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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근영, 《활활》에 대한 주석: 하나의 수많은 얼굴들
    REVIEW/Visual arts 2026. 3. 3. 20:26

    홍근영, 《활활》ⓒ이지숙[사진 제공=소현문](이하 상동).

    홍근영 작가의 《활활》은 얼굴을 전면화하는 일련의 도자 군집을 구성한다. 이 군집이 전시의 유일한 전략이며, 이는 전체적인 공간에의 산포와 그룹화의 경계 지대로의 구분으로 나뉜다. 이를 통해 군집은 복잡계의 기호학적 생태라는 의미를 구성하는 한편, 수많은 작업의 양산이라는 작업자의 정체성을 노정한다. 이로써 《활활》은 작가의 가상적 세계의 의식과 작가로서의 의식을 따로 또 같이 엿볼 수 있게 하며, 그 대신 전시의 큐레이팅의 변별적 의식을 유예한다. 작품들은 그 양적 측면에서나 공간의 점유 정도에서나 그리고 그 얼굴이라는 것에 대한 주목을 통해서나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이는 작품을 작가로 소급하는, 작가를 작품으로 환원하는 그런 전시라 할 수 있겠다, 곧 과잉의 물질적 토대가 그 자체의 미학을 결정하는 전시.

     

    전시장에 놓인 첫 번째 작품은 첫 번째 〈활활〉이다. 이는 민머리 두상으로, 얼굴 가의 면적이 꽤 넓게 퍼져 있으며, 그러한 면적은 신체 전반의 형상화를 꾀한다. 얼굴은 초점화되는 대신 확장되며 신체를 대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양측 중앙부에 자리한 두 쌍의 귀는 일종의 구형 구조물의 손잡이 같은 기능성의 장식 같기도 한데, 좌대를 대신하는 쇠로 된 길쭉한 받침대는 그 불안전한, 불균질한 목부위의 거친 마감을 정위시키는 견고한 지지체가 된다. ‘활활’은 막 구워 나온 듯한,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는 작업 과정의 순간을 동결하며 묘사하는 단어로 작품에 부착된다.

     

    〈활활〉은 전시에서 예외적으로 불확실하고 무규정적인 작업의 과정(시간)으로, 그 스스로의 일단(파편)으로 존재하며, 전시의 표지로서 자리한다. 이후 작업들은 모두 완결성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활활〉이 가진 투박한 이목구비가 만드는 얼굴의 생김새는 얼굴과 구분된 신체까지의 나타남을 통해 연장되고 있다―거꾸로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작품들은 제목/이름에 따라 분류되고 묶인다. 그 동일한 이름으로 여러 형식이 소급된다. 그리고 그 형식은 유사한 양태에 달려 있음이 드러난다.

     

    두 번째 〈활활〉에서 모자이거나 뇌의 외삽이거나 한 머리 부분의 파란색 피/액체의 형상이 ‘활활’에 부합한다면, 세 번째 〈활활〉은 형체를 지정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얼굴성을 지닌, 그럼에도 안정적인 덩어리로 그룹의 중앙을 차지한다. 붉은색 계열의 형체는 유동하고 불안정화한 ‘활활’의 실체를 가시화한다. 이는 그것을 ‘비스듬히’ 마주하는 적갈색 온전한 신체상, 네 번째 〈활활〉으로 구출되거나 변용되거나 완성된다.

     

    두 개의 머리가 결합되며 마주하는 첫 번째 〈동반자〉는 하나의 신체 안의 거주로서 두 개의 얼굴을 판형으로 처리하여 그 동등함의 연결을 드러낸다. 두 번째 〈동반자〉와 세 번째 〈동반자〉는 각각 양 어깻죽지 위에, 머리 위에 차곡차곡 자신의 ‘동반자’를 쌓아 올린다. 평면에 가까운 입체와 온전한 입체의 차이는 각각 동등한 분배―순전한 얼굴의 결합―와 신체의 다른 부위로의 연장/보충의 차이로 나타나는데, 곧 조합은 분할이거나 확장의 차이를 낳고, 이는 신화적인 서사라는 심층과 신화적인 장식으로의 표층으로 분기되는 결과를 낳는다. 곧 전자에서 이야기의 내용이 보존된다면, 후자에서는 이야기의 형식이 남는다.

     

    무엇보다 《활활》은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들은 묘하게 닮아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쉬이 길을 잃을 것이다. 혼란과 혼동 속에서 그것들을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조각들은 무엇보다 선한, 맹한, 우둔한 눈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깥의 응시에 무심하다는 인상을 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그럼으로써 현재를 비켜나고 자신만의 시간에 고이고 그것을 증명하는데, 각자의 시간으로 수렴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과 회집될 수 있다. 어떤 논의와 대화도 거치지 않고 말이다.

     

    탈락된 응시의 차원에서, 그리고 응시에서 떨어져 나간 대상으로서 얼굴들은 기꺼이 조각이 되고자 한다. 그것이 원하는 건 조각들의 무덤에, 또는 사회에 자신을 놓아두기인 것 같다. 그것이 위화감 없이, 구분된 대상의 종적 특징으로서 승화되는 길이다. 회집돼서도 벽에 부착돼서도 철대에 꽂혀서도 지하에 박혀서도 그것들은 존재하며, 때로 우발적인 존재감으로 의외의 즐거움과 놀라움을 주는 가운데 이 얼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자족하며 삶을 영위한다, 다양성의 지표로서 말이다. 그리하여 단 하나의 발화가 생겨나는 듯 보인다, 우리에게 두려움도 갈망도 분노도 체념도 필요 없다는 것. 그것들은 넌지시 입을 다물고 눈으로 모든 걸 감내하고 있다.

     

    김민관 편집장

     

    참조: https://sites.google.com/view/sohyunmun/program/BUrrr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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