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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수영, 〈Performance Test〉: 인간에의 테스트
    REVIEW/Performance 2026. 3. 7. 15:57

    박수영, 〈Performance Test〉ⓒ남택근[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박수영의 〈Performance Test〉는 엑스봇(Xbot)을 소개하고 그것과 동반된 일련의 여정을 재현한다. 엑스봇은 디지털상에서 뼈대를 심는 리깅 과정을 경유하며 생성된 자신의 3D 캐릭터 모델로, 이를 다시 오프라인으로 가져옴으로써 생기는 물리적 차원의 ‘부하‘, 곤궁을 연출하는데, 이것들은 그야말로 실재로 그를 엄습하는 감각의 차원을 수여한다. 현실에서 그에 대응하는 물리적 신체는 유사한 형태를 일차적으로 조직하는 것에 그친다는 점에서 지극히 환원적인데, 그것은 살이 아니라 딱딱한 피부, 3D 프린터로 용출한 플라스틱 소재의 갑옷 같은 싸개 조각들을 쇠구슬로 이어붙인 조립된 일종의 박수영의 휴먼 스케일에 대응하는 프라모델 모델에 가깝다.

     

    곧 그 안에서 어떤 소프트웨어의 구동 장치가 연장되지 않은 채 박수영 자신에 의해 그것이 로봇으로 정의된다는 것은, 곧 어떤 언어도 갖지 않은 그 로봇을 대자적 존재로서 바라보는 박수영의 의식에서(만)의 응결점을 전제하는데, 이는 로봇에 각종 부하를 걸어 성능을 테스트하는 퍼포먼스 테스트를 엑스봇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가시화되는, 그를 인간처럼 대하는 작용을 수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곧 그를 마주하고 대하는 그의 의식과 태도가 그것을 존재로서 성립시킨다.

     

    나아가 이는 엑스봇과 관계된 의식을 가진 그 자신의 변용을 가져오는데, 그러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엑스봇에 급격한 부하 변화를 주는 스파이크 테스트의 일환으로서 수중 부하를 감당케 할 때, 그가 함께 그것과 가라앉고 부상하는 것을 촬영한 영상 장면은, 엑스봇과 끈으로 묶은 채 바다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 테스트로서 노 리미트(no limit)행위가 일종의 의식적 행위로 변환되는 순간이 발생하는데, 그 긴 끈이 마치 탯줄인 것인 양, 위로 솟는 박수영과 그 아래 엑스봇과의 ‘온전한’ 거리로 묶여 평행선상에서 거의 멈춰 있다는 인상을 주는 부분이 그러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구멍을 막아 평균 밀도를 높여 물에 잠기게끔 하여 장시간 부여되는 부하를 측정하는 내구성(soak) 테스트에 자신을 맡기는데, 곧 물에 고개를 처박고 10초 단위씩 측정하며, 1분이 되었을 때 그 테스트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암전이 오며 공연이 마무리된다. 곧 숨을 쉬는 존재가 갖는 부력 때문에 뜨게 되는 그 가능성을 테스트의 용도에 맞춘 한계로 전도시키는 이 과정에서, 그는 엑스봇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는데, 그는 전적으로 엑스봇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엑스봇일 수 없는 존재로서 가시화된다.

     

    곧 엑스봇을 매단 채, 매달려 있는 엑스봇으로부터 반대로 끌린 채 이 둘의 연결 구조는 만나기보다 영원한 간극을 상연하는 것과 같이, 이 과정이 다시 그의 신체적 수행 자체로 변모하여 그 자신을 향하는 과정에서, 엑스봇이 가시화하는 건 다름 아닌 그것과의 간극을 지시하는 인간 존재인 것이다. 엑스봇이 전적으로 인간의 타자가 아니라 엑스봇을 입음으로써 타자성을 떠안는 인간이 있는 것인데, 따라서 〈Performance Test〉는 인간의 재인격화, 재청제화의 한 과정이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생명 없는 비인간의 인간으로서 형상이 필요하다.

     

    엑스봇의 플라스틱 피부와 관절부를 대신하는 경량화하기 위해 속이 빈 쇠구슬을 차례차례 조립해 가는 작가의 행위는, 생명을 가시화하는 의식으로서 행위에 가깝게 되는데, 여기에는 최소한의 인간 형상에 대한 전제가 따르는 것이다. 이 쇠구슬이 여름 무더위에 녹스는 과정을 겪게 되는 걸 작가는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쇠구슬이 신체 일부의 환유로서 작용하며 인간적 유비를 형성하(여 인간과의 간극을 봉합하)고 있읍을 보여준다.

     

    사실상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을 바닷속에서 부상하는 이미지에서, 어떻게 우리는 불안과 죽음이 아닌 편안함의 인상을 받게 되는가. 그 끈이 박수영을 옭아매는 게 아닌, 그 둘 모두를 구원하는 유일한 하나의 숨구멍이라는 착각을 주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고철 덩어리로서 무게는 앞선 부력으로서 한계 요인을 소거하며, 인간의 가벼움까지를 상쇄한다. 그로 인해 물리적으로 감속되는 부상으로의 방향을 띠게 되는 것이 일시적으로 정지의 이미지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진정으로 엑스봇을 구원하는 박수영의 삶을 건 그 스스로만의 시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데, 바로 그 같은 투신, 모든 걸 바다가 아닌, 엑스봇이 지닌 무게에 던지는 장면으로부터 그 둘만의 공고한 영역, 그리고 구원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속박을 그 연결과 구원, 조응의 시도 속에 맞바꾼 결과로서 도출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그는 타자를 향한 투신을 통해 그 자신의 영원한 삶을 얻게 되는 것 아닐까.

     

    따라서 마지막으로 그가 엑스봇이 되고자 하는 어떤 초과됨의 자기에의 부여는 그 자체로는 잉여적이며, 바다로 가라앉는 입구의 첫 번째 장면을 복기하는 것에 가깝다. 이 과정의 뒤섞임이라 인식되는 부분들은, 그가 로봇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로서 그의 신체를 보존하고 지속하며, 그 스스로 그로부터 재구성되는 존재로서 그의 의식 전반을 조율하고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곧 그 프로세스가 선형성 자체의 흐름을 부차적인 것으로 미뤄두기 때문이 아닐까. 곧 영원히 잠긴 시간 안에서 그 둘만의 의식과 태도와 몸짓이 자리하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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