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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성 연출, 〈P와 함께 춤을〉: 피나 밖에서의 현전
    REVIEW/Theater 2026. 3. 11. 20:14

    이경성 연출, 〈P와 함께 춤을〉©LG아트센터, Studio AL[사진 제공=LG아트센터](이하 상동).

     

    전설적인 혹은 당대를 대표했던 안무가 고 피나 바우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연극 〈P와 함께 춤을〉은, 피나 바우쉬의 연대기를 충실히 따라가는 대신, ‘피나 바우쉬’라는 기표, 신화성의 자리로부터 시작되고 또 그곳을 맴돌며 흔적이 된다. 여기서 ‘흔적’은 사라졌으나 공고한 피나 바우쉬 자체이거나 그것을 좇는 전의식적 워밍업 형태의 대화 형식으로써 접근되는 산만하고 무질서한 이야기라는 무대의 과정을 모두 담는 또 다른 매체적 저장 경로를 가리킨다.

     

    피나 바우쉬라는 실재와 신화의 틈을 비집거나 헤집는 차원 아래, 〈P와 함께 춤을〉은 실재와의 간극을 현재의 발화로 한정하며, 발화의 무한정함을 가정하고, 그렇게 꾸역꾸역 쌓아 올린 현재를 역사의 틈으로 곧장 밀어 넣는다. 아마도 그것은 피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기보다 끝까지 무대에 놓여 있던, 이것이 아카이브의 일종이 될 수 있음을 가리키는 테이프 레코더의 몫일 것이다―그 끝은 의도적으로 모든 배우, 가장 먼저 등장한 연출까지의 퇴장 이후, 별도의 스태프가 출현하고 나서 그의 조작에 따라 처리된다.

     

    피나의 연보를 제시하거나 작품 리스트 역시 참조하지 않는다는 건 무용 (역)사학 내의 재현의 계보학이나 미학사적 서술의 지형을 따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보다 피나와 한국, 세계적인 안무가와 그렇지 않은 예술가의 틈을 확인하는, 〈P와 함께 춤을〉은 피나와 수많은 ‘나’의 관계가 더 중요하며, 따라서 그 나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피나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또는 맥거핀으로 자리함을 의미한다. 그를 통해 또한 피나에 대한 문화지리학적 수용의 양상이 조명되기도 하는데, 이는 더 크게는 상징계의 등록 절차로서 제도에 대한 의식, 현실에 대한 불만 또는 희망의 정서로 갈음된다.

     

    피나의 신화성은 나의 세속적 명성과 지위와 연결되므로, ‘나’의 현재성은 피나와 다른 나, 피나가 되지 못한 나의 지위로 상정된다. 따라서 피나라는 실재와의 간극을 향한 아카이브 충동보다는 기억에 대한 접근을 주제로, 피나로 추동된 나의 내면에 침잠하는 〈P와 함께 춤을〉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피나봇이다.

     

    P로 소거된 피나는 목소리-자막의 형식을 갖춘 챗봇으로 현현한다. 피나에 대한 방대한 아카이브를 섭렵하는, 구글 검색을 경유한 정보들을 조금 정돈화시킨 것에 가까운 이 챗봇을 통해, 〈P와 함께 춤을〉은 피나의 부재를 임시적으로 메우고 더욱 강화하며 대타자로서 피나의 자리를 설정한다. 재밌는 건 혹은 인상적인 건 이 피나가 피나라는 실재와의 간격을 스스로 도입하고 지시한다는 점인데, 이는 피나라는 실재와의 벌어진 틈에서 유영하는 배우들의 자리에도 상응한다.

     

    피나의 말을 호출하거나 그 말 자체와 호환되는 이 피나봇은 자신이 신체가 없음을 드러내며 가시화된다. 피나의 관점에서 작품을 연장하기도 하고 현재를 잇기도 한다. 상징 자본으로서 피나의 자리가 부퍼탈이라는 지역을 조명하며, 부퍼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서 슈베베반이라는 위쪽으로 매달려 가는 모노레일과 피나의 상징적 이름의 가치를 비교한다.

     

    ‘피나가 무엇이었을까’가 아닌, ‘나에게 피나란 무엇인가”, 곧 피나를 통한 나의 성찰적 탐험은 아카이브가 즉흥적인 차원의 추출로 환원되는 가운데, 나의 흔적과 파편을 축적하여 나를 재의미화하는 과정으로 변환된다. 따라서 정전으로서 피나의 역사화와 역동적인 차원에서 아카이브로서 피나의 재역사화의 사이에서, 〈P와 함께 춤을〉은 거리를 벌리되, 그것을 통합하지는 않는다. 곧 〈P와 함께 춤을〉은 피나의 중요성이 과거의 축에 속한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의 감정)을 현재 당면한 과제들이 피나의 역사와 거리가 먼 현재에 (비로소 여러 주제, 소재, 의미가 있다는 자기 수용에) 대한 감각을 뒤섞으며 결국 맞바꾼다. 피나는 자기 증명을 위한 일종의 명분에 가깝다.

     

    이는 이미 동시대 국내 예술계의 지형이 갖는 예술의 과제가 선명하게 존재하며, 더 이상 외국의 특정 지역에 대한 리서치나 연구로써 무언가를 갈음하고 위치시키기에는 의미가 없음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피나는 축소되며, 마지막에 피나는 거의 부퍼탈이라는 지역의 한 유명인 정도로 위치하게 된다. 이는 LG아트센터라는 장소 특정적인 차원에서의 제도적 이름을 지시하고 호명하는 것에서 시작된 이 극이, 제도 비판적인 차원을 굴절시켜, 주체의 직접적 행위 대신에 자아의 차원에 대한 보호와 주의로 갈음하는 어떤 태도가 지닌 현재성으로 대체함을 의미한다.

     

    이경성은 피나가 자신의 무용수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알아서 찾게끔 했다는 방법론에 대한 대응의 형식을 구성함으로써만 존재하는데, 이로써 피나의 방법론을 메타적으로 인용하게 된다. 곧 이경성은 배우의 등장 전, 서두만 열고 중간중간 피나봇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질문이라는 형식을 매개하고, 그 안의 배우들의 발화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이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부재하는 피나의 자리를 인계하는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내용을 도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은 그 정리되거나 개입되지 않은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어떤 잉여분을 역설적으로 간직함으로써 성공하게 되는데, 이는 각자의 이야기가 하나의 장/질문이 될 수 있음의 차원에서 균등하고 동등한 차원의 분배를 평등함의 태도로 각인하는 가운데 성립한다.

     

    결과적으로, 〈P와 함께 춤을〉은 피나의 탄츠테아터라는 양식이 아닌, 이에 대한 서술을 일부 포함하며, 피나 리서치, 아카이브를 통한 자료 수합과 재생의 일부를 제한, 대부분의 현재 배우들 스스로의 발화로써 진행하는 뉴다큐멘터리 씨어터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연극(테아터)과 무용(탄츠)의 결합이라는 탄츠테아터의 명명을 단순화시키는 차원에서, 무용가와 배우의 고른 참여는 무용과 연극의 언어의 차이를 매체적으로 갈음하는 사유의 발화로써 이어지는데, 이는 그 이름 자체에서의 무용과 연극의 융합적 가능성, 차원 변화적 가능성을 향하기보다는 작품에 속한 배우(일부)로서의 공통된 토대 아래 서로의 차이를 공유하는 것에 가깝다. 그 발화가 주는 경험들의 생생함은 피나라는 질문에 속하며 피나라는 이름에 가려진 배우들의 자리를 비로소 대리 현전시키고, 이는 역시 부재하는 피나의 자리를 그림자처럼 대신하는 이경성의 부재하며 매개하는 몫에 의거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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