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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광주비엔날레: 소리라는 형식
    REVIEW/Visual arts 2026. 3. 7. 14:05

    2024 광주비엔날레는 집요하게 소리를 측정, 전시한다. 매체의 확장성과 다양성 혹은 풍부함의 차원에서, 그리고 비가시화된 것에 소리가 자리함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뜬금없지만 여기에 주제에서의 ‘판소리’는 전시와 (어떻게) 연결되(야 하)는가. 그것은 윤리적 차원에서 진작될 수 있는 부분이며, 어떠한 형식적 차원의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미학적 차원과 윤리적 심급의 관계성을 상정하며, 그것을 다루는 주체의 ‘자격’을 전제한다.

     

    가령, 판소리라는 문화적 원형을 고스란히 투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오리엔탈리즘 혹은 서구 중심적인 전유의 그릇된 태도로 치환할 수 있을까. 판소리를 우리가 용인할 수 있는 원형으로서 제시해야 한다는 건 판소리라는 대상을 기존의 재현 형식 안에 가두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수용한다. 그것은 빗나간 문화상대주의의 예시를 넘어,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주체의 자리를 결정하고 그 바깥의 것을 밀어내는 방식을 투명하게 은폐한다.

     

    그럼에도 전시에서, 판소리는 그 주제에 대한 충실한 대입의 정신에 따라 소명되는데, 대표적으로 미라 만(Mira Mann)의 〈엄마의 기억은 다를 수도〉(2022)는 판소리의 심청전을 영상의 중심에 둔다. 그것은 신체가 간곡하고도 집요하게 새겨지는 장소로서의 목소리이자 문화적 원형으로서의 재료로서 단순히 들려지기보다 인용되고 보여진다―실제 창자의 신체를 대리하는 건 소리와 자막이다.

     

    양림동의 한 폐가에서 상영된 이 영상 작업은 심청전이라는 텍스트를 인의 미시사와 교차시킨다. 작가의 잠재된 기억을 찾는 여정에는 심청전을 재현하려는 시도의 부분들이 기록 필름의 차원에서 제시된다. 한편으로, 어렸을 때 집을 찾고, 다니던 학교―목포여자고등학교―를 찾아 졸업 앨범을 뒤지고, 친척을 통해 과거의 증언을 확보함이 기록의 전사를 수집하는 행위라면, 다른 한편으로 심청전을 K-컬처의 일환으로 수행하는데, 이때 서사의 재현은 문화적 차이 아래 기괴한 것으로 변용된다. 검은 옷 코스프레를 한 두 모델이 높은 곳에 올라가 물속에 뛰어듦을 행사하는 등 과장된 제식을 시행하고, 실제 판소리 심청전을 부르기도 한다.

     

    영상은 타자가 점유하는 정체성의 재현을 통해, 이동과 분열의 정서적 코드를 띤다. 타자성은 스스로에게 내속적이고도 외현적이다. 곧 ‘나’는 타자로부터의 분열이자 타자로서의 분열이다. 나는 나로부터 분열되며 외부로부터 역시 분열된다. 나는 온전히 그 두 세계 모두를 통과하지 못한다. 그것은 혼란을 안긴다. 곧 세 개의 스크린-노래방 장면에서 요동하는 다른 두 개의 이미지가 소리로써 ‘잠재워지는데’, 소리/음악은 그 노래와 접지된 감각을 준다.

     

    하지만 이 역시 임시적이다. 이는 심청전―심청전은 들려지기보다 인용되고 제시된다.―이 한 축에서 다른 축으로 이행되며 단속적으로 자리하는 가운데 다른 소리는 감축되는 형식과도 유사성을 띤다. 이동하는 몸, 그것이 반영하는 카메라는 필시 불안정하다. 이 뒤섞음/혼재됨―전통의 현시와 동시대 대중문화의 재현―은, 그리고 불안정함―카메라의 시점―은 무엇인가. 이주하는 자, 입양된 이의 정체성, 자신의 뿌리라는 것의 불가해함과 강박, 의존적 성향의 반대급부 등을 증언하는 것 아니겠는가.

     

    본 전시장은 다양한 소리들이 뒤섞인다. 입구에서 처음 통과 의례로서 들리는 에메카 오그보(Emeka Ogboh)의 사운드 작업, 〈Oju 2.0〉(2022)은 나이지리아의 도시 라고스(Lagos)의 오주엘레그바 지역에서 현장 녹음하여 작업한 것이다. 현대 도시의 소음들은 이펙트 효과로 그것은 웅웅거리면서 명확하게 환청처럼 들리는데, 목소리의 주조음과 경적을 비롯한 노이즈의 배경음이 비교적 분리돼서 각자 스스로의 복권을 주장하며 그 둘이 혼합된 양상이라는 점에서, 어떤 것도 상대를 억압하지 않는 차원에서 나열되며 (두) 소리가 흘러나간다.

     

    이는 관람객을 혼란과 어지러움의 사태에 처하게 한다,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써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여지와 그럼에도 달라붙는 잔여적 소리로부터. 어둠 속 소리는 화자의 신체를 정위하지 않으면서 지시한다. 청자는 그 경로를 통과해야 하지만, 들림의 대상이 속한 위치를 명시하기 어려우며, 동시에 자신의 그 들림의 위치를 온전하게 보존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들려오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통과되어야 하는 과정이고, 그 소리와 공간의 틈에 욱여넣는 신체를 비가시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제로의 공간, 본 전시를 들어가며 나오는 첫 번째 소리가 배어든다면, 1전시장을 통과해 나오는 경계와 2전시장까지의 동선에서 소리는 전시장 바깥의 통로 공간을 지배하며, 관람객의 뒷전으로 다가온다. 이는 “모든 것이 서로 인접한, 모든 것이 전염되는, 그리고 즉각적인 반향실(echo chamber)이 되어버린 행성”에서의 “피드백 효과”를 구현한, ‘부딪침 소리’(feedback effect)(전시실 1, 2) 섹션의 일환이다. 노엘 V. 앤더슨(Noel W. Anderson)의 〈보안 오리엔테이션 Security Orientation〉(2023)에서 폐쇄 공간 아래 춤추는 이의 이미지를 위아래를 쓸어내리는 영상 자체적인 움직임에 따른 왜곡과 함께 반복되는 음악의 목소리는 그때마다 팝의 전형성을 분출한다.

     

    그 속의 인물은 영상의 이미지적 변용과 소리의 공간적 확산 속에 정체성을 잃어버리는데, 이는 오그보의 작업을 건너오며 그것이 (잘못) 시각화되는 신시아 마르셀의 두 점의 사진 작업 〈요소들의 결합-모으는 사람〉(2019~2024)에서 머리가 잘린 행위자는 있고 없음으로 사무 환경을 차이로써 분배하는데, 숨은그림찾기 같은 사진들이 자리한 공간을 지나 관람객을 맞는 융단과 천장의 뒤틀림을 보여주는 설치 작업 〈여기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어요〉(2010~2024)는 이 사진을 촉각적이고도 확장된 세계로 연결한다. 그리고 이는 비로소 앤더슨의 영상 작업의 인물로서 관람객을 사후 체현한다. 곧 본 전시장의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은 그 소리의 지배적 위상과 함께 유기적인 작업들의 연결과 매끄러운 흐름 자체가 ‘공간’의 개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2전시실에서 들어서 앞선 잔향이 지어진 후, 안드리우스 아루티우니안의 역청 구조물 〈아래〉(2024)과 성 티우의 〈시스템의 공허〉(2024)가 서로를 마주하며 교차하며 교환됨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 소리는 공간 전체를 주요하게 지배한다. 전자의 역청 구조물에서 나오는 불길한 전자음 반향과 후자의 영화적 사운드―목소리와 방송의 재현과 배경음―이다.

     

    전자의 주조음이 “역청이 지표면으로 올라올 때 나는” 소리이며, 후자의 배경음은 에너지 인프라 건설에서 쓰이는 수압파쇄법은 “모래에 파묻힌 대형 금속 파이프를 재현한 설치 작품에 실제 화학 물질”을 유정에 주입하는 소리로, 전자가 구조물 아래의 연결부의 전선이 역청의 표층이 덧씌워진 일종의 오디오 인터페이스 설치 작품임을 노출한다면, 산업 현장이라는 공통의 배경은 기후 위기로 연장된 미래 시제를 그린다.

     

    전시장 3에서는 유얀 왕의 작업 〈초록색 회색 검은색 갈색〉이 해당한다. 불필요할 만치 크게 나오는 소리는 영상보다는 영상을 넘어 전시장을 지배한다. 구음의 웅웅거리는 기계음으로의 변주는 환경을 초과하는 산업의 자취가 주는 기괴함을 불완전한 숭고로서 수용한다. 전시장4에서는 오스왈도 마시아(Oswaldo Maciá)의 〈바람과 먼지와 숨결을 위한 후각적 음향 구성〉이 주조음을 이룬다. 16채널로 녹음된 합창단의 노래와 바람 소리의 혼합은 청각적이기보다 다분히 촉각적인데 그것이 가까이 가서 앉았을 때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람 소리는 진동으로 체감된다.

     

    2024 광주비엔날레가 주제를 회집하는 본 전시장을 통해 진정으로 보여주는 건 이 소리라는 매체가 가시화되며 전시의 또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인 것 같다. 그러니까 니콜라 부리요의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오해의 층위가 개별 전시 작업의 층위로서보다는 제목의 층위에서 일단락될 때 그리고 그것이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소리라는 것으로 비약될 때 마찬가지로 그 반대의 지점에서 고유한 문화에 대한 서구 중심주의의 오해와 오만함으로 증폭될 때, 실은 비엔날레가 동시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매체적으로는 시각예술에서 소리가 자리하는 일천한, 예외적-숭고적 지위이며, 주제적으로는 이 타 문화에 대한 접근에 있어 가져야 할 태도와 전이, 차이의 생산 지점일 것이다.

     

    비엔날레라는 형식은 예상 외로 문화 교류적 차원을 진작하지 않는데, 그것은 타 문화들의 진열장일 뿐, 의외로 그 문화들이 어떻게 접합되고 이해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추구하거나 하지는 않는데―결국 그 지점에서 관객의 시각이 시작되며 완성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 지점에서 같은 연도에 있었던 부산비엔날레가 고무적인 차원을 보여준다―서툴거나 임시적인 형식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로운 만남의 장, 타자의 수용적 틈과 담론의 여지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판소리라는 불가능한 대상을 붙들려는 니콜라 부리요의 자칫하면 오리엔탈리즘에 기울 수 있는 시도는, 무모한 것이라기보다 무책임한 것으로 판명 나며, 불가능성이라는 예술의 이념을 봉쇄한다.

     

    피국의 상상력에 가닿는 매체로서 소리가 우리를 감싸고 뒤쫓아 오며, 항거 불가능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생태와 인류의 위기 전반을 환기시키는 의제 중심의 작업들에 그것이 적합한 것으로 판명 난다면, 실은 이 ‘다른’ 기원의 소리 자체가 지닌 무의식적 코드 그 자체의 ’완전한’ 해명이 아니라, 그 다름을 간직한 이의 정체성으로 소급될 수는 없었을까. 바로 거기에서 출발할 수는 없었을까.

     

    미래의 ‘흔한’ 의제가 아니라 이미 매우 흔한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나 이주민의 실상 같은 과거로 향하는 의제로부터 말이다, 가령 문화상대주의의 어떤 역치를 그것들이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곧 니콜라 부리요는 잘못 판단했다기보다 (오히려 적확하게 잘못 판단했으며) 그 잘못된 판단을 미처 온전히 시작하(여 완성하여 결정적인 것으로 바꾸)지 못한 셈이다.

     

    p.s. 지난 광주비엔날레부터 새롭게 도입된, 다양한 국제관들로 구성된 파빌리온 전시의 경우, 9개국에서 30개국으로 외연이 확장됐다. 비엔날레의 본 전시에 들러붙으면서 그 바깥의 범주로 구분되는 이 같은 파빌리온의 지위는 본전시에 있어 부차적이거나 열외적인 것이다. 이는 본 전시의 주제적 맥락을 벗어나거나 상충될 수도 있으며, 거꾸로 그 바깥에서 응전하고 본 전시를 파훼하며 새로운 의미 지형을 획득할 수도 있다. 파빌리온은 비엔날레에 걸쳐져 있다.

     

    국제관이 선택한 장소로, 국가에 대한 표현으로, 국가와 비엔날레의 주제를 벗어나는 독립적인/예외적인 전시로 각각은 파빌리온의 이름으로 산포되고 흩어지며 정위된다. 일종의 (부차적인 순서에 따른) 도장 깨기로써 그것은 접근되며, 지역 곳곳의 문화 향유를 위한 새로운 콘텐츠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흩어짐은 다양성과 고유성을 상정하지만, 불편함과 지리적 낯섦과 이동의 물리적 시간을 부가시킨다. 어차피 비엔날레라는 이름 아래 그것은 일시적으로 존속되며 연합을 통해서만 개체성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별 전시가 되지 못하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지만 하나의 상에 대한 플러스, 마이너스의 편차로 기록될 뿐이다.

     

    따라서 파빌리온의 개별적 특성이 각자의 위상을 추구함에도, 독립적인 전시의 위상이나 전체 비엔날레의 일정한 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캡션이 없거나 핸드아웃이 없거나 설명도 없다는 것, 파빌리온 브로슈어의 지도가 장소들을 분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혼란만 준다거나 또한 참여 작가의 정보가 전혀 없거나 나아가 사후적으로 핸드아웃까지 통합적으로 구현하지 못함이 상기된다거나 하는 것, 열외적인 그것의 지위, 동시에 독립적인 그것의 지위는 이런 정돈된 전시 형식의 틀과 자족적인 전시 완성도의 미비를 경유하며 각각 부족하고도 고립된 특질을 보여주는 차원으로 정립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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