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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작은방, 〈경마장 야생마는 어디로 갔을까〉: 이야기(로부터)의 동력REVIEW/Theater 2026. 3. 7. 14:59
극단 작은방의〈경마장 야생마는 어디로 갔을까〉(이하 〈야생마〉, 신재훈 작/연출 )는 두 가지 메타포를, 이야기를 절합하는데, 그것은 상상의 세계로서 이야기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의 이야기를 교환하는 방식을 따른다. 야생마에서 트레이드포춘호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야생마는 불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의, 또는 믿을 수 없는 실재의 체현의 자리를 남북통일에 대한 순간으로 대체된다. 야생마는 트레이드포춘호의 상상적 환유물이고, 트레이드포춘호는 다시 현실에서 과거 속의 부재하는 기호로 위치된다. 결과적으로, 스크린을 찢고 나온 야생마는 남북을 오가는 배의 운항 중지에 대한 곤궁을 해소하는 메타포였던 셈이고, 억압된 동물이 해방되는 순간 사람들이 겪는 쾌락은 남북 교류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단지 중구청장이라는 한 명의 수신자를 경유하여 뒤늦게 도착한다. 그리하여 이는 믿을 수 없는 차원으로 주어지는데―‘이야기는 무대, 저 너머에 있다.’―, 이는 통일의 감각을 체현하고 그 순간을 언어화할 수 없는 이의 무능력함으로 등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야생마를 봤다는 각종 민원을 헛소문으로 기각했던 중구청장의 발화를 철회해달라는 이 세 명의 다른 분과에 속한 공무원들의 호소가 이 이야기의 실질적 목적이기에, 정부와 시민의 대립 격차 아래서 관객은 민중의 염원을 담은 메타포로서 야생마에 대한 저 너머의 상상과 믿음의 공동체로 ‘다시’ 묶이게 된다.
곧 그 전에, 관객석 맨 앞자리에 앉기 직전, 곧 관객으로 통합되기 전, 또는 관객이 그로 통합되기 전, 중구청장은 무대에 처음 등장하며 “안녕하세요. 중구청장입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관객을 마주하여 신분의 ‘차이’가 새겨진 현실을 공무원들이 아닌 관객에게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을 경유한 그 이야기의 끝에서, 이야기는 비현실의 층위 그 자체의 가치로서 주장되길 요청한다. 이제 상상할 수 없는 숭고함으로서 이야기는 감각의 한계를 역설하며 그것을 만든 현실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는 가능성으로 확장되는 대신, 예술의 독자성, 고유성의 차원 안에서 자리 잡는데, 이는 결국 이야기는 공무원 한 명이 중구청장에게 “매료돼시죠?”라고 묻는 것과 같이, 어떤 감응의 효과를 낳는 기호로, 불가능성의 실재에 접근하는 신비한 시공간을 욱여넣는 기호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절합이 향하는 그 방향이 결국 중요한데, 트레이드 포춘호에서 야생마가 아닌, 그 역의 방향은 통일에 대한 상상력이 그만큼 희귀하고 어렵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일까. 또는 통일의 발화가 상징계적 차원에서 결락되어 있음을 중구청장의 몸을 통해 체현하려는 것일까. 이야기는 갑작스레 추락한다. 욕망을 추동하며 상상력을 해방하는 야생마의 생명력에서 공허함과 애잔함으로 남은 트레이드 포춘호의 비가시성으로의 전환 아래, 야생마는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고, 공무원들 역시 부재하는 현실을 가리키는 사라지는 매개자가 된다. 현실은 그렇게 이야기가 되며, 이야기는 이야기만큼의, 이야기 이상의 현실이 존재했음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그렇게 현실로 돌아가며, 야생마의 생명력을 수합한다. 〈야생마〉는 이야기의 생명력과 현실의 이야기스러움 사이를 오간다. 그렇지만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감으로써, 트레이드포춘호가 아닌 사라진 야생마는 이야기로 봉합될 수 있다. 동시에 진정한 이야기의 동력은 꺼질 수 있다, 스스로 수단화되면서. 이는 곧 이야기―예술―의 입장에서 현실을 접면하는 차원에서 이야기가 물러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야생마의 생명력은 곧 현실을 초과하지 못하는 이야기의 무능력 그보다는 겸허함을 드러내는 이야기의 메타포가 아닐까. 그럼에도 이야기 화자의 중단된 트레이드포춘호 운영으로부터 북에 가족을 두고 만나지 못하고 죽는 장인어른이 지닌 무기력함의 시선은 그것을 다루는, ‘야생마’로부터 급격하게 하강하는 〈야생마〉의 무기력함은 아닐까. 이야기는 또 현실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물러나고 또 꺼진다.
하지만 현실은 또 다른 망각, 은폐의 너머를 가리킨다. 트레이드포춘호의 꺼진 생명력은 야생마의 사라짐으로 보는 건 쉽다. 반면, 결정적으로 극에서 언급되듯, 그 물동량이 줄어들어 운항이 중지된 것은 천안함이라는 상징적 사건에 따른다는 점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불가능한 지점은 통일에 대한 상상력 이전에 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교환될 수 없는 이야기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어쩌면 왜상을 덮는 환상적 잉여의 쾌락이라는, 야생마라는 모호한 기호에 대한 더 확실한 정의일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건 아닐까. 왜 야생마는 잠깐의 의심이나 놀라움도 아닌 바로 쾌락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이는 이 공무원 셋이 어떻게 이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느냐의 물음과도 상통한다. 과천 경기장에서 마사회 인천 지점의 스크린을 찢고 나왔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어떻게 바로 수용될 수 있는가가 사실 놀라운 지점인 것이다. 곧 〈야생마〉는 그 스크린의 얼룩을, 실재의 얼룩이 주는 놀라움의 지점을 관객의 반응으로써 수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야생마는 ‘자유’공원에서 (자연스럽게 바다로) 사라진다(그 귀결은 물론 죽음이다). 또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야생마의 부재는 물론 자유공원 너머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죽음이며, 또 그 죽음에 대한 암묵적 합의의 기호이며, 무엇보다 자유(공원) 자체의 증발에 더 부합하지 않는가. ‘야생마’는 자신의 부재로써 자유의 사라짐을 입증한다. 〈야생마〉는 우리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그것을 다시 수거한다. 죽음을 향한 자유가 죽음충동으로서 바다에 도착하는 미래적 순간은 곧 야생마-장인어른의 시선이 남북의 사이에 머무는 과거의 순간이다. 그리고 결국, 이는 또한 갇혀 버린, 바다에서 맴돌고 있는 인천(에 대한 핍진한 상상력)의 지위 자체―상상력을 통해서만 도달 가능한 지위―를 역설적으로 지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인천에서) 현실은 상상보다 앞서 있고, 결국 도래한 상상이며, 뒤처진 상상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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