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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루한 말도 해보기로 했다〉는 정신병이 걸린 한 여자(고다희 배우)의 읊조림이다. 이것이 하나의 유일하고도 고유한 형식이다. 하나의 커튼 뒤라는 무대가 그 자신의 내면-공간을 부유하고 탐사하고 증명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성립하는 가운데, 그의 발화는 소진된 자신을 이미 소진된 자로서 부흥시키기 위해, 존재의 나머지를 증명하기 위해, 언어의 잔여를 언어화하기 위해, 소진 자체를 긍정하기 위해 발화한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무엇보다 발화로서 접촉하기 위해 발화한다. 발화된 말들은 그 몸을 거쳐 가면서 사라지고 그 말을 하고 있는 신체를 작은 불빛으로, 숨으로 되비추며 사라진다, 다름 아닌 타자로서 자신에게 그 말들은 켜지고 바로 꺼진다. 말들은 그러니까 쌓이고 무덤이 되고, 오직 그것을 마주한 또 하나의 신체만을 남겨둔다.
그 말들은 떠도는 말들이고, 떠돌면서 곧 켜지면서 이내 꺼진다. 그러니까 수행은 무기력한 몸의 찬란한 여정이다. 잠깐의 번뜩임이고 연접을 위한 사라짐이다. 파편적 말들은 그의 의식적 신체의 부산물이자 그의 타자적 건네짐이다. ‘그냥 지루한 말도 해보기로 했다’라는 말은 또 하나의 읊조림이고, 그 의식적 신체의 자기 관계적 바깥을 향한다. 따라서 이 말들은 그 자신과 관계 맺는바, ‘내면‘이 주어지는 것이다. 커튼 안쪽에 위치하는 것이다. 말들은 읊조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우묵한 공간이다. 말에 파묻히기이다. 우리는 일종의 그의 달팽이관이 된다. 그는 극장의 중간 기둥으로 중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 말들이 그 ‘안‘으로 환원되고 있었음을 상기한다.
고다희 배우는 한아름의 페르소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정확히는 둘은 생산적 소유로써 공통 세계를 그려낸다. 글쓰기 역시 읊조림으로 읊조림의 연습 역시 어떤 글쓰기로 돌아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어떤 의식 세계, 내면 풍경이 전해지고 그는 말 그대로 그것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주어’에게 귀속되는 이 말들은 끊김이 없(는 정도로 밀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끊어질 수 없이 이어지면서 틈입의 가능성을 줄여 자기 원환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닫히고 그 안에 잔여들이 부상한다. 용광로 같은 화로, 뉴런 간의 끊임없는 연결-접속, 곧 의식의 흐름, 그것을 따름으로써 하나의 자기의식의 글쓰기로 반향되는 하나의 신체를 완성하는 것, 또는 무대화하는 것, 하나의 무대를 가설하고 발화함으로써 그것에 반향되는 나를 희미하게 (관객으로) 감지하는 것, 무엇보다 비가시적인 커튼을 직조하는 것, 말들은 하나의 말이고, 하나의 신체가 수여하는 빈 공간이다. 그 빈 공간 위의 유영 대신에 어떤 말들을 어떤 문맥으로 좁혀보는 것은 부차적이다.
과정을 생산하고 과정으로 묶이며 하나의 자기를 증명하는 것, 곧 정신병자를 반추하며 정신병자로부터 벗어나기, 조금 다른 정신병자가 되기, 그래서 말은 그 자체로 수행적이다. 거기에 정신병자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사회 제도가 자리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회와 관계 맺는 ‘나’로의 접속을 나타낼 뿐이다. “눌리고 눌려서 응축”된 건 곧 그 말로부터의 나가 아니라 그 말을 뱉는 나 자신이다. 나는 그 말로써 응축된 나를 펼쳐 낸다. 진정한 자기 환원이다. 그것은 나와 맺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맺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가 나의 일부였음을 시인하는 것뿐이며, 나와의 관계 안에서 연결되며 나 자신을 반향하는, 나와의 관계에서의 작은 조각, 단서일 뿐임을 드러낸다. 거기에 어떤 원한 감정도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바깥으로 우리는 자신을 투사하고 귀속시킬 수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나’의 (문제의식적) 반향이다.
정신병자로서 고립을 정신병자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고립으로 역전하는 이 모든 과정, 그러니까 낙인의 효과를 안의 피드백으로 통합하는, 자아로 재연장하는, 원래부터의 나로, 자연스럽고 온전한 정신병의 세계로 재흡수하는 과정의 그 생산은 임시적이고 가변적이면서 신체를 향하면서 사라진다. 그것은 진정한 것이지만, 수행적이기 위해 그러하며, 자국으로서의 형식적 실질을 이룬다. 기둥 뒤에 있던 그가 다시 기둥 앞으로 눕고 나서 소리는 신체를, 그 자세를 그대로 반향한다. 소리는 신체를 연장한다. 그 전에 소리는 신체로부터 연장된다. 이제 우리의 신체는 일종의 베개이다. 입술의 새어 나오는 숨과 붙어 있는 공기이다. 그 소리는 들릴 듯 말 듯하다.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어떤 걸림도, 장애물도, 타자도, 타자로서 나도 없다.
그 말은 희미한 명확함이다. 미세한 각도의 전환은 그 소리-공간의 범위를 완전히 변화시킨다. 그것은 점차 들릴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새어 나오는 것으로서 머문다. 그 신체가 새겨진다. 그 신체가 새겨지는 공간으로 우리는 좁혀진다. 우리는 좁혀지며 새겨진다. 그의 숨이 뱉어지고 도달하는 공간에 우리는 머문다. 그만큼의 공간으로 우리는 물리적으로 수축된다. 우리는 앉아있지만 우묵해짐을 수행한다. 이러한 운동성 속에 극장은, 공간은 하나의 신체에 대한 반향으로서만 딱 그만큼씩만 채워진다. 신체는 곧 말이고, 말은 곧 숨이고, 숨은 곧 공간이다. 신체와 말과 숨과 공간이 교환된다. 그 교환 과정 아래 놓인다. 현존은 하나의 공간에 배우만 나타날 때를 의미한다. 아니다. 현존은 배우가 하나의 공간이 됨을 의미한다. 아니다. 현존은 그 배우가 하나의 공간이 될 때 그 공간 안에 내가 놓여 있음인 것이다. 공간에 붙들려 있는 건 바로 나이다. 그것이 현존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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