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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보용, 〈수의 감각〉: 돈에 대한 감정 그리고 (재)사고를 위한 의례 혹은 놀이
    REVIEW/Performance 2026. 3. 7. 15:09

    김보용, 〈수의 감각〉[사진 제공=옵신페스티벌](이하 상동).

    김보용의 〈수의 감각〉 [각주:1]은 돈을 수로 치환하고, 그 순전함과 순수함을 증명, 체현해 보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돈 자체의 관점을 투사하기 위해, 그룹원들은 돈을 수로서 상기하고 치환해 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일종의 집단적 명상 치유의 시간이자 수행과 의례의 차원이 동반된 공통의 시간성 아래 진행된다.

     

    돈에 대한 이전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매체로서 재정의하는 사전 의견 교환의 시간은, 〈수의 감각〉에 대한 이념을 즉자적으로 드러낸 부분으로, 곧 워크숍 자체의 의미를 경계 바깥으로 제시하고, 규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이 부분에서처럼, 〈수의 감각〉은 두 가지 단계, 시간성을 가져간다.

     

    한편으로는 개체들의 고유한 돈에 대한 각각의 병리적 차원들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의 견지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지점으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하나의 진단과 비평의 차원으로 이 작업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 병리적 차원의 회복 혹은 복구의 이념은 이 작품의 수행성을 고유한 지점으로 위치시킨다. 그런데 이는 매우 내밀하면서도 집단적 사회의 분기 속에서 실천되는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그것은 시간 차원의 이동을 전제한다. 곧 〈수의 감각〉은 무언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관적, 부정적 비판의 차원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앞지르는 혹은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차원의 이동과 이행을 주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수의 감각〉이 돈에 대한 오해와 편견, 고착된 다른 매개적 대상을 ‘나’로부터 떼어냄이 필요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결정적인 워크숍의 시간이라면, 그 개별적 차원의 해소의 견지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다른 감각, 관점, 이행의 태도를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이론의 실천이 아니라, 또 다른 긍정의 태도 자체를 수용하는 데 역점이 있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 〈수의 감각〉은 매우 독특한 위상을 점한다. 돈에 대한 당신의 관념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감정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돈을 대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곧 주관성은 현실과 달리 개인의 차원에서 전치시키고 뒤바꿀 수 있는데, 김보용이 사용한 “패닉 존”과 “컴포트 존”의 용어처럼, 돈의 매체적 사고 전에 필요한 건 우리가 결부된 돈에 대한 관념과 감정 덩어리를 바라보고 추출해 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주관성의 기호들은 집단 내에서 갈음되는데, 인상 깊은 지점은 집단원들이 본격적인 돈의 이행을 구성하기 위해, 계좌 번호를 공유하는 시간에서 이를 숫자와 이름으로써 “합송”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인 “상기티(saṃgīti)”에서 유래한 합송은 일종의 신앙 공동체 내에서 경전의 정확함을 함께 공유하고 체현하며 전승하는 차원에서 구현되었던 셈으로, 그 같은 의도의 연장선상에서 계좌와 이름은 하나의 의미 기호로 합치되며 동시에 그 안에서 개인들은 정체화되며 집단의 구성원이 된다.

     

    〈수의 감각〉은 현재의 감각, 나의 상태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감정과 생각을 끊임없이 공유하는데, 돈과 나의 관계를 결정짓기보다 변화되는 지점으로 위치시키기 위함이다. 곧 A에서 B로의 이동, 이 치환의 과정을 통해 돈에 대한 나의 전이와 변화의 지점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또는 돈의 순수함을 가리키고자 한다. 가령 계좌에 찍힐 수 있는 돈의 단위는 15자리 정도로 유한한데, 그 유한함과 무한함이 먼저 물어지고, 이는 8바이트의 데이터 값으로 치환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의미가 거의 없는 셈인데, 그 용량에 맞춰 돈에 대한 느낌을 두 글자로 표현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때 돈은 어떤 의미로 환산되기보다 의미 바깥의 지점으로 물러난다. 거기에는 대신 우리의 의미 부여만이 있다.

     

    시계 방향으로 연결된 집단은 본격적으로 돈을 옆의 사람에게 보내는 의례를 수행하는데, 이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고, 결국 0의 이동으로 수렴되지만―돌고 도는 돈의 흐름을 즉자적으로 표현하는 셈이다.―, 거기에는 옆 사람들의 흔적이 발생한다. 김보용은 어떤 보이지 않는 흐름이 발생했음을 주지시키는데, 1을 보내고, 2를 보내고, 다시 2에 0을 4개 더한 ‘수’―이것이 2만으로 지칭되지 않는 것이 돈의 일반적 가치로서 그 쓰임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를 보내고, 다시 3을 보낸다.

     

    이 과정은 모두 나에게 ‘수’가 도착하고 나서 상대방에게 그 ‘수’를 보내는 순서를 따른다. 결과는 영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감정이 공유되어야 하는데, 이는 특별하면서도 자의적인 무엇이다. 그것이 돈을 ‘정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고유한 개인의 문체 혹은 스타일을 나타낸다는 것 역시 명확하다. 다음은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다음 사람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다. 돈은 계속 불어나서 돌아온다.

     

    그다음은 오토파지 스코어로, 이는 상대방이 준 것을 “갉아 먹”고 곧 감축하며 보내는 것인데, 일정 시간의 공복에 도달하면 곧 자가포식, 우리 몸의 일부를 갉아 먹는 흐름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무언가 외부의 음식물로서 상대방으로부터 돈을 생체 에너지로 변용하게 되는 과정에서의 시간을 생략하는 셈인데―그것은 그 뺄셈에 대한 망설임으로 치환된다.―, 무엇보다 나에게 들어온 돈을 나의 내재적인 신체로 전제하는 관념이 들어서 있다.

     

    다음에는 한 사람을 특정해 돈을 계속 변화의 흐름을 갖고 보내는 것인데, 누가 특정되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곧 결과의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숫자들의 나열이 존재의 메시지를 반영한 서사로 각색될 수 있는 차이 역시 생겨나는데, 따라서 수의 흐름은 의미화된다. 김보용은 한 사람을 특정함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치환하기도 하는데, 단지 수의 이동일‘뿐인’ 행위가 일종의 상대방에 대한 나의 의미를 구성하는 행위인 셈이다. 사실 실제 돈이 처음의 자기 계좌의 수와 불일치할 수는 없다. 애초에 나의 계좌가 그대로 유지될 것임이 사전에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 돈의 무분별한 증여가 그리고 무작위적 투척이 자신의 수를 0으로 만드는 데 목표로 두고 이뤄지는 탓에, 끝난 후에는 0의 느낌이 물어진다. 그리고 실제 0이 아닐 수도 있는 자신의 수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분명 처음의 숫자와는 다른 감각을 준다. 거기에는 시간과 관계와 관념과 행위가 부착되었다. 이제 남은 돈을 또는 0원을 제3의 계좌에 입금할 차례인데, 그 이후로 이는 1/n으로 나뉘어서 집단원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내게 더해진 돈만큼을 옆 사람에게 다시 보냄으로써 나의 계좌로 복구된다. 이는 물론 시계 방향으로 순차적으로 결과가 나오면 시행되어 원금의 수로 돌아오게 된다.

     

    결과적으로, 〈수의 감각〉은 돈을 수로 치환하고, 감각과 감정을 교환하며, 상대방과 연루되는 과정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도 들러붙을 수 있는 이행의 흐름으로서 돈과 ‘나’의 관계를 되묻게 된다. 일종의 심리치료로서 〈수의 감각〉은 의미화될 수도 있을까. 그러니까 돈이 저마다의 개인에게 부여된 중요성을 현실 차원에서의 실질적 문제에서 나아가 환상적 차원의 문제로 결정되어 있음을 찾을 수 있다면, 환상의 차원과 억압의 차원이 하나의 원환으로 결부되어 있는 지점을 독해할 수 있다면, 돈에 대한 구조주의적 탐침과 조종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곧 〈수의 감각〉은 뭔가 그에 대한 기대를 엿보게 하는 작업이랄까.

     

    김민관 편집장

    1. 1. 이는 사전 모의 워크숍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본 워크숍과는 조금 다를 수 있는데, 그 차이를 직접 경험하지 않고 쓰는 것은 전적으로 이 워크숍의 의제와 방법론이 그 자체로 새로운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으로, 그것의 변경이 이후 더 세부적 차원에서 조율되고 안정화되거나 또는 완전히 뒤집힌다 하더라도 그 출발선상과 대략적인 기조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고―그것은 사후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 시간만의 고유함이 충분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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