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재, 《Doppel-Lumpen》: 시선으로부터 은신하기, 그 반대편에서 시선의 주인을 찾기REVIEW/Visual arts 2026. 3. 2. 21:20

이민재, 《Doppel-Lumpen》ⓒ홍철기[사진 제공=작가](이하 상동). 《Doppel-Lumpen》은 작가의 수많은 복제된 형상을 마주하게 하는데, 이는 세 가지 퍼포먼스를 순차적으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전시 내내 지속하는 체계 아래, 그 퍼포먼스 시스템이 작가 단독의 형상을 가시화하기보다는 그것이 끊임없이 지연되고 부인되면서 재가시화되는 국면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곧 작가의 수행은 매체로서 사물-공간의 경유를 통해 그 행위의 명확함 대신에 그 매체에의 작가의 체현됨의 양상으로 구조화되는데, 따라서 작가는 매체를 투영하는 신체, 그것이 연장되는 신체적 부산물로 재결정되어진다.
아마도 가장 명확하게 작가가 드러나는 또는 전시명에서처럼 도플갱어로서 중첩된 존재 양상을 동시적으로 관철하는 유일한 작업은 〈앙스트할레에서의 도플갱어 Doppelgänger in der Angsthalle〉로, 이는 해당 공간 안에서 수행한 것을 촬영한 영상으로 중앙 가상의 경계를 기준으로 반으로 갈린 녹색 벤치 의자에서 평상복과 그것을 벗어젖힌 느슨한 복장의 차이―이는 〈룸펜-연습〉의 대부분의 퍼포먼스가 이뤄지는 비닐 안의 복장과 거기서 나온 이후 옷을 벗어젖히고 난 모습에 대응한다.―로 앉아서 경계면의 서로를 의식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이는 물론 두 번의 촬영을 합성한 것으로, 이런 동시적 존재의,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제어되지 않는 기이한 생명력의 유출로부터 개인의 정체성은 교착되는 양상을 띤다.
그것은 그 자체로 기이함을 주지는 않는데, 실은 그것이 사전에 가상의 벽을 상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의 변화를 사후적으로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관객은 양옆의 문에 달린 거울을 나란히 바라보고 의자에 앉아 서로를 향하게 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지만 그것은 마치 가상의 경계 안으로 소급되어 ‘사라진다.’ 가상의 경계는 그 둘이 어떤 두려움의 상태에 빠지는 걸 방지하는 봉쇄 장치로 기능한다. 그것은 그 반대편의 거울처럼 실재와 환영의 경계를 구성한다.

평상복을 입은 좌측의 작가가 그렇지 않은 우측의 작가를 먼저 응시하고 자신을 발견할 때 그는 고개를 반대로 돌린다. 그 응시로부터 우측의 작가가 좌측을 돌아볼 때 그것은 완전히 발견되지 않는다. 마치 그 바라봄의 후속 반응을 모른 체하듯, 보았지만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전자의 행위는, 본격적으로 후자의 시선에게 모든 걸 양도, 이전하는데, 그 시선은 ‘공교롭게도’ 미묘한 시차로 빗나간다. 부정에서 불가능성으로, 좌에서 우로 시선의 주체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결국 우리는 서로를 보는 시선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두려움’을 유예한다.
이 영상은 이 공간에 대한 재현을 초과하는 암시의 효과를 상정하는데, 이는 공간의 작동에 앞서 놓인 영상에 우리 자신을 대입함으로써 선취된다. 또한 우리는 마치 이 영상을 스크린이 아니라 또 하나의 거울처럼 볼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가 위치한 이곳이 저 스크린상에서 반영돼 보이고, 거기에는 또 다른 ‘진짜의’ 시공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유령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가 된다.
이제 저들이 열었던 문, 그리하여 우리가 마주하는 또 다른 입구, 경계의 창문이 우리 자신의 응시를 되돌려주는 것과 동시에, 미지의 이미지에 대한 파악을 지연시키고 있는 가운데, 서사의 내재적 분기점의 지연됨, 실패는 확장된 외부에의 미스터리가 주는 두려움을 상쇄시킨다. 두려움의 현시에 앞서는 건 그것의 비가시화된 매체적 특징이다.

이는 나의 자화상을 가로막는 좌우로 반전된 (아마로 빨간 루즈로 쓴) 글씨로 나/너/너희/우리가 두려워하냐는 의문문,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너희/너/나 모두 그렇다는 역순의 대답으로 총 여덟 개의 각기 다른 문장이다. 이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에 대한 또 다른 암시적 성취로 본다면, 《Doppel-Lumpen》이 말하는 바는 비교적 명확한 비의의 메시지를 산출하는 듯 보인다.
또한, 이는 공간 자체가 전제하는 효과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Doppel-Lumpen》은 d/p를 공간 안의 공간, 일종의 미로와도 같은 공간으로 재구조화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는 입구를 통과하면 정방형 크기의 이중 유리문으로 된 일종의 작은 로비 공간으로서 그 같은 하나의 공간이 지닌 구조적 양상(을 자기 지시적으로 체현하는 영상)은 또 다른 공간들로 분기되는 지점을 통과하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공간의 안에, 방에 있다는 감각을 준다. 모든 것은 두려움/불안과 안전함의 뒤집힌 기호들의 내통이며 이행이다.

오른쪽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자리한 〈Angst ohne Angst〉는 10대의 프로젝터가 제목의 문구를 하나의 위치를 향해 투사하면서 글자들의 분포는 흐릿하고 불투명하게 확장되는데, 프로젝터의 위치상 시야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 10대의 ‘연합’은 이 중앙 관객의 몸을 투과하는 범위를 상쇄하는 데 충분하다. 그리고 그 일부가 관객의 등에 새겨진다는 걸 그 관객은 알더라도 볼 수는 없다. ‘불안(들)’이 없더라도 ‘불안’(들)은 남는다.
〈룸펜-연습〉은 각종 사물이 편재된 바닥 전체를 거의 덮는 비닐 포장을 파고들어 기어가는 작가의 수행으로 구성되는데, 이때 작가의 숨소리가 스피커로 확장된다. 이 비닐이 거의 공간 전체를 덮는다라는 것, 약간의 여분을 남긴다는 건 관객의 미묘한 개입을 가져오는 부분인데, 일정 부분 관객의 무게중심이 거기에 이전된다는 것이다. 곧 공간을 파고들면서 작가는 진공팩 같은 환경에 휩싸이게 되고, 숨쉬기에 곤란함을 겪게 되고, 이따금 휴대용 산소캔이 쓰이기도 하는데, 이 비닐 위의 하중이 가장 많이 쏠리는 순간, 곧 가에서 출발하는 작가가 비닐막 안에서 특정 관객과 근접해졌을 때 반쯤의 개입을 철회하기 위해 물러서는 그 관객의 적극적 차원의 개입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이 숨이 바깥으로 확장된다는 것, 안의 차원이 바깥으로 스며든다는 것은 그 안으로 말려 들어간다는 것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곧 이 소리의 진원지가 오직 바깥의 스피커―이는 작가의 목 마이크로부터 연결된 소리를 또한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내속적이다.―에만 있지 않으며, 그것은 비닐 막에 달린 피에조 마이크로 인해 작가가 사물과 닿는, 연결되는, 연동되는 지점을 포착하고 증폭해서 그 지점에서 직접 드러내는 소리가 맞물려 있음을 의미한다.

작가의 침투는 그 안(에서)의 가시화를 촉발하고, 작가의 바깥으로의 대표적인 동시에 주도적인 사운드인 숨의 가시화를 통해 마치 모든 건 그 비닐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소리라는 현상으로부터 직접 압출된다는 인상을 준다. 곧 내밀한 숨은 안을 억누르고, 안의 자율적 의지에 대한 외부적 두려움의 대상인 것처럼 외부화되고 전도된다. 스피커 자체의 반응적 제스처와 그로 인한 비닐의 진동, 결과적으로 또 다른 동시적이며 국지적인 피드백과 같은 현상들은 이 환경이 하나의 비닐로 덮인 음향적 생태계임을 동시에 존재로 소급되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창발적 스펙트럼의 생태계를 정교하게 구성한 것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소리는 가깝고도 또 멀며, 멀어지더라도 가깝게 위치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존재와 사물의 혼재, 그리하여 혼동을 가져온다. 이때 피부는 촉각적이고 편재적이며, 청각적이고 다성부적이다. 작가의 형체는 비닐 막이라는 또 다른 신체의 누층으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작가에 대한 압력이 그를 은신하게 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행위는 안전함과 두려움을 맞세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두려움을 상쇄하는 것도 안전함에 은신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에 은신한다, 안전함을 벗겨내면서.
곧 그것은 두려움을 상쇄시켜 안전함을 느끼는,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의 차원이 아니라, 안전함이 이전된 두려움에 가깝게 위치함을 의미한다. 그것이 하나의 맞물린 가치 계열이라는 점에서, 그것의 돌파는 그것을 전적으로 무화하거나 완전히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최대한 가깝게 자리하는 것이다. 작가는 두 가지의 역설적 차원, 곧 일종의 자기방어적 막의 투과하는 성질―그것이 시야를 제공한다.―과 그것이 행하는 거대한 압력―그것이 작가가 외부로부터 강도 높은 내부를 산출하게끔 한다.―을 동시에 체현한다.

그리고 이는 작가에게 닿는 사회적 시선을 내재적인 차원으로 굴절시키며 이전하여 증폭시켜 가시화하는 것으로 연장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숨으로 가시화되는데, 이 숨은 무엇보다 촉각적이다. 곧 얇은 막과 ‘나’의 사이에 작은 틈이 벌어졌다 닫히는 물리적 확장과 되돌아감의 끝없는 변주이다. 이것을 더 명확하게 시각화하는 것이 (이 퍼포먼스를 처음으로 두었을 때) 세 번째 퍼포먼스, 〈두려움 이후는 두려움 이전과 같다〉의 퍼포먼스로, 그는 이번에 비닐 막이 아닌, 투명 유리문 안 공간에 위치하며, 그 유리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Angst”라는 글자의 윤곽이 나타난다. 그것은 두려움일까 불안일까. 전시 내에서 두려움으로도 불안으로도 해석되는 이 단어는 외부적인 대상의 실재 여부에 따라 분기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에 대한 마주침의 ‘가정’에서 연유한다는 점에서, 앞선 영상에서 마치 그것을 보고도 보지 않은 것 같은 태도에 대한 착시를 보여주는 것처럼, 그 존재는 실체적으로 판명된다기보다 여전히 내속하는 자아의 한 영역으로 연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Doppel-Lumpen》은 무엇보다 작가로부터 직접 연장되지만, 이는 작가 자체를 보여주기보다 작가의 은신 공간을 상정하고 그 안에서의 은신이라는 행위 자체를 들여다보게 하는 데 가깝다. 곧 작가는 〈룸펜-연습〉에서 관객의 심부를 관통해 자신의 비좁은 틈새를 자신의 공간으로 연장한다면, 〈두려움 이후는 두려움 이전과 같다〉에서는 관객과 자신 사이의 막에 또 다른 얇고 불투명한 막을 가설하면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방어하고 아니 방어하기 위해 드러내고, 〈가구가 비치되지 않은〉에서는 자신이 은신하는 장소를 이중적이고 복합적으로 개폐한다.
곧 그가 자신의 공간에서 쉴 때 그의 비가시성은 바닥에서 증폭되는 그의 심장 소리는 장소적 지표성으로 체현되지만, 온전히 환원되지 않은 채 바닥을 건너 공간 경계로 나올 때는 그가 카메라에 중계되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직접적으로 매개되는 소리는 그런 점에서 실재적이기보다 환각적인 차원에서 작용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장소적 고착, 곧 관객을 붙잡아두면서 그 소리를 그에게서 떼어내 자신의 장소 특정적 지표로 바꾸는 것에 대한 효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관객은 그것을 더 잘 느끼기 위해 누울 수 있고, 누움으로써 작가의 모습을 체현한다. 소리는 변형되지 않고 단지 옮겨지지만, 그것이 강도를 얻으면서는 장소적 차원에서의 독자적인 질적 변용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스피커라는 장소적 위치는 그것과 분리된, 독립된 장소를 ‘재’획득한다―이는 물론 〈룸펜-연습〉에서 비닐의 떨림이라는 물리적 효과로 전이되는 사운드에 상응한다. 그리고 그 사운드의 근거를 그에게 부여하는 데 관객은 근본적으로 실패한다기보다 오히려 작가로부터 스스로 은신하는 상태로 변용된다.

‘가구가 비치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관객은 일종의 가구로서 누이며 또 스스로를 배치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의 지위를 건네주는 것이면서 작가의 체현되는 바를 자신의 체현됨으로 매개하는 재연결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리된 공간과 분할된 감각을 포합하는 권리를 오직 관객에게 양도하는 기술이다, 이로써 작가의 쉼은 이 이중의 분리가 기인하는 기원적 장소에서의 온전함으로부터 보증되는 셈이다.
《Doppel-Lumpen》은 작가의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의 분화, 그리고 이미지 차원의 사전적 분화를 경유해 각기 다른 자아의 투사로써 변화되며 고정되지 않은 자아의 경로를 구축해 나간다. 그것은 불안정적이기보다 오히려 단단한데, 전시장의 흐름은 일종의 엄격한 스케줄 상의 규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아의 각기 다른 수행성에 따른 분화는 자아의 유동성이라는 진리를 산출해내기 위함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취약함과 연약함에 대한 토대를 구성하는 것에 가깝다. 곧 그는 자아를 직접 표현하기보다 자아의 독립된 공간을 반복해서 재창출하며, 그의 취약함 혹은 연약함을 부정하기보다 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
그러니까 그의 수행성은 미적 토대 안에 자신을 집어넣기에 가까우며, 그의 행위는 그를 그 안에서 확장시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이 그를 ‘재’매개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를 수여하는데, 그것은 필시 기존의 매개된 시선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그를 보는 우리의 불안전함, 비논리성, 비미학적 차원에서 벗어나 자유―미적 토대 안에 기식하는 작가의 모습과 같은―를 확장하는 것이 되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곧 거기서 작가의 위치는 무엇보다 매개적이며―곧 그는 ‘매개하기 위해 은신한다!‘―, 우리는 작가 자신보다는 우리를 보는 시선의 근거를 우리가 보는 시선의 무의식적 성찰을 통해 재설정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크레디트]
기획 | 하상현
사운드 디자인 | 정모건(Marina)
공간 제작 | 황효덕
공간 제작 도움 | 김은정, 나메, 최서우
시공/목공 | 끄고키고
시인/낭독 퍼포먼스 협업 | 김소연, 황인찬
필진 | 이나라, 이민주, 임근준그래픽 디자인 | 동동
사진 촬영 | 홍철기
영상 촬영 | 정순영주최 | d/p, 이민재
주관 | 새서울기획, 소환사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낙원상가, 한국메세나협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d/p 기획 지원 19
2025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 선정 프로젝트'REVIEW > Visual ar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방주, 《그냥 생긴 기억》: 사물을 놓아두는 법―충동을 경유해 (1) 2026.03.02 반재하, 최가영, 《방금 전의 소문과 오래된 증거로부터》: 이미지의 서사를 수행하고 체현하는 방식들 (0) 2026.02.25 용해숙 개인전, 《파랑의 여항》: 자본주의 이후의 고고학, 그리고 (비)주체적 투사 (1) 2026.02.24 임민욱, 《하이퍼 옐로우》: 관점으로서 역사 혹은 관점을 향한 역사의 간격들 (1) 2026.02.24 차재민, 《폭포와 희열》: 일상의 기호학적 검출로서 사유 혹은 리서치 (1) 2026.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