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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방주, 《그냥 생긴 기억》: 사물을 놓아두는 법―충동을 경유해
    REVIEW/Visual arts 2026. 3. 2. 21:15

    김방주 작가, 《그냥 생긴 기억》(기획: 곽노원)ⓒCJY ART STUDIO(조준용)[사진 제공=작가](이하 상동).

    김방주 작가의 개인전 《그냥 생긴 기억》은 어느 날 자신에게 ‘떠맡겨진’ 아버지의 집과 사물들을 “‘되돌려’” 놓는 방식을 취한다. 작가를 초과하는 물건‘들’, 또는 그것으로서 집은 아마도예술공간이라는 전시장을 상회하는 차원으로, 초과된 시공간의 차원으로 다시 열리는데, 아마도 이는 작가의 현상학적 체험에서의 난감함, 곤궁, 비릿한 숭고, 알 수 없는 심연 등의 여러 추정되는, 해소되지 않는 복합적 정서와 심리, 미학적-윤리적 기전을 재현이 아니라 전치를 통해 관객에게 수여한다고 보인다, 그가 “갑자기” 그것을 떠맡게 된 것과 같이.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어떤 자리를 주는 것에 가까운데, 곧 그것을 주는 건 작가를 초과하는 그 무언가를 셈할 수 없는 상태로, 셈하지 않고서 그냥 놓아둔다는 대응으로 이전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타자가 아버지의 일종의 환유로서 실재적 사물들의 한 축으로 나타날 때, 또는 연합될 때 이러한 사실을 떠안는 전시는, 작가를 초과한 무엇으로서 작가를 건너, 작가에게처럼 온다. 그러니까 전치는 작가에게 놓인 실재를 옮긴다는 것이라기보다 또는 옮길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이 그렇게 놓여 있음 자체를 확인하게 만드는 것을 실행하는 것에 가까운데, 전시는 여전히 그것의 향유 불가능한 상태, 그리고 전달받을/전달할 수 없는 상태 자체를 드러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곧 처치 곤란함의 사물들은 또는 쓸모를 다할 수 없는 사물들은 그것의 기능적 차원이나 유용함의 차원에서 전용될 수 있기보다는 무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원활히 기능하지 않는 아버지의 신체, 윤정욱 배우와의 인터뷰 영상을 찍은 비디오에서 추정되는 그 같은 상태 자체로서 단지 하나의 차원으로 의미화될 수 있을 뿐인데, 공간 지하에 거의 ‘운송’되어 놓인 일종의 짐짝으로서 사물들, 또한 방치되어 있음 그 자체를 드러내는 사물들과 일층의 기능별로 또는 형태적 감각으로 정렬되고 배치된 사물들은 근본적으로는 그 둘에 대한 다른 정의로 분기되지 않는 듯 보인다.

     

    캡션도 도면도 없는 이 전시의 특질은 그 안을 이루는 사물들이, 아니 전시를 초과하는 어떤 사물들이 전시로서 봉합된 이 사물들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들, 아니 이름 붙이는 것이 무용한,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일 층의 사물들에서 각자가 필요한 것을 가져가도 된다는 매뉴얼은 가시화되어 있지 않고, 일층 좁은 거실이랄까에 놓인 화목난로와 그 바닥에 놓인 마루를 땔감으로 전용하는 이 소멸을 위한 작가의 제스처는, 모두 이 안을 조금씩 없애는 방안의 차원에서 연합되는데, 이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태도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이것들은 특정한 범주로서 수렴할 수 있는 아카이브가 결코 아닌데, 1층의 임시적인 분류 역시 엄밀히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어떤 알 수 없는 수집의 산물이지만 그 소장자의 의도로써 다시 정리되는 것은 불가능한 지점에서 작가에게 전달된 것이다. 작가는 그것의 무용함을 알면서 이것을 누군가가 수집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차원으로 되돌리고자 하는데, 분류는 그것에 미학적 프레임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쓸모 있음, 가치 있음의 근거를 아버지의 시점에서 소급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과거를 복원하기보다 매개하는 측면에서 작가는 그 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작가는 책임지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수용함으로써. 그것은 진정한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를 무력하게 하는 지점에서 또한 작가의 의도가 관철되며 사라지는 지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작가가 집의 일부를 불태우는 건 그것이 무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을 사용 가능한 것으로 전용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그것이 아버지의 삶-죽음의 경계에 대한 묘연함, 뒤섞임, 교차됨에 대한 응당한 처우를 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아버지라면’ 그것은 아버지 이후에는 영원한 무한함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작별하면서 죽은 채로 처치 곤란한 숭고한 무엇, 실재적 잔여가 될 것이다. 반면 일정 부분을 소각함은 부분적인 애도로서 삶과 죽음의 연속선상을 잇는 행위가 된다. 작가의 화선지에 그렸던 그림들이 물건을 싸는 용도로 전용되는 것과 같이, 거기에는 작가 역시 투여된다.

     

    모든 사라질 것들을 삶(에)의 차원으로 뒤바꾸는 행위로서 공여와 소각은, 사라질 것들을 기념하는 행위 또는 이미 사라졌음을 기억하는 행위일 수 있다. 곧 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신체에 묻어있는 기억들”로 우발적이고 자의적으로 작가 자신에게 도달할 수도 있다. 사물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 된다, 그것을 주거나 태움으로써.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신체와 쓰임의 주인이 부재한 물건이 환유로서 연접한다면, 후자에서 쓰임을 발견하지 않는 것으로써 아버지의 증여를 애도의 윤리로 바꿀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서는 그것을 타자에게 개방하는 것이 된다. 그가 전적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 스스로에게는 어떤 차원에서의 가치 평가도 적용하지 않는 것이 된다.

     

    곧 가치는 관객이 정할 뿐이다. 또는 관객에게 소구되는 가치를 기능적 차원으로 매개할 뿐이다. 그것이 모종의 분류이다. 타자에게 드러내는 바는 자신을 초과하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이는 관객을 빙자한 작가 자신에게 비치는 전시일까. 작가는 타자를 셈하지 않는다. 셈할 수 없는 타자들에게 자신의 궁핍, 갈등, 고민을 드러낸다. 그것이 전달될 수 있음을 고려하거나 예측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불가능한 차원으로 누락되고 시차와 오역이 발생함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차원에서 그러하다. 전시는 작가의 사적 기억이라는 블랙박스로 소급된다. 아버지라는 사물이 아버지로서 사물들로 옮겨지는 전시의 열쇠는 작가 스스로가 모호한 만큼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모호하다. 과거는 미래의 차원으로 유예된다.

     


    ‘그냥 생김’은, 필연적인 이유를 띠지 않고 주어짐은 일종의 사건이다. 작가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어느 날 떠맡겨진 이 사물들을 규정하지 않고 나눔의 가능성 안에 둔다. 시간은, 사물은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간다. 누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도 규정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도 되물어지지 않는다. 이 여정 자체는 긍정도 부정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임시적인 자리로서 주어진 사물들이 그 기원으로 소급되지 않으면서 각자의 기원에서 단지 사건으로만 주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물들은 아카이브를 철회하며, 우연한 만남을, 사건을 기다린다.

     

    그러한 경로를 설정하는 것이 순차적이지 않은, 비정시적으로 재현되(지 않)는 기억의 은유를 구성하는 것임은, 동시에 파편적이고 비선형적인 아버지-기억이라는 실재를 수행하는 것임은 명확하다. 잔여로서 아버지를 재처리하며 도달 불가능한 아버지의 종합에서 미끄러지는 행위로서 말이다. 그것은 감산의 가산적 행위인데, 어떤 것도 손에 움켜쥐지 않음으로써 그의 무기력함만을 쥐며, 그 상대항으로서 아버지의 무기력함과 절대적인 부재의 차원 모두를 가로질러 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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