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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해률 작, 윤혜숙 연출, 〈시차〉: 사건을 연결하고 재발명하기
    REVIEW/Theater 2026. 3. 11. 20:16

    배해률 작, 윤혜숙 연출, 〈시차〉[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배해률 작가가 쓴 〈시차〉는 시차를 둔 참사들의 성좌를 구성하는 가운데, 개인들의 미시사를 조립한다. 연극 바깥의, 실재의 참사들은 그 상징성으로 여전히 바깥에 자리하는데, 이는 엄밀히 인물들의 삶에 내재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으며, 참사의 연표라는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듯 보인다. 무대 중앙의 천장에는 시간이 하나의 배경이자 전제 조건으로 장의 진행에 앞서 투사되며 강박적으로 참사의 시점 혹은 그것을 전후로 한 시간을 점검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순차적이고 각자의 고유성을 가진 것이지만, 일정 정도 세대와 그다음 세대, 그리고 개인의 세대적 분기와 같은 생애주기에 따라 분배된다.

     

    참사는 기계적으로 조립되고 줄 세워져 있지만, 〈시차〉는 그것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참사는 우연한 것이며, 개별자들의 삶 역시 그렇다. 삶은 죽음의 자장 안에 있고, 그것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다. 곧 〈시차〉는 참사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참사 이후 결정된 우연한 삶의 반경을 좇는다. 그것들 간에 필연적인 관계를 산출하는 것은 작품의 몫이 아니다. 그럼에도 참사는 하나의 그것과 다음의 그것이 하나의 인물로, 하나의 인물에서 다음 인물로 우연히 만날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1994.10.21)와 세월호 참사(2014.4.16)라는 1막과 2막의 참사는 현재 인물들의 삶의 중간에 병치되는 사건들이다. 이는 인물들과 관련을 맺지 않으며, 인물들은 그것에 무심하거나―전자의 참사는 TV 방송의 형태로 재현된다.―, 독립되어 있다―후자의 참사는 주변의 쉴 새 없는 메시지로 당도한 것이라 추정하게 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 무심함으로부터 혹은 세계와의 독립된 위상으로부터 일종의 평행우주와 같은 세계가 가정되며, 이는 상상력의 영역보다는 태도의 차원을 시사하는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음이 아니라, 그것을 언급할 수 없음의 차원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문학이다, 그리고 이 참사는 문학의 분명한 동력이며 시작이며 새로운 문학적 인물과 삶의 조건을 구성한다. 〈시차〉가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건 이 태도로부터 발생하는 기이한 인물들의 충동이다.

     

    참사가 드리운 그림자가 이들을 뒤덮고 있음은 이는 실재의 참사와 극에서 치환된 다른 참사는 하나의 경계에 접면해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2부에서 반장이 4월 16일 제주도로 떠나는 여행의 이후(로서 결과를 확정하는) 대신에, 하루 전 그와의 일을 반복하며 여러 등장인물이 반장의 자리에서 그의 말을 대신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결국 세월호 참사를 에둘러 말하(지 않)는 방식이다. 애도의 지층에는 미래에서 사라진 이의 자리를 대신 메우는 과거에 고착된 ‘나’, 김선아가 자리한다.

     

    미래의 ‘나’가 역행하여 과거를 손질하지만 다분히 공허하다. 그것은 참사를 순전히 극 외부에 두(어 확고한 자리로 구성하)고 극 내부를 치유받거나 바라볼 수 없는 주체의 환상에 매어 두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과거는 환상화된 공간에 머물고, 이것은 실재와의 시차를 시대착오적으로 선취한다. 고인의 말을 선취하는 일종의 말의 유희는 관객의 무력한 입장과 결부되며, 애도의 수행을 대신한다. 시차는 1부와 2부, 참사와 다른 참사 사이에 있다기보다 실재와 극의 간격 자체이다.

     

    무연고 장례식을 매번 찾는 미지의 인물은 피해 가족으로서 당사자성을 갖지 않은 채 순수한 타자에 대한 애도를 수행한다. 미스터리한 행적의 이 인물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1995.6.29)로 동명이인 친구 선아를 잃은 김선아라는 사실은, 이름의 자의성이 존재를 체현하고 나눠 갖고 제유하는 이름의 절대적 위상을 거꾸로 증명한다. 그리고 오직 남는 것, 영속하는 건 이름뿐이라는 역설적 차원을 말해준다. 그렇게 같은 이름의 타자는 나에게 스며들어 있다. 존재의 시차를 횡단하는 건 이름이며, 영점의 윤리를 구성하는 것 역시 이름이다.

     

    나는 이름으로 소급되면서 그 이름으로부터 확장된다. 이 이름의 윤리를 발명하는 건 물론 세월호라는 특수한 사건, 공동의 책임과 생명으로 묶인 기이한 집단적 애도 차원의 사건이다. 그것은 참사 당사자와의 친연함을 구성한다. 이름은 그 확장된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명분‘이다. 이러한 확장은 또 다른 당사자와의 관계라는 확장을 요청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무작위적인, 필연적이지 않은 우연한 결속의 운명을 수용하는 것이다.

     

    곧 사건과의 시차는 그 시차를 그 자체로 좁히는 대신 다른 사건과의 연대를 통해 또 다른 시차를 생산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아마도 〈시차〉가 말하는 바다. 세월호 참사라는 토대를 또 다른 확장의 방향성 속에서 애도하며 그것을 자의적이고도 우연한 것으로 만드는 것, 아울러 우리의 위치를 끊임없이 재조정하는 것, 죽음의 경로로서 재구성하는 것, 곧 우리 모두가 충동을 경유해 또 다른 타자를 향해 연결되며 이미 친숙해진 타자를 새롭게 제고하는 것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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