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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재하, 최가영, 《방금 전의 소문과 오래된 증거로부터》: 이미지의 서사를 수행하고 체현하는 방식들REVIEW/Visual arts 2026. 2. 25. 13:46

반재하, 최가영, 《방금 전의 소문과 오래된 증거로부터》 포스터 이미지. 반재하와 최가영 작가의 2인전 《방금 전의 소문과 오래된 증거로부터》는 작가가 참여, 개입하는 각각의 영상 작업, 〈허풍선이, 촌뜨기, 익살꾼〉과 〈103년 전의 가이드북과 털이 자라나는 게〉을 기준으로, 그것과 관계된, 그 부산물로서 재료들을 다소 산만하게 병치하는 방식으로 전시된다. 반재하의 작업이 2018년의 것이지만, 여전히 작업 안팎의 사회와 시대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유효하다면, 최가영의 작업은 모두 올해 제작된 것으로 과거의 흔적들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유효할 것이었다. 곧 즉물적으로 제목에 대입해 보자면, 반재하의 작업은 조금 전의 소문이라면, 최가영의 작업은 오래된 증거일 것이다. 이 둘은 이미지의 경계, 경계를 넘는 이미지의 차원을 탐구하는 데 있어 모두 북한이라는 이미지를 경유하게 되는데, 이는 경계를 벗어난다는 공통 감각을 선사한다.
우선, 〈허풍선이, 촌뜨기, 익살꾼〉은 금기시된 이미지의 유통 과정의 경험을 통해 이미지의 심급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국 주문 제작 쇼핑몰에서 북한 관련 이미지를 프린트한 각종 굿즈들을 주문한 이후, 화자―작가―는 관세사무소 직원, 국가정보원, 세관으로부터 차례로 연락을 받는다. 이 셋을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1912~1991)의 저서 『비평의 해부』에서 분석한 희극의 세 캐릭터인, 허풍선이, 촌뜨기, 익살꾼에 각각 대응시킨 것이 제목인 셈인데, 곧 작품은 자신이 희극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 문학적 우의로서 희극성은 그들이 우려하고 제어하려 하는 것이 북한과의 지정학적 관계의 민감함이나 국가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불러올 수 있는 차원과 결부되는 것임을 화자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새삼스럽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곧 그들 스스로가 그 이데올로기(의 작동 기제)를 가시화시키며 그 작동 안에 스스로 얽혀들어 가고 있음을, 어떤 곤궁 안에 있음을 관찰하는 입장에서 그들의 캐릭터성이 체현된다.
끊임없이 스크롤되고 선택되며 북한의 이미지들이 입혀지는 상품들의 목록이 쌓여 나가는 영상과 우려와 제지, 설득과 요구 등의 수사의 사운드는 대체로 절합되어 있으며―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처음 요구받은 바대로 구입 목록을 서류화하여 공유한 이후, 그것을 하나씩 보면서 재점검하는 과정을 제외하면―, 이 효과는 그가 그 말들에 개의치 않고 쇼핑을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곧 그 말들은 상품으로 기입되는 북한의 이미지들이 갖는 강렬한 색과 대비, 유통되지 않는 이미지가 주는 매혹과 쇼핑에 몰입된 멍멍한 상태의 지배 아래, 효력을 갖지 못하고 그 표면에서 쓸려 내려가는 갖은 수다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북한의 선전에 대응하고 방어하는 국가의 또 다른 선전이 유효하지 않은 자본주의에 잠식된 오타쿠와도 같은 파편적인 개체의 사상과의 그 낙차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법적인 강제력을 갖고 발현되고 있다는 것의 놀라움 대신에, 그것이 낡은 것임을 넘어 어떤 중요성으로 인지되지 않는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시대의 양상을 무감각함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화자는 그것에 개입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워지듯 작고, 여전히 그들만의 무대를 관찰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해는, 그리고 그들의 그들 자신의 타협점은, 봉합의 토대는 그가 불순한 선전 목적과는 다른, 그것과는 범주가 다른, 순수한 작가이며 예술을 만들고 전시하는 목적을 위해 이것들을 구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심급은 예술이 국가 단위의 차원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정의될 수 있는지를 무엇보다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이는 특정한 장르로서 미술을 가리킨다.―의 심급으로 나아가는데, 곧 닫힌 개인의 네트워크, 폐쇄적인 소수의 사회, 예술의 언어 안에서 특정하게 소구되며 갈음되는 닫힌 사회로서 이념의 차원을 가시화함으로써 그러하다.
그러니까 그 옆에 놓인 주문된 상품들은 레디메이드 예술 작품, 전시 설치로 전유되지만, 그것들이 단지 이 비디오 작업의 수행사로서 성격을 증명하는 부산물일 뿐, 그것이 영상에서처럼 욕망되는 기호의 차원, 검열과 금기의 이미지에 근접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는 단지 여느 상품과도 같은 상품일 뿐이다. 이는 머그컵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포장 상태로 쌓여 있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성의 없음을 가장한다. 그것은 상품으로서 욕망의 일상화된 기호를 재현한다.
그것은 예술을 가장하는 상품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며, 상품을 가장하는 그 예술과 상품의 최소 시차 안에서 예술이다. 그 효과를 가져오는 건 물론 비디오다. 그리고 이 상품을 가장한 예술의 속임수는 영상 속에서 ‘출현’한 그들 스스로가 하나의 공연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 속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적용되었었다. 따라서 이 상품-예술들은 실제 그들이 끝까지 속을 수 있는 작가의 약속에 대한 실천의 증거로서(만) 놓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공허한 실천이며, 텅 빈 기호이며, 일종의 기믹이나 다름없다.
곧 그것들은 ‘형식으로서 전시’‘를 완성하는 한편, 화면 안의 이미지에 대한 소구이자 증빙으로 자리한다. 그것들은 전시로서 병리적 실천의 사물들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은 단지 사회 바깥에 있는, 무(기)력한 개인적 유희이며, 닫힌 원환의 피드백임을 의미한 것일까. 속임의 대상이 갖는 진정성을 반대로 조소할 수 있는 주체의 심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재하의 전시의 결정적 작업, 〈허풍선이, 촌뜨기, 익살꾼〉이 제도 비평적 작업이 불러온 과잉성과 그에 대한 가벼운 응전의 성격이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심급을 가늠하는 절차에서 예술(계) 자체의 자기 지시적 성격으로 변모해 가는, 이미지로서 서사를 구현하는 작업이었다면, 이에 상응하는 중요도의 최가영의 작업은 〈103년 전의 가이드북과 털이 자라나는 게〉는 실제 여행을 통해 이미지의 모험을 구성하며, 이미지와 결부되는 장소에 대한 상상력과 그 신체의 개입됨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곧 후자에는 이미지에 대한 작중 화자의 하나의 태도가 돋보이며, 하나의 생명력으로 드러난다. 이 두 작업 모두 이미지를 좇으며 이미지에 대한 순수한 열망, 애착을 가정한다.
작가가 좇는 털게 통조림의 이미지는 북한의 털게가 중국의 통조림으로 구성되어 남한으로 건너오는 실제적 절차의 완수를 목적하는 가운데 성립한다. 통조림은 그것의 포장 이미지이자 실재의 장소와 존재가 개입된 역사적 시공간의 특정 좌표를 밀봉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북한이라는 실물, 환유물이다. 이는 러시아거리에서 구매한 다롄산 게내장젓갈 통조림으로 갈음되는데, 그것이 북한 사람이 만든 것인지의 의문을 간직한 채 그러하다.
먼저 작가는 게 통조림의 실물보다는 그 연원을 추적하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만든 게 통조림이 가장 하층의 고된 공장 노역을 통해 가장 비싼 값으로 치환되는 가운데, 조선인이 거기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해, 작가는 그 일대 한 공장을 찾는다. 그리고 이어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발행한 만주 이주 관련 여행안내서의 그 루트를 따라간다. 역사의 복원된 경로는 동북아시아 지대의 매끈한 연결에 대한 불가능한 상상력의 현실을 드러낸다.
반면, 그 역사에 대한 관광객의 미션에 전제된 매혹은 역사의 상실과 그 역사에 대한 분열적인 태도로부터 거리를 획득하는데―이는 반재하가 국가 이데올로기의 침투되지 않은 화자의 위치를 대리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는 부분이다.―, 곧 현실의 실제적 “연결감”이 없는 역사 이후의 존재인 작가에게 이 관광객 모드의 쾌활함은 이 루트가 순수하게 “단절”로 경험되지 않기에, 더 정확히는 “단절“의 감각이 부여될 수 없었기에 획득되는 감정일 수 있다―그 무구함의 정체성으로부터 과거는 희극으로 다시 귀환한다, 또는 귀환 가능하다. 곧 상품은 역사의 환유물이자 흔적이지만, 동시에 상품으로 깎여나가며 매끈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두 작업 모두 상품으로, 물질 기반의 이미지를 경유한다는 것은 주요하고도 징후적이다. 그러니까 두 작업이 갖는 이미지의 세계에 대한 진술은 이미지 자체보다는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매혹과 탐험의 영역에 대한 서사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 주체의 정신분석적 차원을 기약해 볼 수 있을까. 두 작업 모두, 그 이미지의 세계가 구성하는 의사-현실의 경로를 좇는 데 일단 주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은 북한이 새롭게 가시화되지 않은 이미지의 매혹으로 자리 잡는다는 걸 (그러니까 이미지의 확장적 기술의 충동 안에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이상 북한이 역사의 상관물로서 의미 질서를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나타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징후적이라 볼 수 있을까.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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