합의 방식에서 그것은 무엇보다 열화된, 흐릿한 자료의 성질로 드러나며, 원래의 사진은 배경으로부터 온전히 추출/분절되며 방대한 자료의 한 부분으로 포함된다. 이 과정에서 사진은 작가가 발화하고자 하는 것과 어떤 간격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그 간격 자체가 발화의 핵심적 구조이다.

    김성환 개인전, 《Ua a‘o ‘ia ‘o ia e ia 우아 아오 이아 오 이아 에 이아》의 설치전경. 사진 제공: 작가, 촬영: 권수인. (이하 상동).

    룸 1에서 그렇게 작가는 존재―김성환, 〈몸 컴플렉스〉(2024. 복합매체, 가변크기.)―의 발화를 부상케 하며 낯선 언어의 가르침을 추출, 재현해 내고자 한다. 작가는 하와이와 연관된 존재들과 얼룩들을 얼기설기 늘어뜨려 의사-박물관을 만드는데, 이는 역사를 정립하는 기술이 아니라 반대로 역사의 무수한 파편들을 그러모아 소각하는, 역사-현재의 구멍들을 찾는 방법이다―하와이를 경유한 조선의 미국 이민자의 존재는 한국과 미국의 역사 모두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이미지와 텍스트 모두는 발화의 의미 이전에 역사의 한 기술로서 공통된 의미를 산출한다.

    결과적으로 다시 찍었다라는 감각과 그것이 최대한 원래의 대상 그대로 복원된다라는 감각은 원래의 대상과 현재의 시차 안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자료를 의미로 전환하는 메시지의 차원 이전에 자료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거리가 관객에게는 성찰의 자리로 전이되는데, 그 자료는 재현되(며 기능을 상실하)는 대신에 원래의 맥락으로부터 ‘탈구’되어 현전하는 과정에서 재(상)연되며 ‘그것으로서’ 기입된다. 그리고 이 맥락은 역사의 한 지표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빼곡한 자료의 제시로 구성되는 전시는 일종의 어렴풋한 시간성을 띤 박물관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그 박물관은 메타 자료들이 주는 거리감으로써 현재 그것과 괴리된 주체의 자리를 형상화한다.

    자료 대부분 텍스트와 이미지를 동시에 이미지화하여 병치하는 이 기입 방식의 고유성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그 둘의 불가분성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인해, 환유적 차원은 ‘다음’으로 유예된다. 곧, 상징 기호로서의 연속체가 아닌, 이미지들의 연속체인 동시에 텍스트들의 연속체로서 전시가 연장된다. 환유로서 알레고리와 유예의 시점은 룸 2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 전면에 보이는 영상 〈무제 1〉(2024, H.284 코덱으로 압축한 QuickTime 동영상(.mov), 컬러, 31분 55초.)과 그것을 제목에서 대리 체현하는 듯한 〈머리는 머리의 부분〉(2021. H.264 QuickTime 2160p on SSD, 16:9,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22분 59초, 데이비드 마이클 디그레고리오 aka dogr와의 음악 공동작업, 작가 제공.)에서 각각 볼 수 있는데, 전자가 머리와 머리의 결합, 하나의 머리와 그의 내밀한 부분이 되는 다른 머리의 떼어낼 수 없는 결합의 표상을 여러 존재의 결합을 통해, 그 옮겨감을 통해 보여준다면, 후자는 영상 뒤에 갑작스레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가 2부의 도래할 시점을 예고한다―이는 또 다른 머리(인물)인 메리 조라는 등장인물이 등장해야 이 작품의 배경이 또 다른 시점(5.18 민주화운동)에 의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을 고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룸 2를 여는 〈무제 1〉은 눈가에 위로 치솟는 선을 그려 넣은 짙은 화장의 존재자들, 하와이의 풍경과 하와이인의 어떤 정체성의 표식을, 타자적 공간과 타자성을 해석하는 대신에 괄호로 묶는 기입의 행위는 불안정하다―또는 정체성은 불안정한 것이며, 덧씌워진 것이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의미한다. 아이폰의 라이브 포토 기능을 사용한 촬영 방식은 시간의 솔기를 담은 사진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것을 세 번 정도씩 반복함으로써 표면은 일렁거리고 변화되는 것 같지만, 다시 되돌아오며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여 그 하나의 단위가 이루는 루프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신체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 탐사로 귀결되는 시점의 제시가 그 대상에 대해 결코 안정적이지 못한 부유하는 것으로 드러남을 의미하고(라이브 포토 자체가 찍는 이의 떨리는 신체의 반영성을 수용하고 그 결과를 재현해 낸다.), 이 시점은 다시 그 인물들에 부유하는 존재의 의미로 덧붙는다. 여기서 루프는 그 타자적 신체의 닫힘을 일부 지연시키며 그 불가해성을 유예하며 촉각적인 시점의 자리로 옮겨 오며 완성한다. 그 과정에는 시간의 추출과 매개 작용이 있고, 실패한 승화가 있고, 탈승화가 아닌 재승화의 절차가 요청된다. 

    〈무제 1〉의 모티브가 되었을 법한 이미지로서 김성환의 〈이상 야릇한 새들의 얼굴〉(2020/2024. 연필, 아크릴 물감, 수성 포스터물감, 유성 포스터물감, 트레이싱 페이퍼, 투명 필름, 고정 테이프, 문서 복원 테이프, 양면테이프, 아세테이트 테이프, 접착제, 84.6×101.2×4cm.)의 경우, 종이 위에 종이가 쌓이고 종이들이 맞물리는 가운데, 네 개의 새-인간 존재 형상―새 가면을 쓴 인간―이 삼각 구도를 이루는데, 이는 어떤 형상들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겹쳐짐, 기워짐, 덧붙음 등의 공작 행위가 흔적을 남김에 따라 그 형상에 대한 감상을, 뚜렷한 형상에 대한 감각을 유예시킨다―그러니까 김성환은 타자의 유동적 정체성과 그것을 읽어내는 주체의 불완전한 감각 사이를 오간다. 이는 읽어내기 힘든 텍스트와도 같고, 결절되지 않는 존재의 신비와 이질성을 만드는 〈무제 1〉의 이해되거나 파악되기의 시간을 지연시키며 형상을 유예하는 동적 방법론 이전에 평면으로 실현한, 시간의 균일하지 않은 차원이 이미지로 연장되는 방법론의 특성을 보여준다. 

    하와이어로 “그는 그에게 배웠다. 배웠다. 그에 의해 가르침을.”을 음차한 전시명에서처럼, 이전의 사람은 후대의 사람에게 내용이 아니라 단지 태도만을 전할 수 있는데, 이는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의 한 판본이라기보다는, 하와이라는 현대의 신화 이전에 신화로서 하와이, 그러니까 하나의 원-형상으로서 역사 안에서 존재와 존재의 순수한 교환 형식으로서 삶이 지속되어 오는 어떤 광경을 그려내지 않는가. 그리고 이는 1970년대 하와이 주권 운동이 지닌 저항의 기치에서 되찾아와야 할 자연과 문화유산의 차원으로 연장된다. 가령 〈작가와의 대화•나 마카오카 아이나〉(2021. 16:9, 컬러, 사운드, 69분 52초. 케카히 와히 제공.)의 ‘눈’을 뜻하는 ‘나 마카’와 ‘땅’을 뜻하는 ‘아이나’가 결합해 ‘땅의 눈’을 뜻하는 하와이어는 조안 랜더와 푸히파우가 만든 독립영화 제작팀으로, “하와이와 그 땅에 얽힌 이야기를 깊이 경청하며 이를 통해 땅을 지키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과 같이.

    룸 3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구체적 시간과 함께 식민지 하와이와 한국의 연결성을 장소의 대상화로부터 추출한다. 이는 광화문이나 그 터를 찍은 사진들의 인용과 같이 이 전시 장소의 주변을 포함하기도 하고, 조선총독부 시절의 역사를 고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불 탄, 사라진 역사의 형상들이라는 메타포를 부각시킨다. 룸 3은 룸 1의 자료를 찍은 자료와 같이 기존의 영상 자료를 그대로 가져오는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은 감상을 위해서라기보다 2008년 남대문 화재의 보도 사진과 불타는 이미지의 계열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다. 

    작가의 역사적 대상이 사라지는 차원에서 역사가 지닌 우연성 그리고 집념과 의지의 창조 행위가 만든 픽션을 겹쳐 놓는 행위는, 역사를 하나의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가운데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역사와의 시차를 무대화한다. 소각됨으로써 비로소 역사가 되는 장면은, 사라진 존재들의 발화에 대한 무의식적 이미지로의 대응이다. 그러니까 역사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들은 특정 역사의 재현물로부터 어긋나는 대신, 곧 이 전시의 역사와는 연관되지 않는 대신, 그 자체로 작가에게는 필요한 것이 된다. 그것은 분명 종결이 아닌 시작이며, 역사의 기원적 장소, 틈, 균열을 향한 충동으로 불타오른다. 그것은 아마도 가르침의 대상이, 목적이 불분명한 어떤 배움의 여정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주체의 형해화된 경계이기도 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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