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집단 세 사람, 〈멸종위기종〉: 욕망의 시선 그리고 무심한 시선REVIEW/Theater 2026. 3. 12. 13:11

창작집단 세 사람, 〈멸종위기종〉©유경오[사진 제공=창작산실](이하 상동). 〈멸종위기종〉은 멸종위기종을 다루는 두 가지 인간의 기술을 겹쳐 놓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것에 대한 각기 다른 인간의 시선과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을 보호하고 지키는 동물원 사육사 윤정연과 그것을 찍어 인류에게 그것의 숭고함을 메시지로 전파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반우, 그리고 그것을 전유하는 그의 제자 정은호가 그것이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하이픈을 구성하는, 동물과 소통하는 역량의 전자는 후자의 대중 추수주의적 열망 아래, 동물을 가치의 기호로 정제하는 그 작업의 매개자로서 편입되는데, 이제 그 기호의 발신에 따라 생겨난 세상과 후자의 피드백 고리로부터 모든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그 사이에서 잡지사의 편집장 최유형은 대중의 욕망을 찾고 주조하는 데 두 사진작가 모두를 활용하는 차원에서 또 다른, 지배적인 매개자로 자리하는데, 그것은 또한 그 둘의 욕망 자체를 주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모두의 목표는 그것이 대중으로부터 놀라움의 반응을 폭발적으로 일으킬 수 있느냐의 결과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이것은 결국 멸종위기종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또는 그것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오직 인간에 대한, 그것을 기능적으로만 소비하는 인간에 대한 관찰로 전화함을 의미한다.
유리딱새와 참새 사이에서, 곧 멸종위기종과 평범한 새 사이에서, 참새가 유리딱새로 명명되는 애매한 타협과 합의가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사육사와 편집장 사이에서 멸종위기종을 다루는 두 다른 존재의 첨예한 대립의 양상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주요한 논점으로 연장되지 않는다는 점은 곧 〈멸종위기종〉이 멸종위기종에 대한 기능적 차원의 다룸으로의 환원적 차원에 맞닿는다. 오히려 사진작가의 지속적 생존 가능성의 어려움을 그들을 멸종위기종에 대한 비유로 치환함으로써 그 대상이 전도된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멸종위기종〉은 멸종위기종에서 멸종위기종을 희귀하고 고유한 가치의 대상으로 재정립하는 인간의 양태가 철저히 그가 속한 닫힌 인간 세계의 시스템 안에서 비틀리게 되면서 또한 파국을 맞게 되면서 어떻게 그 욕망의 차원이 변주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으로 순전하게 옮겨지는 것으로 보인다―마치 가려진 새장, 예외적으로 부가되는 새 울음의 사운드는 그 새의 존재 자체를 부재의 장소로 확인시키는 징후적 기호이다. 진짜 갈등은 자연과 문명의 대립이 아니라, 문명의 시차적 차이라는 변주 형태로 벌어지는데, 이는 반우와 은호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진짜 갈등은 그 둘에게서 일어난다.
앞선 합의로부터 촬영 중에 발생한 참새의 죽음이 유리딱새의 죽음으로 세상에 번역됨으로써 반우는 멸종위기종을 보호하기 위한 촬영의 목적을 배반하고 근본적으로 뒤집는 차원에서 송분을 산다. 이러한 비난은 그를 찍기 위해 현장에 같이 투입된 은호의 사진이 자연을 함부로 대상화하지 않고 인간의 겸허한 거리를 유지하는 윤리적 태도에 대한 호평으로 굴절되는데, 이는 이 두 사람의 윤리적 지평을 경계화하기보다는 이 집단의 에너지가 빠르게 전화되고 승화하는 순간적 감정의 양태를 보이는 현상 자체를 가시화한다.
따라서 〈멸종위기종〉은 이 통속성의 가치 토대 아래 움직이는 파시즘적 대중과 그 세계, 인간 본위의 사고 체제 자체를 인물보다 우위에 놓고 다루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참새의 오인이라는 사건의 진실과 멸종위기종 유리딱새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간의 간극은, 순전히 기호로 전치된 유리딱새의 지위로 소급된다. 그리고 이는 그 자신의 욕망의 심급이라는 내재적인 차원에서 반우를 분열시키는데, 중요한 건 유리딱새의 죽음이든 참새의 죽음이든 간에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 참새였다면이라는 가정은 단지 그가 살아날 수 있는 변명의 차원에서 유효하느냐의 여지에서만 검토될 뿐인 것인데, 그렇다면 그의 작업 전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은 생략되고 그 사실이 그가 아닌 사육사에 의해 뒤늦게 밝혀짐에 따라 그의 드러나지 않은 그의 또 다른 선택은 긍정적으로 전화될 수 있었다. 곧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제자 은호가 올바름의 표상이 되었던 사실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려고 했다는 대승적 차원의 희생이 그 진실을 갈음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비난이 그의 제자에게로 굴절되었던 것처럼 그가 다시 진실과 함께 다시 자신의 자리를 탈환하게 되는 것 역시 예측할 수 없던 일이다. 곧 진정한 사건은 새의 죽음이 아니라 그 대중의 예측 불가능한 반응 자체로부터 발생하는데, 마찬가지로 그로부터 은호와 반우의 반응 역시 예측 불가능한 차원을 보여준다. 은호는 쉬이 멸종위기종을 향하는 사진작가의 순수한 열망의 차원에서 자신을 정체화함으로써 반우의 부재를 메우며, 반우 역시 은호의 멸종위기종에 대한 ‘시선’이라는 차원을 전유해 부재하는―죽은―새의 자리를 카메라로 치환해 자신을 비춤으로써 은호가 현상한 누군가의 뒷모습을 정면으로 재현상해 낸다.
이때 기이해지는 건 멸종위기종과 촬영 사이를 매개하(기를 거부하)는 사육사가 자신을 멸종위기종의 자리에 대신 두고 그것을 찍는 반우를 현상하는 최종 사진의 결정권자로 뒤집힌다는 것이다. 곧 그는 멸종위기종이 부재하는 자리를 점유하면서 멸종위기종을 찍는 사진가의 모습을 바라보며 또한 비춘다. 그는 대상화됨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비가시적인 차원에서 차지한다. 그리고 사진작가의 행위는 멸종위기종을 바라보는, 그것의 공백을 바라보고 메우려는 열망을 수행하는 열정적 모델의 그것이 된다.
반우는 유리딱새의 자리에 카메라를 위치시키고 자신을 찍던 은호의 시선을 사육사 정연의 시선으로 전치시킴으로써 은호의 자리를 승계하는데, 거기에는 사실 은호가 다 드러내지 못했던 참 인간적인 사람의 ‘진실’된 면모가 있다. 이것은 진정으로 은호를 멸종위기종으로 치환하는 것과 같다―기꺼이 은호를 경유해 정연은 멸종위기종을 다루지 않고 동시에 은호의 시선을 체현하게 된다. 이러한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카메라를 현장 어딘가에 두고 그 결과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멸종된 은호를 한 번 더 확인 사살하는 반우에 의해 과잉으로 집적된다.

〈멸종위기종〉의 탁월한 지점은 곧 멸종위기종을 직접 다루지 않고서도 다룬다는 것인데, 이때 멸종위기종은 우리의 세계로 옮겨진다. 멸종위기종은 징후적으로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서만 매개의 대상으로 치환될 수 있을 뿐인데,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관념으로 그것이 떠돈다는 지점에서 우리의 인공적 삶과 시스템은 자연을, 생명을 진정 은폐하고 있음을 가시화한다는 지점에서만 멸종위기종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조명한다. 결국 반우와 은호는 동류의 인물로서 반윤리적 차원에 고착된 인물들로서 그 바깥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정연에 의해 그 둘은 동류화된다.그 둘의 눈은 같다는 것, 같은 욕망의 자리를 점유한다는 것을 정연이 결정한다는 건 반대로 그가 어떤 세계에 대한 소유와 사로잡힘의 열망도 없다는 것을 이르는데, 그건 그가 단지 새장 안의 새의 존재처럼 그의 고유한 영역 아래서 살아가는 즉자적인 생명 존재의 자리로 위치지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그는 인간과는 다른 더 순전한 차원에서 동물로 비유되며, 그는 무언가를 대상화하지 않고 단지 비추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가 반우를 찍지만 그건 사실 그가 반우의 욕망 아래 피사체로 머무는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는 가장 순전한 의미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데, 그는 단지 그를 보는 반우를 볼 뿐 카메라를 누르는 건 그의 열망이 결부되지 않은 그에게 위임된 손일 뿐인 것이다. 이 시선과 손 사이에는 비의도성의 의도가 간극으로서 있다. 그런데 그는 왜 그 역할을 기꺼이 맡아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열망은 어떻게 다른 인간을 기능화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가 본 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아무 목적도, 의도도, 판단도 없이 그냥 보는 것”으로서 사진을 찍고자 하는 낙오된 은호의 발화는 어떤 진정함도 갖지 않은 헛된 바람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거기서 반우의 욕망을 고스란히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역설적으로 은호가 꿈꾸는 그 사진은 자동 반사적으로 찍은 앞선 은호의 대리 위임된 기계적 행위로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멸종위기종을 바라보는 인간의 연기된 시선이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반우가 아니라 은호의 얼굴이 있을까.

누군가를 뒤에서 지켜보던 은호의 시선은 결국 은호의 뒷모습이라는 진실로 뒤집힌다. 이러한 시선의 전도는 나는 언제나 나의 시선 안에, 카메라의 시야 안에 닫히며, 그 바깥에는 무심한 시선이 자리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공교롭게도 두 번의 촬영장, 한 번은 가짜 새를 또 다른 한 번은 진짜 새의 부재를 찍는 촬영 모두에 있었던 정연의 자리를 환기한다. 정연은 물리적으로 부재하는 새와 같이 욕망으로부터 비켜나간, 따라서 객관적 시선이 가능한 무심한 카메라, 동물의 시선을 체현한다.은호는 대상과의 진정한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거기에 욕망을 개입시키지 않음으로써 그 안에서 닫히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사진이라는 매체는 필연적으로 프레임 안에 대상을 가두는 행위 아닌가. 여기서 사진은 매체 자체에 대한 물음보다는 오히려 대중문화의 차원을, 은호의 본래 영역이 패션에 있었듯 다큐멘터리가 아닌 강렬하게 소비되고 파급력을 지닌 대상화된 가치를 산출하는 차원에서 그것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그것의 가시성은 그리고 대중을 위한 가시성의 전략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대중을 정의하는 일로 수렴한다.

따라서 자연의 어떤 시선으로 환원되는 정연의 뒷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공허한 주체의 반우의 자리를 맴도는 은호의 어떤 욕망의 스멀거림이 영원히 평행선상을 달리는 설정 아래, 〈멸종위기종〉은 자연과 인간의 간극을 그만큼 가시화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동물원을 나와 오히려 해방으로의 몸짓을 구가하는 정연을 바라보는 은호의 시점은 거꾸로 어떤 해방도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주춤거리는 주체의 무한한 재귀 작용만이 환기되는 것 아닐까. 진리는 저 먼 자연으로 회귀하며, 인간은 욕망의 굴레에 영원히 메이리라는 신탁을 얻은 가운데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본래적 모습’으로, 자본주의적 열망의 추구로 되돌아감에 대한 강력한 변명의 근거가 될 것이다.김민관 편집장
'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해률 작, 윤혜숙 연출, 〈시차〉: 사건을 연결하고 재발명하기 (1) 2026.03.11 이경성 연출, 〈P와 함께 춤을〉: 피나 밖에서의 현전 (0) 2026.03.11 극단 돌파구, 〈튤립〉: 절대적인 사랑의 형상 (0) 2026.03.11 드림플레이 테제21, 〈최후의 분대장-제1부 조선의용군〉(김재엽 작/연출): 숭고한 역사의 형상을 재현한다는 것 (0) 2026.03.10 [제12회 15분연극제] SCENE032, 〈그냥 지루한 말도 해보기로 했다〉(한아름 작/연출): 자기 원환으로서의 무대, 그 내부에서의 현존 (0) 202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