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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해인,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 ‘빈 공간’의 연극REVIEW/Theater 2026. 3. 7. 15:02
극단 해인의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이양구 작, 연출)이 가리키는 현실은 이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이 공간(에)의 현존을 재투자하여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에 모두를 묶는다. 관객은 여전히 관객이지만, 이 상황을 배경으로서 체현하면서 그러하며, 관객의 의지를 초과하는 이 상황, 환경에 대한 몰입은 이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의 전사, 배경, 정보가 거의 없는 제약적 상황을 기초로 한다. 몰입, 곧 자신에 대한 반향으로서 공간으로부터 자신으로의 수렴은 자신의 불완전성의 인식에 대한 다른 이름이며, 몰입은 이 환경의 비언어적 차원 자체와 관계 맺는 유일한 자신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현상된다.
공간을 휘저으며 객석에서 나타나는 두 사람은 각각 “이렇게 덥지만” 우리가 희망을 갖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의견과 “이렇게 더운데”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게 더 낫다라는 의견으로 극명히 나뉜다. 이들은 우리를 대리 표상하는데, 바깥이 안전하지 않기에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것과 안에서 언제까지 생존이 담보될 수 없고 바깥이 안전하다면 나가야 한다라는 것은 곧 이 장소를 포함한 시대적 상황의 불완전함을 가리킨다, 또는 그 불완전함으로(만) 환원된다. 공간 안에 숨는 것과 공간 안에 갇히는 것의 두 대립적 표상 아래, 문밖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곳으로 현상된다. 곧 이들의 대화는 문 바깥의 세계로 모든 것이 환원되는 구심점을 만든다.
그렇다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사람이 필요하고, 두 명의 관객이 그 절차를 수행할 존재로 위임된다. 사실 세계가 어떤 힘에 의해 장악됨은, 안과 바깥이 극명하게 분기됨을 만듦은 얼마 전 계엄의 시기를 상정한다.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는 그것이 곧 SF적 상상력이 동원되는 공간으로 읽히게끔 한다. 문밖에서는 실제로 ‘총을 든 군인’들이 얼마 전까지 장악하고 있던 곳이고, 딜레마는 그 예외상태가 아직 진행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곳의 실제 더위가 생존의 각박함으로 서사화되며 현재진행형의 도래한 미래에 결속되기도 한다면, SF는 반대로 자신의 시간을 역행하기도 하는데, “피난”이라는 수사는 이곳 물리적 장소를 풍화된 시간의 역사적 장소로 소급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니까 이곳의 시간성은 이 공간에, 장소로서 공간에 포획되며 단지 스며 나오고 암시되는 차원에서 잠재된 것으로만 남는다. 어떤 서사 안에 머물러 있으며 현실 차원을 시뮬레이션하거나 현실을 신체로부터의 서사로 지시할 뿐이다.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의 탁월한/독특한 지점은 이 서사(의 시간대)가 불완전한 대신에 신체에 그 서사가 체현된다는 것, 신체들에 장소를 구성한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불확정적이고, 불확정적 차원의 운동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완성되지 않는 미완의 시간성으로 극을 덮는다. 그 시간성은 수행의 과정성 안에서 장소와의 다른 관계로 굴절된다.
전철은 군인에게 잡힌 이들을 태우고 간다는 또 다른 풍문을 확인해야 하는 장소로 구성된다. 이곳의 바깥, 이곳으로 소리가 인계되는 장소인 도원역에 갔다 오는 조건이 앞선 두 관객에게 붙는데, 극적으로는 이 둘이 다시 안으로 오는 절차가 따라붙어야 한다. 결국 세 번째 바깥의 관객을 자처하는 첫 번째 활달한 또는 흥분된 성격의 사람은 두 번째 소심한 또는 수동적인 성격의 사람과의 대화를 끊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군인이 자신을 봤다고 소리친다. 그럼으로써 이 안은 가시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안전할 수 없음의 환경에 처하는데, 일단 눈에 띈 자신이 유일한 희생양이 되어 이 상황을 종결짓겠다며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그 전까지 바깥은 상상되는 장소로만 남아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됨에 따라 잠재된 사회의 이념으로의 통로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공간의 닫힘은 공간에의 닫힘의 상상적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심리적 긴장과 균열이 내부적으로 생성된다. 그리고 공간의 열림은 그 일상을 재가시화한다. 거기에는 햇살이, 한낮의 풍경이, 조용한 동네의 멈춘 듯한 시간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반전은 극이 빌려온 공간과 일상의 차원을 재구조화하는 가운데 성립하며, 이를 만드는 건 오로지 두 명의 배우와 그 말뿐이다. 엄밀히 무대도, 음악도, 여타 장치도 따라붙지 않은 채, 그 공간에 어울리는 2층 난간에 건 동아줄과 바깥에 나가는 관객을 위한 지령이 적힌 종이를 제외하면 특별한 소품이 투여되지도 않고서 극은 벌어진다.
이는 그야말로 ‘빈 공간’의 연극이며 그것이 얼마나 충만할 수 있는지 그 자체로 자족적일 수 있는지를 트라우마적 차원의 맥락화와 그것의 급격하고도 가벼운 해소로써 보여준다. 가령 차경으로 드러나는, 좌우를 오가는 흥분된 배우의 재롱은 이것이 모두 연극이었음을, 그 바깥 현실에 대한 우화로서의 언급임을 드러내는 현실로서 틈이며, 연극으로서 온전한 무대였음의 사실을 배가한다.
그리고 이는 아쉽게도 또는 너무 주효하게 작동해서 두 번째 공연에서는 공간을 나섰다 돌아온 한 관객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짐에 따라 그를 돌아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그 관객의 피드백에 따라, 반쯤만 열리게/닫히게 됨에 따라 첫 번째 공연에서만 수행되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열린 틈에 대한 재빠른 전유로서 단지 일시적으로만 허용되는 그 ‘연극’으로서 틈을 성사시키지 못한 채, 다시 들어온 배우는 이 무대 없음, 무한한 무대의 위치를 잡기 위해 또는 확인시키기 위해 두어 번의 이동과 멈춤 끝에 인사를 수여한다.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는 제목처럼 하나의 문장이 분기되는 미묘한 언어적 변환과 같이, 관객의 층위에서 시작한 두 명의 배우가 서로 다른 논리로써 서로를 마주하고 있음으로부터 우리가 긴급한 외부의 상황으로부터 어떤 행위도 차마 쉽게 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상태를 주조해 낸다. 그것은 상당히 논리적인 외양을 하면서 서로를 배격하기보다 서로를 보완하고 완성해 내는 데 가깝다. 이렇게 덥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에 있는 게 낫고, 이렇게 더운데 바깥보다는 그래도 안이 낫다는 뒤집힌 논리 역시 그 둘의 입장을 조금 다르게 변주하면 가능한 논리가 된다. 그 너머의 다양한 선택지와 판단의 역량을 재단하고 갈취당하는 건 이 극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자 메시지가 아닐까. 곧 관객의 자리를 벗고 동등한 시민으로서 판단하고 수행할 것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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