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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플레이 테제21, 〈최후의 분대장-제1부 조선의용군〉(김재엽 작/연출): 숭고한 역사의 형상을 재현한다는 것REVIEW/Theater 2026. 3. 10. 14:58

드림플레이 테제21, 〈최후의 분대장-제1부 조선의용군〉(김재엽 작/연출)ⓒ김명집[사진 출처=https://jangho.work//2024/10/26/최후의-분대장-제1부-조선의용군/](이하 상동). 〈최후의 분대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군으로 참전했던 김학철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다. 1941년 태항산 호가장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일제 제국주의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이후, 출옥한 그는 작가로서 제2의 삶을 살게 된다. 〈최후의 분대장〉은 김학철이 죽음을 받아들인 자신의 침상에서 아들에게 사진에 있던 동료들의 이름과 일화, 특징 등을 기억해 내는 첫 번째 장면으로부터, 어린 시절 과거로 돌아간 후, 그의 시간이 순차적으로 기입된다.
〈최후의 분대장〉은 역사의 재현을 힘겹게 기억으로부터 추출하여 완성해 나가는 첫 장면부터, 청산되지 않은 친일 행위의 잔재에 대한 일념을 부르짖는 김학철의 마지막 모습으로 그 재현의 당위성을 현재성에 근거해 목소리를 낸다. 그것을 듣는 그의 아들의 매개적 입장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수여하는 전자로부터 마침내 김학철에 다다른 재현의 포화된 상태에서는 그의 현재적 목소리를 직접 듣는 우리 자신을 체현함으로써 끝이 나는 형국이다.
그 말이 지닌 각각의 현재성은 (마치 늙은 김학철―남명렬―이 어린 시절의 홍성걸―김시유―로 돌아가, 다시 김학철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청년의 김학철―김세환―이 이를 대체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매개된 신체와 매개해야 할 신체로 나아가며, 개인의 역사를 상기하는 것에서 사회의 공론장 구성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앎으로의 이동과 굳은 신념의 성사로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최후의 분대장〉은 역사에 대한 앎과 재현의 공통분모를 그 성장 과정의 단계를 통해 전달하려 하는데, 이 앎과 신념은 하나의 몸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재현 그 자체의 순전함과 객관성으로부터 추출되기보다는 조금 더 목적론적인 경향을 띤다. 이는 역사에 대한 앎 지식의 차원에 그치지 않게 하려는, 또한 재현의 수사 차원에 그치지 않게 하려는 극의 의지와 상통한다. 결과적으로, 지식은 김학철 이전의 홍성걸의 신념을 형성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되면서, 오늘날 역사에 무관심한 혹은 무지한 관객의 눈높이로부터 역사를 구원하는 앎의 경계로 기능하게 된다.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동경으로 중국 상해로 떠난 홍성걸의 앳된 모습에는 모종의 설렘과 흥분이 느껴지는데, 이는 그가 어린 시절 몰입했던 『보물섬』의 모험 서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동시에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순수함과 무지함을 함께 지닌 청년의 모습이 거기에 겹쳐진다. 마치 ‘청년’의 희망에는 어떤 걸림돌도, 고난의 통과의례도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레닌, 마오쩌둥, 마르크스 같은 이를 분별하는 것으로 갈음되는 의열단 입단 절차 장면은 일본 천왕의 자리를 신성한 것으로 두던 홍성걸의 모습을 통해 ‘무지한 현대의 관객’의 자리를 대리하면서 그 관객에게 왕정과 공화제의 분별을 일깨우며 권력이 출발하는 기원에 대한 정의와 인민 주권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3시간에 이르는 공연의 2막이 시작되고, 무대 위로부터 내려온 하얀 천들이 내려오고, 의용대의 중국군과의 합작을 통한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여기서 비어 있는 하얀 천조각들은 비정형인 데다 위치도 제각각으로, 이는 김학철의 동료들이 한 명씩 죽을 때마다 올라가며 그들 각각의 ‘고유한’, 이름 없는 죽음을 증명한다. 이는 역사의 비가시적 주체의 복권을 향한 기록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일종의 적히지 않은 책의 환유로써 기능한다.
〈최후의 분대장〉 자체가 일종의 기록 문학의 표현이면서 문학들의 전거를 가지고 하이퍼링크적 연결망을 만듦으로써 실재를 매개하고 접근하는 장치로서 문학을 전면에 내세운다. 인물들의 내면과 생각을 표현하고 대신하는 각종 문학의 인용은, 식민 치하와 엄중한 정세 판단에 대한 고려의 차원에서,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대신하며 발화의 은밀한 수행 조건을 반증하지만, 그럼에도 순수한 문학적 효과를 창출한다. 이는 나아가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와 철학,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 공감의 정신을 혁명의 정신과 결부시키면서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혁명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당의정 같은 것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Petőfi Sándor)의 시는 김원봉(이갑선)과 박차정(정유미) 사이에서 공유되는 문학으로, 그 자체로는 사랑의 숭고함을 상회하는 조국에 대한 맹목적 헌신의 이념을 보여주는데, 그 문학적 기표가 인물에게 전이되어 삶의 은밀하고도 강력한 지령으로 자리 잡는다는 어떤 미래를 예기하고 선취하는 기호로서 이 같은 시가 기능적이고 매개적으로 투여되는 셈이다.

김학철은 본격적인 항일전선에 참여하는 조선의용군의 대원이 되어, 강남 전선에서 중국 국민당 중앙군의 지휘를 받으며 유격전과 선전공작 활동을 벌이다가 끝내 북상하여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 역동적 경로를 밟게 되는데,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며 감옥에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극심한 고통과 함께 결국 다리를 잃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는 그가 영예의 상처로서 떠안아야 할 과거의 기억이며 원한감정을 치환해 영속된 신념을 지켜가야 할 지표와도 같다.
이 실재의 고통과 죽음의 침투로서 신체의 현상은 〈최후의 분대장〉이 어쩌면 인물이 갖는 내재적 곤궁을 가장 즉물적으로 동시에 가장 은밀하게 구현하고 있는 부분인 것도 같은데, 곧 그들은 죽음에 대한 환상을 실재적인 차원으로 경유하며 ‘최종적’ 김학철의 완숙한 단계에서 고통에 초연한, 그리고 더욱 의연하고 고고한 자태로서 김학철의 형상을 주조해 내기에 이른다. 따라서 이는 예고된 승화의 기제를 위한 통과의례이자 그 지연 작용으로서 실재인 셈인데, 분명 거기에는 어떤 기이함이 있다.
왼쪽 다리 무릎 아래께를 붕대로 감은 다리를 안고 감옥에서 하염없이 고통을 호소하는 청년 김학철에게 환상의 장면들이 찾아온다. 어린 시절의 홍성걸, 노년의 김학철까지 그를 연이어 방문한다. 그의 현재 실존적 체험은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또는 그로부터 그의 삶이 꿰매진다. 알 수 없는 역사적 상황이 자신의 운명적 관계로 얽히면서 비로소 이해되고 미래의 의연함으로부터 과거를 조금씩 재조정하는 변주가 시도되는, 그 모든 것이 이 순간을 기원으로 정초한다.
마치 의족 같은 잘려나간 발을 건네받고 어린 김학철에게 건네받고 기념 조각처럼 바라보는 건 일종의 승화된 대상으로서 시간의 지층이 재구성되었음을 드러낸다. 이른바 역사의 기념비가 일종의 석화된 조각의 형태를 취하며 과거의 시간을 침투하는 전도된 양상이다. 어쩌면 노년의 김학철이 그의 간난고초를 이겨내고 살아가는 의연한 모습이 담담한 형태로 연장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비롯한 역사적 차원의 거대함을 그가 빈틈없이 수용하는 데 있어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멋들어진 인물이 되어야 했을까.
어쩌면 어린 시절과 청년 사이보다는 이 청년과 노년 사이에서 그 격차는 너무 큰 것 아닐까. 따라서 승화의 지점은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경계가 되고, 세 개의 시간을 통합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것으로 설정된 것처럼 보인다. 김학철의 자서전에서 출발한 공연이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건 김학철의 역사에 대한 재현이 아닌, 역사를 보는 관점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곧 김학철이 회고적 자아로서 과거로 소급되며 역사를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구성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자서전으로써 수행하는 것처럼, 김학철과 ‘김학철’을 진술하는 그사이에는 역사를 보는 어떤 관점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공연은 이 진술의 측면보다는 재현의 차원에 바탕을 두는데, 조선의용군 창설 기념사진이 전면에 투사되는 마지막 장면과 같이, 이는 쉬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조선의용군의 존재를 알고 경외하며 기억하는 차원에서 이를 민족 정서의 차원에서 급격하게 현재와의 거리를 떨어뜨리며 숭고한 역사적 주체의 형상과 그 희생의 모습이 우리 너머의 차원으로 고양되어 결정되게 된다. 노년의 김학철과 저 사진으로 응결되는 역사의 찬연한 기억 사이에는 김학철의 진술이 자리하는 셈인데, 그의 죽음으로 노년을 미리 처리함으로써 그가 되짚는 과거와 그것을 진술하는 현재 사이에서의 시간이 교차될 수 있는 근거를 소거한다.
곧 공연은 김학철의 죽음이 처음에 등장하여 일찍이 막을 닫고 그가 자유자재로 여러 시간을 옮겨다닐 수 있는 입장을 설계한 후에, 실재로서보다는 과거를 승인하는 관찰자의 면모에 가까워진 김학철을 통해, 과거를 과거로서 재현한다. 따라서 그가 각 시대와 갖는 관계성은 어떤 긴장감을 주지 않는데, 그의 앞에 펼쳐지는 재현에 근거를 역사의 장면적 수행으로 연출되는 듯 보인다. 이는 김학철이라는 역사적 형상을 타자화하지 않고 존중하면서 그를 그 자신으로서에 앞서, 관객으로 두고 초대해 환대한다는 하나의 윤리적 제스처 같은 것 아닐까.
이는 결코 시간여행이 아닌데, 과거는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곧 처음 홍성걸과 노녀의 그 김학철이 서로 만나 대화할 때, 김학철이 어떤 새로움과 경이로움으로서보다는 홍성걸에게서 어린 아이로서 그 존재가 귀엽고 깜찍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음에 가까운 것―그저 통상적으로 노년의 존재가 어린 존재에게 그런 것처럼―에서처럼 과거는 이미 결정된 차원을 목격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 장면을 비롯해 노년 김학철의 무대 곳곳, 여러 시간 틈 안에서 출현하는 건 매우 기이한 부분인데, 이는 곧 역사를 매개하는 주체의 차이로서 응결되기보다는 층위를 달리하는 존재들이 동시적으로 자리할 수 있는 연극 무대의 매체적 특징으로 소급되는 듯 보인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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