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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분 연극제: 지역에 촘촘하게 접지되는, 너른 동시대성의 표현들
    REVIEW/Theater 2026. 3. 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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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분 연극제는 15분 내외의 짧은 연극들을 모은 축제로, 이는 순차적으로 장소를 옮겨 다니며 진행된다. 2025년의 축제는 무더위로 인해 야외 장소를 활용하지 않는 방침을 적용했는데, 이는 당연히 우연한 관객, 동네 주민들의 단속적 참여를 가져가기 힘든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비자발적(?) 관객 유치의 소거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축제 기저의 어떤 서사를 감축하거나 소거하는데, 곧 순차적이며, 모든 공연을 반나절 정도 안에 볼 수 있는 건 축제의 경로적 이행의 서사, 장소와 장소의 연결이라는 부가된 시간의 서사가 이로써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 전까지는 역설적으로 축제의 규모가 아주 크지 않으며, 이틀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되기에 가능했던 부분으로, 만약 야외를 활용해 장소의 연결이라는 행위로부터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이 이제 불가능하다면, 장소별로 이뤄지는 공연이 제각각 홍보되는 방식, 그러니까 그 장소에 대한 특별한 동시에 고유한 서사의 연장선상에서 공연이 그곳에 부착되는 하나의 서사를 또 다른 전략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동의 분리된 몫은 이 축제를 통합적으로 구성하려는 관객에게 여전히 남는데, 이때 이동을 제외하고 남은 공연 사이의 몫이 일종의 지역 화폐로서 쿠폰, 곧 예약금을 전환해 현장에서 되돌려 주는 축제가 처음 시도한 이 방식과 연동되어 펼쳐질 가능성이 생겨난다. 아마도 여러 동네 상점과 연관해서 사용 가능했던 이 쿠폰은, 이 이동의 몫에 부여한 또 다른 축제의 전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동의 이동의 서사가 지역으로 확장된 개인의 서사로 바뀌는 지점에 일종의 지역 화폐로서 쿠폰이라는 실험이 있다면, 15분 연극제 내부의 어떤 정해진 형식의 차원은 열려 있다. 따라서 8작품은 모두 다르고, 표현 양식도 작품의 주제 역시 그러하다. 어떻게 보면 기획의 차원에서 작품보다는 그 팀, 예술가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내는 입장인 것인데, 그 공동의 서사 역시 작품 간의 내재적 차원의 연결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아니다.

     

    이를 비평의 시점으로 보면, 우연한 공통의 차원들, 형식들, 의제들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에서 오히려 동시대성을 가늠하는 효과를 낳는데, 이 물리적 제한을 걸어둔 것 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것 같은 축제에서 겹쳐지는 것들이 축적될수록 그것들은 그 시대의 형상으로서 필연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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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 위기라는 전 지구적 차원의 두려움, 위협 등의 문제는 서사의 기초적인 씨앗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무인도에 떨어진 존재가 쓰레기 재활용에 대한 경각심을 안게 되는 〈목말라〉는 일종의 환경 관련 캠페인 성격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결국 무인도 위의 생존이라는 클리셰가 우리가 처한 환경에 대한 비유로 뒤늦게 적확하게 위치하게 됨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그러한 비유는 기후 위기라는 메타포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날 여기 비가 내린 건 두 사람만이 안다〉는 타임머신을 통한 미래 시간의 외삽을 통해 SF의 전형적 법칙을 따르고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건 전미래 역시 기후 위기로 인해 인류가 곤궁한 처지에 이르렀다는 것. 과거를 빈티지로서 좋아하는 어머니 동시에 그래서 타임머신을 발명한 어머니를 찾아온 성장한 아들이 자신에게 소홀한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하며 철없는(?) 어머니와 마주하며 시작되는 이 작품은, 우리의 현재적 사물들이 미래에 드물고 진귀한 취미로 각색될 것임을 통해, 작품 바깥에서 폐허의 미래를 전망하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시점을 선취하여 되돌려 준다.

     

    역설적으로 어머니든 아들이든 모두 또래의 젊은 세대일 뿐 누구도 진정한 어른의 모습은 이곳에 없다, 미래의 가치가 단지 빈티지한 과거의 것에 대한 매혹과 함께, 오로지 과거로만 소급되는 것처럼, 거기에는 어떤 미래의 시간도 가시화되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욕망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고립된 젊은 여자에게 미래는 어떤 기대나 가치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미래의 시점을 ‘유예’하고 있는 것과 같다.

     

    〈배다리 여공 이야기〉는 예외적으로 지역의 서사를 각색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작업이다. 축제 인근에 위치한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1917년 설립된 조선인촌 주식회사 성냥공장이 있던 자리이다.―을 장소적 근거로 삼고,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의 서사를 그려내고자 하는데, 여기에는 AI의 데이터 분석과 이미지 구현 및 재생의 역량에 따른 재현이라는 도식이 전제된다. 〈이 날 여기 비가 내린 건 두 사람만이 안다〉가 현재의 취향과 감각을 미래를 경유해 외삽하면서 현재에 대한 멜랑콜리를 본격화한다면, 그리하여 사실 그 기술로부터 무심한 존재와 그 기술과의 거리를 더욱 현격화한다면, 〈배다리 여공 이야기〉는 유행하는 AI 언어에 대한 어떤 강력한 믿음이 전제되는데, 곧 과거를 그럴 듯한 감각으로 수월하게 재가공할 수 있는 미래의 시점을 가정함으로써 역사가 리얼한 판타지로 새롭게 재생될 수 있음은, 그 역사의 틈새가 희미하게 열리는 잠재적인 사료적 가치와 그것을 일종의 안방극장에서 즐기는 콘텐츠의 핍진성을 혼동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종의 시뮬라크르로서, 너무 현실 같아서 카타르시스에 근접하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역사물인 것일까, 아님 기술의 언어를 경유해 마침내 그 의미를 새롭게 독해하고 감응하게 만들 수 있음의 차원에서 비로소 되돌아오는 역사라는 타자의 언어인 것인가.

     

    인천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경마장 야생마는 어디로 갔을까〉 역시 〈배다리 여공 이야기〉와 공통점이 있다. 반면, 〈경마장 야생마는 어디로 갔을까〉는 〈배다리 여공 이야기〉에서처럼 인천이 매개될 수 있는, 희박하나마 (기술적 유행의 가치를 따라) 예측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의해 역사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음을 전제하기보다는―그래서 역사의 재현으로서 순수한 환상에 입각한다면―, 매개되지 않는 차원에서 또 다른 상상력으로 그것을 돌파하려 하고, 그것이 불가능성의 차원으로 닫혀 있다는 지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멜랑콜리하다.

     

    〈경마장 야생마는 어디로 갔을까〉는 그 전략의 일환으로 이야기와 현실을 중첩시킨다. 경마장에서 스크린을 찢고 도망간 야생마는 남북을 오가는 트레이드포춘호의 중단된 상황으로 연접된다. 이 기묘한 이야기의 연결은 물론 남북통일이라는 비워진 담론이 어느 정도 허황된 차원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듣는 중구청장은 뒤돌아서 관객의 위치를 점함으로써 우리는 그 이야기의 유혹을 건네받는 이로 연장되지만, 그가 더 높은 지위의 인물로 우리와의 거리를 형성함에 따라 우리는 그 상상의 차원을 염원하는 존재가 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야기의 매혹은 우리가 잃어버린 통일의 염원이 야생마의 생명력으로 전치되면서 일상을, 관습을, 제도를 뛰어넘는 차원의 사건을 목도한다는 것에 대한 상상력의 차원에서 주어진다. 반면, 자유공원에서 사라진 야생마의 최종 결말은 단절된 역사의 한순간을 무력하게 용인하며,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게끔 만든다. 곧 작품은 야생마가 어디를 향해 사라졌을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은폐되고 망각되어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김박사와 철인 28호〉 역시 〈이 날 여기 비가 내린 건 두 사람만이 안다〉에서처럼 SF의 외양을 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은 다분히 기능적인 차원으로 부속될 뿐이다. 오히려 철인 28호가 로봇보다는 인간과 구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것이 유머러스한 코드와 핵심 주제의 차원에서 반전의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또한 이는 불완전한 휴머노이드를 만들고자 한 김박사의 의지가 관철된 결과라는 점에서, 과학은 일종의 반과학 혹은 의사-과학, 혹은 문학에 가까우며, 일종의 완전함에 대한 반성적 언어를 실천하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과학의 메타포는 근본적으로 부정당하는데, 이 작품의 근본적 토대로서 언어 유희의 차원이 과학의 언어를 불안정한, 유동하는 언어의 차원으로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곧 김박사라는 이름이 대학원 시절에게 부여된 “김밥 사와”라는 명령어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처럼, 애초에 김박사라는 존재 자체가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그를 취재하는 기자의 이름은 공교롭게 ‘허위’이며, 이 이름은 유일하게 그만이 향하는 김박사의 진실은 일종의 허위의 것임을 선취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이야기의 진실은 이 언어 유희의 공세 속에 위태롭게 쌓이며 덧없이 흩어질 공산을 함축하고 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엄정하게 재단하고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언어의 강제로서 과학(으로서 편견)에 맞세운 어떤 불확정적이고 비예측적이며 오류와 실수가 용납되는 인간의 너르고 유연한 언어의 범주를 주창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허위라는 이름 역시 김박사의 집사람―사실은 철인 28호로 드러나는―에게 허기자로 불리면서 허기진 존재로 비약하게 되는 것처럼, 이 유동하는 언어의 장 아래에서는 애초에 허위와 진실의 이분법적 토대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또는 김박사의 과학자로서 어떤 그 기원의 신화 혹은 일화는 과학자 에디슨의 닭의 알을 품어 부화시키고자 했다는 등의 어릴 적 엉뚱한 실험들을 연상케 한다.

     

    가령 밥솥에 때를 모아 태초의 생명 탄생의 기적을 구현하고자 했던 그의 실험은, 그의 어머니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후 비밀리에 실험을 진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가 이후로도 결코 수면 위에 오른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허위’와 진실 사이에서 진동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의 과학자로서 신화의 결론은 ‘엉터리’로 치부되는 발상이 지닌 독특한 상상력 그 자체에 대한 수용과 존중에 대한 차원으로 소급해 간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 유희 혹은 언어의 이상한 횡단과 연결된다.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는 스페이스빔을 장소 특정적으로 전유하는 연극으로, 통제된 환경으로서 이곳을 전유함으로써 가깝게는 계엄의 경험, 멀게는 코로나의 격리적 상황 모두를 환기시킨다. 객석에서 공간을 휘저으며 등장한 두 사람의 논쟁에 의해 이곳은 ‘이렇게 덥지만’ 바깥으로 나가야 하거나 ‘이렇게 더운데’ 그냥 안에 있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는 것 같다. 단순히 더위 때문만은 아닌데, 밖에는 적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경험 때문이다.

     

    이제 공간 바깥으로 시야가 확장된다. 누군가는 바깥을 나가 기꺼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관객에게 양도함으로써 공연은 관객의 참여를 비가시적인 차원에서 실재적으로 수행한다. 밖에 나간 관객이 이상 없이 돌아오는 것, 아니 실은 아무 행위 없이 대기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더라도 바깥은 미지의 상태였고, 풀 수 없는 난제였던 것이다. 나간 두 명의 관객을 경유해서 말이다. 마치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적이 감지되지 않든, 또 다른 누군가를 자처하는 배우가 있든 간에, 대등하게 논의되는 두 사람의 상상은 마치 두 상태가 혼합되어 분포하고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무엇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렇게 덥지만, 이렇게 더운데〉는 가장 현실적인 차원에 가깝지만, 그리하여 더욱 강력한 SF적 환경을 구성해 낸다.

     

    〈말하다〉는 ‘연극’이라는 장르의 성격을 훌쩍 뛰어넘는데, 곧 별도의 대본이 있기보다 돌아가며 코리 도어펠드의 그림책 『가만히 들어주었어』 읽기를 수행하는 것으로써 이어지는 퍼포먼스라 하겠다. 이 책은 실의에 빠진 주인공 테일러에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하는 여러 동물들 대신에, 테일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마지막 토끼가 그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제목과 같이 말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며, 그것을 말하는 행위자인 백우람―뇌 병변 장애가 있는―과 이재호―발달장애가 있는―의 존재 역시 중요한데, 그들의 발화가 이야기를 투명한 내용이 아닌 존재가 기입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을 가만히 들어주는 토끼에 대한 자리가 관객으로 이전된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 둘은 테일러이기도 하지만 테일러를 지나간 수많은 동물일 수도 있는데, 곧 누군가의 독특한 말하기 방식에 대한 수용은, 성급한 자기만의 언어들로 소통의 실패를 겪은 수많은 동물 역시 다시 긍정될 수 있는 여지를 그려낸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말하기 위해 듣기를 포기했다기보다 듣기 위해 말했다면 어떤가. 닭의 요란함도, 곰의 시끄러움도, 코끼리의 거대함도 모두 상대적인 것이고, 편견의 언어라면 어떤가. 곧 듣기의 언어는 상대의 상태를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의 고유함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가만히 들어주었어』에서 제목과 같이, 주체를 테일러에서 토끼로 이동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테일러를 중심으로 한 다른 동물들과 토끼와의 비교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의 견지에서 이야기를 듣기 힘든 상태에 놓인 테일러와 어떤 여유를 조금 가지고 있는 존재의 토끼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 책이 너무나도 매끄럽게 전달되지만은 않는, 존재의 침투와 체현의 경계에서 비로소 발화되었기에 성사될 수 있는 부분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장애가 하나의 메시지이자 책을 내파하며 선명하게 재조각하는 것이다. 곧 그러한 메시지의 전파에는 어떤 장애도 있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가장 놀라운 발화로서 작품은 한아름의 〈그냥 지루한 말도 해보기로 했다〉일 것이다. 이 작품은 모든 장르적, 연극적 차원을, 장소의 차원을 건너뛰거나 새로운 차원으로 경계 짓는다. 연극은 정신병이 걸린 한 여자의 중얼거림으로 점철된다. 떠도는 말들, 사라지는 말들, 말더듬이의 말들, 파편적으로 반짝일 뿐으로 만족하는 말들이다. 마치 한아름의 페르소나라고도 할 수 있을 고다희 배우는 그 읊조림으로 글쓰기에 동반되었을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다. 아마도 15분 연극제에 새롭게 도입된 가장 안정적인 실내 공간인 유유기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공연이기도 했다.

     

    낙인의 표시를 자아로 재연장하는 이와 같은 과정은, 마지막 그가 눕는 행위에서 응결된다. 입술의 새어 나오는 숨과 붙어 있는 공기로서 말이 드러난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는 명확한 희미함이다. 미세한 각도의 전환만으로 소리는 공간을 변화시킨다. 신체와 말과 숨이 하나로 교차된다. 이것을 연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현존의 연기가 아니라, 연기의 현존이 아닐까. 연기가 곧 현존임을 드러내는 순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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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의 15분 연극제는 비록 거리, 야외에서 공연을 진행하지 못했지만, 여러 장소를 일시적으로 매우 그 장소에 친화적이고 긴밀한 방식으로 접근해 그곳에 들어서는 공연들이 적합한 무대의 터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만든다. 따라서 공간이라기보다 장소로 남는다. 그리고 그 장소들은 그 지역에 대한 기억으로 이전한다. 짧지만, 생각보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준 작업들도 있었다. 곧 어떤 의제를 던지거나 주제를 향하여 형식을 조정하고 가다듬는 일은 상연 시간과는 상관없이 큰 노력을 요구한다. 또한 시간이 짧기에 더 압축적으로 주제를 전달해야 하는 측면이 크다.

     

    어떤 주제로 모으지 않더라도 비교 차원이 성립될 수 있는 작업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주제로 묶는다고 해도 비교에서 멀어지는 공연들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주제를 설정하느냐의 차원보다 어떤 협력 관계로서 그간 15분 연극제와 함께해온 팀들의 성장과 지속 가능성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차원에서 연속성을 가져가는 전략도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급격한 더위가 작품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이, 축제의 환경을 전면 재고려해야 하는 시점에서, 축제의 지속 가능성의 차원을 인류 차원의 문제의식으로 확장하며 내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방향성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작품의 일부가 되어 버린 수어통역은 15분 연극제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데, 접근성 차원의 다양성을 고려하는 방안도, 수어통역의 방법론을 조금 더 첨예하게 점검해보는 노력도 축제와 동반될 수 있는 부분이겠다. 무엇보다 지역과 친화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표현에 있어 열려 있는 연극제의 방향이, 지역민과 함께할 수 있는 여러 방향과 접근의 방식도 작품의 형식을 넘어, 연극제의 부대적인 프로그램 등을 마련함으로써 충분히 재고해볼 수 있는 부분이겠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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