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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 돌파구, 〈튤립〉: 절대적인 사랑의 형상
    REVIEW/Theater 2026. 3. 11. 19:30

    극단 돌파구, 〈튤립〉(김도영 작, 전인철 연출)©하지영[사진 제공=극단 돌파구](이하 상동).

    김도영 작, 극단 돌파구의 〈튤립〉은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학교에서 튤립밭을 키우는 쿠로가 20년 뒤, 부유한 일본인 가정에서 자란 자신의 아들 쥬리프의 집에 초대받게 되면서 20년 전의 진실과 함께 인물들의 갈등이 전면화되어 파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긴박하게 그려낸다. 튤립이 심어진 화분, 곧 쿠로에 의해 화분 안에 검은 흙이 채워지며 화사한 꽃이 들어앉는 이 결착의 이미지는, 작품의 알레고리적 중핵을 이루면서 무대 전반의 환유로 확장된다. 쿠로는 “구근을 키우는 식물”로서 튤립은 구근이 다른 구근을 파생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잘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간헐적으로 부상하는 사운드는 튤립의 구근이 땅속에서 생명을 움트고 있는 작용으로서 은근하게 무대를 침식하듯 나타나는데, 그것은 매우 은근하며 가청 영역의 역치를 시험하는 듯한데, 이는 악쓰는 발성을 구사하는 배우들의 소리와 더욱 대비를 이룬다. 그와 같이 쿠로는 누구보다 튤립을 잘 알고 잘 키우는 사람으로서, 튤립(Tulip)을 가타카나로 음차한 쥬리프(チューリップ, 츄-립푸)의 토양이 되어주고자 한다, 곧 구근의 비가시적인 미미한 실제적 성장을 돕는 환경, 더 미시적으로는 그 성장의 움직임이 소리로 결절되는 매체―소리의 지지체―가 되고자 한다.

     

    이는 그가 흙 속으로 묻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결말로 연결되는데, 가령 그 직후 히로시마의 증권거래소로 일하러 가게 된 쥬리프의 활달한 모습이 그 튤립 생화와 같이 유독 밝게 부상하는 것을 보라. 이 유착은 가장 강렬한 사랑의 개념으로, 곧 화분에 심어진 꽃, 생명력을 뽐내는 꽃과 비가시화된 흙의 결합은 둘이 매우 긴, 과잉된 포옹을 하는 것으로써 선취되며, 그것은 바로 그 사랑이다.

     

    쿠로의 신체가 또한 일종의 검은 흙의 환유로서 기입되는 것이 그의 죽음 직전임 역시 의도된 것인데, 곧 시각의 경계 안에서 불쾌한 골짜기를 이루던 그의 얼굴이 그가 마치 그것을 문대 지우거나 더 사방으로 퍼뜨리겠다는 듯 그의 얼굴과 손이 긴밀하게 유착되는 그 순간은, 죽음의 고통 아래, 그를 조선의 “검은 까마귀”로 부르며 불결하고 더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멸시의 시점을 신체적 차원에서 비로소 형상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 미호에 의해 소문으로 떠도는 존재로 특정되었다가 검은 페인트를 칠해 노동자의 유형을 분류하던 지배자 일본의 통치 기술에 의해 다만 응시의 차원에서 이미지로서 거리를 두던 그의 환영적 신체가, 그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조각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그가 그 침탈된 육체로서 식민지인, 강탈된 미래로서 조국의 유비로서 일본 군인 야마토에게 뺏긴 그의 아들 쥬리프가 기입되는 순간이다. 그는 야마토에게서 튤립밭에서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성별도 모르고 이름도 없던―를 빼앗기고 자신의 아내 역시 죽임을 당했음을 뒤늦게 알고 야마토를 찾아 헤맨다. 그보다 먼저 아내를 발견한 야마토가 아이에 눈독을 들이고 소유하기 위해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의 아내를 단칼에 베어 무참히 죽인 것이다.

     

    이는 식민 침탈의 한 기원적 장면일까. 곧 야마토와 쿠호의 이 시차적 어긋남으로부터 생명 기호를 전적으로 뿌리까지 뽑아 다루고 지배하는 일본의 통치 차원의 이상적 이념인 “내선일체”가 현상된다. 곧 쥬리프의 기원은 망각되고 소거되며, 그는 완벽한 일본인이다, 태어나고 동시에 그 기원이 지워진 그 튤립밭이라는 부재의 기원을 표지하는 이름을 가진. 쿠호는 자신의 아들을 뒤늦게 인지하며 그를 곧장 “쥬리프”로 불러야 하며, 그가 자신을 기원으로 한다는 사실을 섣불리 말할 수도 없다. 왜 야마토는 생명과 죽음이 전치되는 그 순간의 기억을 그의 아들의 시작에 새겨 넣었을까. 죽음과 생명이 맞물리는 그리고 뒤바뀌는 이 지점을 그가 ‘낳았기’ 때문에? 그 환각적 장면이야말로 원죄의식을 영원히 초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쥬리프’, 그의 이름은 그의 사랑을 예기한다. 튤립을 매개하는 이, 키우는 이를 보았을 때 그의 이름은 그 존재로 이행한다 또는 횡단한다. 거기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다. 본래의 기원을 소거하고 기원의 시점을 새롭게 정초하는 이의 도착적 욕망, 기원의 순간을 박탈당한 이의 복수의 일념과 그리움의 정동이 사랑의 두 가지 양식으로 전화한다. 야마토가 생명의 탄생이라는 환희와 기쁨의 장소로서 의미를 자신의 아들에 대해 그 이름으로 육화했다면, 그 자신의 아들을 빼앗기고 양육의 권리 역시 잃은 쿠호는 복수의 정념을 튤립밭을 일구는 것으로 육화한다. 그로써 복수의 일념을 끊임없이 정초하며 가시화하는 한편, 튤립, 곧 쥬리프에 대한 사랑을 발신한다.

     

    쥬리프는 그 사랑을 고스란히 수신한다. 쿠호의 복수의 정념이 배가된 만큼, 사무친 그리움이 배가된 만큼의 크기를 순전히 사랑으로서 수신한다. 쥬리프로서는 그 명명의 자의성이 필연적인 운명으로 전화하는 것이 바로 쿠호를 만난 순간이다. 그는 쿠호를 사랑함으로써 퀴어적 존재가 된다. 아니 기꺼이 퀴어적 존재가 되어 쿠호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진정 혈연적인 차원에서 비롯되는 육감적 취향을 전제하지 않는 것일까. 아님 그가 부유한 가정과 부모의 전적인 사랑 아래, 어떤 구김도 없이 밝디밝은 인격체로서 성장한 튤립으로 자랐으며, 쿠호가 검은 흙으로 한없이 가라앉으며 인생을 보냈기 때문에 둘의 결합은 필연적인 (관계로 변용되었던) 것일까.

     

    야마토와 에리코, 이 부부의 집에 생화 더미가 바닥을 뒹굴고 있던 것처럼 곧 거기에는 오직 ‘아름다운 것’의 외양만 소지되는 것과 같이, 그가 진정 뿌리를 내릴 환경으로서, 자신의 생명적 약동을 구현하고 들어줄 존재를 비로소 만나게 된 것, 바로 그러한 삶의 새로운 분기점이 쿠호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튤립〉의 무대는 검은 수성페인트로 칠한 나무 합판들이 꼼꼼하게 이음매 없이 붙어 정면만 비워진 직각 큐브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쿠호의 검은 칠 얼굴을, 그 피부를 환유하는 건 분명하다. 그것은 또한 검은 흙이기도 한데, 어쩌면 등장하는 그 모두가 검은 흙이라는 환경을 딛고 기대며 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 벽과 바닥, 곧 그 공간 전체가 통과, 투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실재적인 환경으로서 매체라는 점에서 또한 분명해진다.

     

    쿠호는 그렇게 필연적으로 필요한 존재이지만, 곧 쥬리프의 실제적 기원으로서 필연적이지만, 그것은 비가시화된 차원에서 온전히 작동한다. 곧 그는 필연적으로 검은 흙에 묻혀야 한다. 그가 그의 얼굴을 매만질 때, 그는 처음으로 이 공간 전체를 매만지는 것과 같고, 마침내 검은 흙의 존재로서 그를 식별하고 수용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의 죽음을 ‘선택’한다. 에리코가 독을 탄 차를 내려 주었을 때 그가 그것을 몰랐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의 죽음은 이행되는 과정에 가까운데, 거기서 인지와 선택, 수용의 경로가 전이되어 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쥬리프의 기원의 장소, 그 튤립밭이 있던 연추―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마을―로 쥬리프와 미호와 여행을 가는 걸 그 전에 야마토에게 동의를 구하던 것, 그리고 그 이전부터의 꿈, 튤립 구근 재배가 일본에서 처음 시작된 도나미가 위치한 도야마에 가서 쥬리프를 위한 화단을 키우며 여생을 살아갈 것을 계획하던 것에서, 쥬리프와 사랑을 확인한 뒤 더는 어떤 장소에 대한 갈망을 갖지 않게 되었음을 그가 발화한 후에 그것이 벌어졌다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그러니까 또 한 번의 기원에 대한 살해는 일본인에 의해 반복되며 그것을 실제로 확인하는데, 그것이 영속적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게 되는, 죽음충동의 일단을 토로했음의 판단 ‘이후’에 내려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쿠호의 죽음을 에리코가 실현시켜 준 것과 같은 것이다.

     

    한편 이 죽음의 순간은 그의 비가시화된 존재로서의 응시를 비로소 고통으로 실체화한다. 또한 땅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형상화한다. 그가 검은 흙으로 비유되었으며 검은 흙 그 자체로 기능하면서 그가 그 스스로를 존재화했음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이 움직임에 덜그럭거리는 그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소리가 재부상하며 찬란한 빛의 쨍한 소리 파편이 그 안에 경계를 그리며 사라지는데, 곧 어떤 낌새 혹은 증후로서 자리하는 이 사운드의 흐릿한 흔적에서 전자 안에 후자가 최종 비식별되는 그 직전의 어렴풋한 경계적 순간, 망각으로 향하는 그 순간이 중요하다, 마치 에리코에 의한 쿠호의 죽음이 쿠호 자신의 가시화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한 것과 같이. 여기서 덜그럭거림은 거꾸로 흙 안의 생명력이 아니라, 그 생명력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환경 자체이다, 이름 없는 아이가 쥬리프가 되어 안정화되는 것과 같이.

     

    쥬리프에게 쿠호는 하나의 환상적 이미지임을 인지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검은 튤립 같은 사람”으로 그렇게 쿠호는 환상적 차원에서 정체화되는데, 이때 검은 튤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는 이미지의 자리로 수여된다. 그리고 그 전에 쿠호가 검은 튤립이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의 『검은 튤립』(1850)이라는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을 도련님 쥬리프에게서 뒤늦게 알게 되는데, 이때 쿠호가 키우고자 했던 검은 튤립에 대한 집착은 쥬리프에게 귀착되는 그 자신의 애정과 그 애정으로서 자신의 가시화에 대한 열망으로 전이된다.

     

    검은 튤립은 서로의 서로에 대한 애정과 욕망의 불가능성을 처리하며 서로의 이미지로 이행하는 정념이 고착되는 기호이다. 반면, 쥬리프에게 쿠호는 욕망하지만 그 대상은 모호하며 그 욕망은 해명 불가능한 것이라면, 쿠호에게 쥬리프는 역시 욕망의 대상이지만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은 합목적적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서로에게 있어 필연적인 친연성 없음의 전제를 쥬리프와 같이 공유하는 것이며, 오히려 그 지점에서 사랑의 형식을 새롭게 고안해야만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통상적으로 생산되는 경로를 벗어나 전적으로 다른 관계의 홈을 파야 한다. 그것은 “매일매일이 처음 같”은 그런 날들을 선사하기 때문에 또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쥬리프와의 격렬한 합일, 정지된 시간 안에서 결속은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에서의 성취이자 사랑에 대한 충동의 발로로, 이는 부자의 완벽한 관계, 부자 관계로서 완성이라는 본래의 목표를 근본적으로 재정초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소유의 차원을 뒤집는 것으로, 그 반대의 지점에서 상대방에게 토양과 같은 환경이 되어 주는 아버지의 본원적 역할이 사랑의 가장 성스러운 차원과 또한 만나게 됨을 시사한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아버지’라는 자리를 비가시화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침내 야마토의 집에 놓인 튤립 생화들이 마침내 땅과 결속된 순간이 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랑의 극단적인 강도의 차원에 도달했을 때 ‘진짜’ 아버지와 (진짜) 아들의 최초의 여행의 기억, 자신이 태어난 장소로서 고향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최초의 기억을 수여하려는 계획을 기꺼이 철회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본래적 자리가 그의 형상으로서 꿰어 맞춰질수록 사랑은 필연적인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타당한 것이 될 것이다. 아버지의 자리가 그로써 가산될수록 사랑의 특별함 혹은 독특함은 확실해지거나 제자리를 찾으며 감산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기꺼이 죽음으로의 처단을 받아들인다, 에리코의 행위를 선의로 해석하지 않고서더라도 말이다.

     

    “내선일체”는 식민지인의 일본인으로의 체현됨을 근본적으로 재정초할 수 있다는 이념으로서, 처음부터 불가능한 전제였으며, 1937년 발발한 중일 전쟁 이후 강화되는데,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튤립〉의 당시, 이는 실제 통용되는 말은 아니었다―미나미 지로가 조선 총독에 부임한 1936년 이후이다. 따라서 야마토-에리코의 집은 일본 개인의 특수한 용례가 아니라, 일본 자체를 제유하는 상징적 차원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선일체의 비유는 쥬리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데, 그의 이름은 곧 그들에게 있어 본래적인 사물의 차원을 의인화한 것―인간에 사물을 배가한 것이 아니라―에 가깝지 않은가.

     

    이러한 비유의 기원을 추적하면, 결국 쥬리프에 대한 야마토-에리코의 사랑은 끔찍한 것으로 전도되는데, 식민지의 구근을 옮겨와서 자국의 영토에 심고, 그것이 자국의 구근인 듯 잘 자라는지를 시험하는 것과 같은 그 강탈은, 그 실험의 결과를 진정 테스트할 수 있기 위해, 그의 진짜 아버지 쿠호의 재등장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애초에 반대로 쿠호를 추적해 죽이지 않았거나 쥬리프의 학교에 그가 일할 수 있도록 추천사를 써 준 건 바로 야마토였던 것이다. 곧 구근이 자신이 있던 땅의 기억, 자신과 밀접한 땅의 고유한 생래적 차원을 기억하느냐의 질문의 차원에서, 그 기억의 직접적 트리거로서 쿠호를 자리시킬 때 쥬리프가 완전한 일본인으로서, 자신의 아들로서 자리하는지를 테스트해보는 것이 야마토에게는 필요했을 수 있다, 또는 필요한 것으로 합리화할 수 있다.

     

    미호는 쥬리프에게 야마토가 “바깥에서” 그를 데려왔다고 말하면서 주체의 분기점을, 그리고 이 이후 모든 사건의 시작을 정초한다. “내가 누군지 안다는 거가 중요하니까”로 밝게 쥬리프는 응수하고, 그러한 사실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잘 자랐고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애정을 받았음으로부터 그 사랑의 행위를 주체적인 것으로 자리시키며 스스로 역시 그것을 단지 판단하는 객관의 자리에 머문다. 거기에는 심각한 정체성의 분열이나 갈등 같은 여지는 없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불분명한 뿌리에 어떤 서사가 있는지를 어떻게 쉬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는가. 부모에 대한 애착에 처음부터 의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자랄 수 있었는가. 그러니까 각 개체의 독립적인 주체로서 성장에는 그 역할 모델로서 야마토와 에리코가 애초에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로부터 내선일체에 담긴 일본인 스스로의 합리적 주체의 기율과 그 의식을 추적해볼 수 있는 것 역시 아닐까.

     

    미호는 마지막으로 떠나는 쥬리프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그때 극장의 암전이 찾아오며 영원히 그 말은 닫히게 된다. 이때 미호가 쿠호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그 죽음에 대처함은 그 앞의 모든 상황을 그가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곧 쿠호를 묻어준다거나 그 시체를 은폐하는 기술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쿠호를 검은 흙의 존재로 환유하는 그러니까 쿠호와 검은 흙을 등치시키는 상징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 에리코의 하인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독립적인 주체로서 그렇게 하는 것, 이러한 행위가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곧 쿠호를 전적으로 매개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미호는 〈튤립〉의 가장 객관적인 기록자인 셈이며 관계들 안에서 직접적인 매개자로 위치한다.

     

    그렇다면 그가 쥬리프에게 전하려던 말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이거나 그의 죽음까지일 텐데, 마치 모든 걸 봉합하는 것이기도 했던 그의 직전 행위―그의 상징적 행위는 또한 상징적 의례의 절차적 차원을 예기하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가 어떻게 쿠호의 죽음을 재공식화하려는 것인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살인자들로서 지금의 부모를 단락하고, 일본의 지배를 거부하며, “막산”과 “복종”의 본래 이름으로 진짜 부모를 자신의 역사로 재기입할 수 있는지를 그가 성찰하고 숙고하며 이행하는 그 과정에서의 첫 번째 씨앗을 던지기 위해서 말인가.

     

    미호가 ‘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몇 안 되는 살아남은 이, 곧 내선일체의 실험에 성공한 사례로서 에리코와의 대화에서 승인되고 있었던 것의 반대의 측면에서 식민지인으로서 저항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구간이 있었던가. 그가 마치 억압받지 않은 유연하고 상처 없는 주체인 양 시종일관 자리함은 그의 적응 역량의 차원일 뿐이며, 그것이 충분히 기믹이며 기믹일 수밖에 없음의 견지에서 사유된다손 치더라도, 그래서 그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결국 진정으로 그의 의식이 억압된 식민지인으로서 그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출구는 그의 마지막 닫히는 그 말에 잠기며, 다만 그것을 향한 여지만을 줄 뿐인 것이다.

     

    그의 잠기는 말은 공교롭게 쥬리프와의 일 대 일의 온전한 공간이 찾아왔을 때 놓이며, 이는 내선일체가 완벽히 적용된 일본인 두 명으로의 영속된 연장과 본디 한국인으로서 두 사람이 결속하여 재영토화될 수 있음의 분기점을 가늠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는 어떤 내기를 걸 것인가. 그의 절대 권력이 부각되는 이 마지막 장면은 결코 쥬리프가 일본인으로서 온전한 주체일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이는 그가 조선의 소위 DNA를 가지고 있어 그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운명적 차원의 결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시절에 타자로서 조선인을 대하면서 일본인으로서 내파를, 분열을 겪는 이만이 진정한 주체로서 일본인임을 역으로 명시한다.

     

    따라서 미호의 말이 단순히 쥬리프를 부모에 대한 원수를 갚는 주체로 각성하는 것―이러한 정념을 주체의 차원으로 기입하는 것이 바로 〈조씨고아〉이다.―을 직접 향한다기보다는 그리고 한국과 일본 두 양국의 격리된 차원을 고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차원을 다양한 것으로 두려는, 주체로서 여지를 더 크게 주려는 차원에서 시도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안온하기만 한 쥬리프, 생기발랄하고 사람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 쥬리프야말로 진정 문제적인 인물 아닌가. 그러니까 그에게 쿠호가 타자의 형상에서 퀴어적 사랑의 절대적 대상으로 이행하는 데 어떤 걸림은 없었는가. 그러니까 미호의 이후 행위는 오히려 숭고한 사랑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기점에서 그는 처음에는 봉합을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그 간격을 재도입하고 그 사랑을 혈연적 차원에서의 필연성으로 수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차원을 하나의 변수로 두고 사랑의 절대적 형상이 그에 영향받지 않고 갈 수 있는지를 재고하는 차원의 어떤 여지를 쥬리프에게 수여하려는 것 아닌가.

     

    이는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자신이 연인으로 만난 이가 자신의 딸임을 알고도 사랑하기 위해 다시 마법화의 기제, 곧 최면술사를 통해 그것을 망각하는 그 부분―이것이 미호의 그것을 대리하는 첫 번째 행위이다.―에서, 그 인식의 차원으로 다시 소급해 쥬리프에게 선택의 여지를 직접 가져갈 수 있게 한다는 것과 같지 않은가. 오히려 더 나아가 그가 딸임을 기억하면서도 그와 사랑을 한다면 어떠한가. 〈튤립〉은 그것에 대한 공백을 곧 쥬리프의 닫히는 입으로 가시화하는 것 아닌가. 〈튤립〉은 곧 시대를 틈탄, 시대를 비켜나(려)는 절대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튤립〉은 검은 흙을 상기하는 그 어둠에서 ‘그친다.’, 거기에 뿌리를 내릴 튤립으로의 전환을 암시만 하면서. 또한 〈튤립〉은 그 둘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분기되고 결합하는 불안정하고도 분열적으로 생성되는 장이다. 쿠호의 삶은 야마토로부터 가로막히고, 쿠호의 이야기 역시 야마토로부터 다시 한번 중단된다. 아들을 강탈당한 쿠호의 이야기가 은밀하고 은폐된 자기 기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면, 그리하여 극 속에서 유일하게 가짜의 진실로 나타난다면, 반쪽의 진실을 안은 야마토가 진실을 토로함으로써 이 진정함이 전화된 가짜의 이야기가 비로소 종합되며 완성된다.

     

    먼저 쿠호는 제삼자의 시선을 빌려 자신을 객체화하며 스스로를 은폐하는 가운데, 반쪽의 진실을 요청하는데, 물론 이야기 안에서 그 주체는 등장할 수 없고 특정되지 않지만, 이 이야기를 현재 듣는 야마토를 향하고 있다. 이는 튤립으로 쿠호를 때리는 야마토의 행위로써 저지당하는데, 그것은 이른바 자신이 그 이야기에 대한 진정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에 쿠호를 종속시키는 동시에 그가 그 이야기 속에서 최종 승자임을 일러주기 위한 것과 같다. 그러니까 그는 이야기를 전수하며 자신의 지위를 서사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행위적으로 고착시킨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검은 흙과 분리된 튤립, 곧 쿠호와 분리된 쥬리프가 쿠호의 중핵을 차지하여 그가 자신의 생명을 거기에 걸고 있음이 쿠호의 육체에 기입되는 형상이다.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야마토는 독립적으로 이름 없는 아이, 아버지에 닿기 전의 그 아이를 강탈한 자신의 행위를 처음으로 재기술하고 무대화하는데, 그것은 또한 참혹한 광경을 강렬하고 생생한 문학적 묘사로써 승화시키며, 감상할 수 있는 장면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면으로 재조정하며, 동시에 그것을 읽는 독자로서 자신을 갈음하는 것과 같다. 발화자-독자의 횡단적 존재의 차원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범죄의 진실은 문학의 환상적 장면으로 자리 잡으며 탈구된다.

     

    애초에 야마토에게는 원죄가 아닌 극적으로 숭고한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하나의 장면을 더하며, 하나의 행위를 그에 결착하는 이 발화-행위 차원의 진술을 통해, 마침내 그가 결정적으로 화분의 흙을 쏟아버림으로써 첫 번째 쿠호의 튤립을 화분에 심는 상징의 정초적 행위, 정념의 기원적 행위가 해체된다. 대신, 쿠호의 죽음에 대한 예기가, 죽음의 당위가, 선취된 죽음의 자리가 명시된다. 한 손으로 쿠호를 쏟아붓고, 다른 한 손으로 튤립을 구근 채 낚아챈다. 조선인을 죽이고, 일본인으로 분리한다. 쿠호를 죽일 것이고, 쥬리프를 끝까지 나의 품에 둘 것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하나의 이미지로, 튤립-화분의 첫 조각으로, 일체를 향한 정념의 기원을 물리치고 분리의 이전 장면으로 소급되어 간다.

     

    김민관 편집장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작가 김도영

    연출 전인철

    출연 김정호, 김하람, 권정훈, 윤경, 황순미

    드라마터그 전강희

    무대 박상봉

    조명 최보윤

    음악 김시율

    의상 김지연

    분장 장경숙

    안무 지경민

    조연출 황성현, 권수지

    프로듀서 조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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